50년간 다른 개를 따라서 짖다
수폐전견(隨吠前犬)

명나라 이탁오는 자신의 오십 인생을 굽어보면서 스스로 개라고 자평했다. 다른 개가 짖으면 따라 짖는 개처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대로 믿어 왔던 스스로를 비판한 것이다.
명나라의 국민교육헌장 ‘육유(六諭)’
명나라는 몽골의 원나라를 북쪽으로 내쫓고 중원 지역을 되찾았다. 이것은 송나라가 당나라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고서 건국한 상황과도 닮았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중원이 다시 비(非)한족의 손아귀에 넘어가지 않도록 병권을 장악했다. 아울러 몽골족 지배의 영향으로 인해 생겨난 몽골 풍의 사회 습속을 뜯어고치는 작업에 진력했다.

명 태조는 “새 시대 새 나라 만들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유교적 가치의 일상화에 박차를 가했다. 태조는 말단의 행정 조직을 이갑제(里甲制)로 정비한 뒤에 ‘민방위훈련’처럼 독특한 사상 훈련을 실시했다. 모든 향리마다 목탁을 1개씩 둔다. 이 목탁은 오늘날 사이렌이나 방송용 차량의 역할을 했다. 향리에서 노인이나 장님, 또는 일할 수 없는 병자 중에 적임자를 뽑아서 자식들의 손을 붙잡고 목탁을 치며 육유(六諭)를 큰소리로 외쳤다. 이것을 한 달에 여섯 차례 반복했다. ▶명 태조 주원장의 초상화.
육유(六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웃어른을 존경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고, 자손을 잘 가르치고, 각자 자신의 생업에 힘쓰고 잘못된 일을 벌이지 마라.”(孝順父母, 尊敬長上, 和睦鄕里, 敎訓子孫, 各安生理, 毋作非爲.)1) 육유(六諭)는 청나라에서 다시 확대되었다가 일본의 교육칙어로 발전했고 마침내 우리나라 국민교육의 헌장으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유학은 그 특성상 세속화와 대중화되기에 난점을 지니고 있다. 유학은 사람의 세속적 욕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초월해야 할 대상이지 추구해야 할 과제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유학이 아니라 도교와 불교(칠성각, 산신각 등) 그리고 민간신앙에서 세속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응답을 듣고자 했다.
명나라 태조는 유학의 가치를 육유(六諭)로 단순화시켜서 인민들이 그것을 마치 주문처럼 외워서 그대로 실현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육유(六諭)의 유학 가치는 이성의 자각을 거치지 않고 무의식의 세뇌가 되어버린다. 자꾸만 듣다 보니 해야 할 것 같지만 정작 내가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른다. 유학의 가치가 ‘계몽’의 힘을 빌어서 홍보와 광고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유학의 가치는 더 이상 진정성을 지니고 못하고 강압의 교조가 되어버린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유학의 국교화가 한나라가 아니라 명나라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한다.2)
바로 이렇게 계몽의 탈을 쓴 우스꽝스러운 홍보의 시대에서 명나라의 걸출한 사상가 이탁오(李卓吾, 1527-1602)가 활동했다. 이탁오는 광기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면서 교조화된 유학과 전면전을 치렀다.
전통(상투어)이 된 진리, ‘개’ 논란
오늘날 우리가 막돼먹은 사람을 가리켜서 비속어로 ‘개자식’이라고 한다. 오늘날 중국어에서도 ‘투짜이즈(兔崽子)’ 또는 ‘고우짜이즈(狗崽子)’라고 한다. 중국 철학사에서 두 차례 ‘개’가 논란이 되었다. 일찍이 공자가 정치적 기회를 찾아 천하를 돌아다니다가 일행과 헤어진 적이 있었다. 마침 비가 내려서 공자는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공자의 모습을 보고 ‘상가구(喪家狗, 상갓집 개)’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처량한 신세를 가리킨다. 나중에 공자에 이 말을 전해 듣고서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라며 자조적으로 웃은 적이 있다.
명나라 이탁오는 자신의 오십 인생을 굽어보면서 스스로 개라고 자평했다.3) 다른 개가 짖으면 따라 짖는 개처럼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대로 믿어 왔던 스스로를 비판한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그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또 공자를 존경했지만 어떤 점이 존경할 만한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른 바 난쟁이가 겨우 사람들의 가랑이 사이로 연희를 구경하다가 다른 사람이 재미있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재미있다고 소리치며 장단을 맞추는 격이었다. 이처럼 나는 오십 이전에 참으로 한 마리 개였다. 앞에 있는 개가 뭔가를 보고서 ‘왈왈’ 짖으면 나도 따라서 ‘왈왈’ 짖었다. 만약 누가 나더러 크게 짖는 이유를 물어본다면 아무 말도 못하고 마냥 벙어리마냥 씩 웃을 뿐이다.” (余自幼讀聖敎不知聖敎, 尊孔子不知孔夫子何自可尊. 所謂矮者觀場, 隨人說硏, 和聲而已. 是余五十以前眞一犬也. 因前犬吠形, 亦隨而吠之, 若問以吠聲之故, 正好啞然自笑也已.)

공자는 자신을 스스로 개라고 하지 않았다. 그의 초라한 형색을 보고 다른 사람이 말했던 것이다. 이탁오는 한때의 초라한 꼴이 아니라 오십 년에 걸친 전체의 인생이 아무런 주관 없이 세상 흐름에 떠밀리듯 살아온 삶을 두고 개라고 자평하고 있다. 개를 끌어들인 점은 같지만 그 내용은 공자와 이탁오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탁오.(李卓吾, 1527-1602). 이지(李贄)라고도 하며 탁오(卓吾)는 호이다.
이탁오의 비유는 자세하게 살펴볼 만하다. 난쟁이와 연희의 관계가 이탁오와 성교(聖敎)의 관계에 유비되고 있다. TV나 영화가 없던 시절에 서커스, 노래, 공연으로 어우러진 연희는 당시 최고로 환영을 받을 오락이었다. 연희는 재미없다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절대적인 재미를 가지고 있었다. 성교(聖敎)도 제대로 이해하느냐를 떠나서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가르침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난쟁이는 사람들의 가랑이 사이로 연희를 보는 등 마는 둥 하지만 그이는 사람들이 울고 웃는 반응에 그대로 동조할 뿐이다. 성교(聖敎)도 사람들이 분석과 비판의 지성을 들이대지 못하고 옳다고 하니 무조건 옳은 줄 알고 “그저 예 맞습니다. 믿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탁오는 50세에 이르러 진리를 이해하기도 전에 그대로 믿어 왔던 지난날의 사상 관습에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서 안다”고 한 것이니 결국 아무 것도 “모르고 안다”고 한 것이다. 그는 이를 앞집의 개가 짖으면 뒷집의 개도 덮어 놓고 따라서 왈왈 짖는 형국에다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 관습은 사정을 모르면 행복하지만 알고 나면 진저리칠 정도로 무섭다.
동심으로 진리에 맞서다
최근 미국 콜로라도 주의 초등학교에서 딜래니 클레멘츠가 소아암 투병을 하며 시술하느라 머리를 깎자 캠린 린프로가 친구를 격려하기 위해 자신도 삭발을 하고 등교했다. 학교 측은 “학생의 안전을 확보하고 산만한 분위기를 방지하기 위해 삭발한 학생은 교실에 들어오지 못한다”라는 규정을 들어서 학생을 정학 조치를 취했다. 학생의 어머니가 삭발한 딸의 모습과 사연을 페이스북에 올린 결과 인터넷에서 학교 측을 비판하는 이야기로 들끓었다.4)
학교 측은 운영위원회의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정학 조치를 재심한 결과 “이번 사안은 급박하고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고 판단돼 정학 처분을 유예한다”라고 결정했다. 사건이 일단락된 뒤에 학생은 TV 인터뷰에서 “있는 규정을 원칙대로 적용한 학교의 조치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규정을 바꿔 달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우리는 린프로의 사건과 처리 과정을 보면서 이탁오의 자칭 ‘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성교(聖敎)와 규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되거나 재해석될 수 있다. 규정의 절대성을 내세우며 상황의 특수성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이 생겨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교(聖敎)의 절대성을 내세우며 비판과 분석의 지성을 발휘하지 않기 때문에 이탁오의 개 논란이 생겨난 것이다.
이탁오는 자신을 개로 자각한 뒤에 더 이상 개로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개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진리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마음으로 진리를 이해하려고 했다. 전자라면 이탁오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탁오다움’이라고는 손톱 끝만큼도 없는 것이다. 즉 이탁오는 진리에 따라 조종되는 기계와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이탁오는 진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바탕으로 아이의 마음, 즉 동심(童心)에 주목했다.5)
“동심은 거짓이 없고 순진 그 자체로 가장 먼저 갖는 본래 마음이다. 동심을 잃어버린다면 진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 동자는 사람의 처음이고, 동심은 마음의 처음이다. 최초의 마음이 어찌 없어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동심은 느닷없이 갑자기 잃게 될까? 어린아이일 때 듣고 보는 것이 귀와 눈으로 전달되면 마음에서 주인 역할을 하므로 동심이 없어진다. 점차 자라면서 도리(聖敎)가 듣고 보는 것으로 전달되면 마음에서 주인 역할을 하므로 동심이 없어진다.” (夫童心者, 絶假純眞, 最初一念之本心也. 若失却童心, 便失却眞心. …… 童子者, 人之初也. 童心者, 心之初也. 夫心之初曷可失也! 然童心胡然而遽失也? 蓋方其始也, 有聞見從耳目而入, 而以爲主于其內而童心失. 其長也, 有道理從聞見而入, 而以爲主于其內而童心失.)

이탁오는 사회화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지만 그 개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학습을 통해 기성의 제도와 가치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 아이는 제도와 가치를 학습시키는 부모와 스승 그리고 사회에 비해 열세에 있다.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고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보게 된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기성의 제도와 가치가 아이의 마음을 압도하게 된다. 우리는 압도된 상태를 일상어로 “철이 들었다”라고 한다. 이탁오는 “철이 든 상태”가 바로 완전하게 사회화된 상태, 즉 과(過)사회화(oversocialzation)로 보았다. 이 과사회화는 역설적으로 성교(聖敎)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기는 하지만 아이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탁오는 아이의 마음, ‘동심’에 주목하면서 이를 진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바탕으로 보았다.
이탁오는 동심이야말로 과사회화된 사람이 진리에 질식하지 않고 진리와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근원으로 보았다. 그것이 다른 어떤 것을 고려하지 않고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린프로가 규정을 알고 있더라도 정학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친구를 격려하겠다는 마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어른은 완전히 사회화되어 ‘삭발’을 생각조차 못하지만 아이 린프로는 규정의 무게를 밀어내고 ‘격려의 삭발’을 한 것이다.
진리와 주체의 정위
흔히 철학사에서 이탁오가 성교(聖敎)를 부정한 인물로 평가한다. 이것은 이탁오가 여러 차례에 걸쳐 공자와 성교(聖敎)를 비판하는 데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공자의 신화화되고 절대화된 부분을 걷어내고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말을 할 필요 없다. 이탁오의 말을 살펴보면 그의 비판이 무엇을 향했는지를 알 수 있다.6)
“나는 오늘(74세)에서야 우리의 부자(夫子, 공자)를 제대로 이해하여 더 이상 따라 짖지 않게 되었다. 과거의 난쟁이가 나이가 들어 마침내 어른이 된 것이다. 비록 나의 뜻과 기상이 한몫을 했지만 스승과 벗의 공을 어찌 업신여길 수 있으리오! 내가 성인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자평하게 되었으므로 불교의 친구들과 그것을 공유하고 싶다.” (余今日知吾夫子矣, 不吠聲矣. 向作矮子, 至老遂爲長人矣. 雖余志氣可取, 然師友之功安可誣耶! 旣自謂知聖, 故亦欲與釋子輩共之.)
이탁오는 오랜 회의와 비판 그리고 방황 끝에 스스로 성인 공자와 만나게 된 것이다. 이웃의 개가 짖으면 아무 생각 없이 따라 짖던 시절을 끝내고 스스로 혼자서 짖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혼자 짖게 된 뒤에 그는 성인(공자)을 떠났다고 술회하는 것이 아니라 공자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그는 교조화된 공자 이해를 넘어 자기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는 공자 이해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이탁오는 비슷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았다. 고염무(顧炎武, 1613-1682)는 “옛날부터 소인 중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인에게 반기를 든 사람이라면 이탁오보다 심한 자가 없었다.”(自古以來, 小人之無忌憚, 而敢于叛聖人者, 莫甚于李贄.)고 말했다.7) 이런 혹평에도 불구하고 이탁오가 1602년에 체포된 뒤 옥중에 수감되었다가 76세로 자살한 뒤에 그의 글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의 책을 정리하고 간행했던 인물의 말을 보면 이탁오는 고염무의 평가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드러났다. 초횡(焦竑)은 이탁오의 주장이 모두 이성에 뿌리박고 있지만 횡행하는 이지(李贄, 이탁오의 본명)의 가짜 글은 그렇지 않다며 염려하고 있다. 장내(張鼐)는 이탁오의 편지 글을 읽고서 그의 심사를 표현했다.8)
“이탁오는 말세에 혼자 사람인 척하는 유자를 미워했다. 그들은 의리를 가장하고 사람의 장막을 치며 이러저러한 장구와 해설 놀이에 빠져 이목의 관심을 쫓아갈 뿐 생명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 이탁오는 마침내 무상한 세법의 자취를 던져버리고 사람이 얼굴에 분칠하고서 판을 벌이는 악습을 깨뜨려버렸다. 그가 하는 짓이 괴상하게 보이지만 마음만은 진실하고 행적은 기이하게 보이지만 가슴만은 뜨겁다. … 요약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곁가지를 잘라내고 곧바로 본심을 살피도록 했다. 신하라면 죽도록 충실하고 자식이라면 죽도록 효도하고 친구라면 죽도록 사귀고 무사라면 죽도록 싸운다.” (卓吾疾末世爲人之儒, 假義理, 設牆壁, 種種章句解說, 俱逐耳目之流, 不認生命之源. 遂以脫落世法之踪, 破人間塗面登場之習. 事可怪而心則眞, 迹若奇而腸則熱. … 總之, 要人絶盡支蔓, 直見本心, 爲臣死忠, 爲子死孝, 朋友死交, 武夫死戰而已!)
지하의 이탁오가 장내의 글을 읽는다면 자신의 속마음의 99.99%를 나타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탁오가 공자를 비판하는 구절을 들어서 쉽게 이탁오의 주체를 근대적 인간으로 상정할 수는 없다. 이탁오는 과사회화(oversocialzation)로 신음하며 고통 받는 심신을 초월하고자 한 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희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시대는 봉건 윤리를 부정하고 평등한 인간을 긍정하는 사회가 아니었다.
이렇게 보면 이탁오는 암묵적이며 무비판적으로 답습해 온 전통의 권위와 성교(공자)의 신성성에 반기를 들면서 억압 체제로 변해버린 전통과 성교(聖敎)의 새로운 생명을 길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는 이탁오의 그러한 움직임마저도 괴상하고 기이하게 보였던 것이다.
주석
1) 자세한 내용은 미조구찌 유조 외, 동국대 동양사연구실 옮김, <중국의 예치 시스템>(청계, 2001): 111쪽 참조.
2) 신정근, <동중서: 중화주의의 개막>(태학사, 2004)
3) 전체 맥락은 <성교소인(聖敎小引)>, 이탁오, 김혜경 옮김, <속분서>(한길사, 2007): 243~244쪽 참조.
4) “美 초등학생, 암 투병 친구 격려하려 삭발했다 정학”, 연합뉴스 2014년 3월 30일자 기사.
5) 전체 맥락은 <동심설(童心說)>, 이탁오, 김혜경 옮김, <분서 Ⅰ>(한길사, 2007): 348~352쪽 참조.
6) 전체 맥락은 <성교소인(聖敎小引)>, 이탁오, 김혜경 옮김, <속분서>(한길사, 2007): 243~244쪽 참조.
7) ‘이지(李贄)’, <일지록(日知錄)> 권 18
8) 전체 맥락은 <독탁오노자서술(讀卓吾老子書述)>, 이지, 김혜경 옮김, <속분서>(한길사, 2007): 29~31쪽 참조.
글 신정근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기획물 전체>철학의 숲>동양철학 읽기 201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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