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스테리아
김이듬 시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454
2014년 8월 11일 발행
174쪽/8000원
한국 시단에서 유일무이한 시 세계를 구축해 온 김이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 출간됐다. 이 시집에 수록된 50편 모두 한층 아름다워진 충격파로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에너지를 보여주며, 다른 한편에서는 감정의 긴장, 고조, 완결에 이르는 리듬이나 색조의 아름다운 변화가 원숙해진 필치로 펼쳐진다.
한층 더 아름다워진 충격파, 원숙해진 필치
2001년 등단 이후 “섹시한 은유와 도발적 상상력”(<별 모양의 얼룩>, 천년의시작, 2005)으로 “몽유의 마녀”(<명랑하라 팜 파탈>, 문학과지성사, 2007)가 되어, “말과 피를 동시에 철철 흘리는 온몸의 마임”(<말할 수 없는 애인>, 문학과지성사, 2011)을 보여주며 한국 시단에서 유일무이한 시 세계를 구축해 온 김이듬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히스테리아>(문학과지성사, 2014)를 출간했다. 그 사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파견 작가로 선정되어 반년 가까이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체류하며 쓴 시편들로 네 번째 시집 <베를린, 달렘의 노래>(서정시학, 2013)를 내기도 했다.
이번 시집 수록작 중 시인에게 <2014 웹진시인광장 올해의 좋은 시 상>을 안겨준 ‘시골 창녀’는 우리 시단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 넣어줄 시로 큰 호평을 받았는데, 시집에 수록된 50편 모두 한층 아름다워진 충격파로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에너지를 보여준다. 그런 한편에서는 감정의 긴장-고조-완결에 이르는 리듬이나 색조의 아름다운 변화가 원숙해진 필치로 펼쳐진다.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 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靈感)을 뫼실까 하는 이 심정은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나는 사채 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녀하고 다를 바 없다 ―‘시골 창녀’ 부분
히스테리를 불러일으키는 일들과 마주하기
김이듬은 도처에서 맞닥뜨릴 만한 불쾌하지만 사소한 것을 시 안으로 끌어들인 뒤 의미를 강력하게 확장하곤 한다. 이를테면 주문한 것과 다른 음식을 받아든 순간의 내적 갈등을 들여다보면서 세계와의 대결은 늘 영역 밖으로의 추방과 제거가 전제되어 있던 기억을 소환하거나(‘사과 없어요’) 맹인 안마사의 지리멸렬한 인생 역정을 듣는 와중에 시를 쓰는 일의 의미를 반성하기도 하는(‘변신’) 식이다. 그 외 시인이 실제로 겪은 듯한 일화들이 산재해 있다. 보이스피싱(‘운석이 쏟아지는 밤에’), 온라인 직거래 사기(‘빈티지 소울’), 시 창작 수강생과의 에피소드(‘내 눈을 감기세요’)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보이스피싱이나 온라인 거래 사기의 부조리성은 물론이거니와 시 창작 교실에서 수강생이 기성의 시를 들고 들어와 자기 것인 양 선생을 속이고, 선생은 그게 기성의 시인 줄도 모르고 맹렬히 지적했다는 이야기는 얼핏 이 세상에서 나 아닌 모든 것들이 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기분을 들게 한다. 그러나 김이듬은 이렇게 히스테리를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이 바로 삶을 구성하는 근원적인 요소이며 고귀한 체험이라고 기꺼이 받아들인다. 사태의 발생과 시인의 수용 사이에 체념이나 회피가 아닌 돌올한 시 혼으로 일궈낸 예술적 승화가 일어난다.
이건 너무 상투적이잖아요. 이렇게 쓰시면 안 됩니다. 노인이 내민 시에 칼질을 한다. (…) 선생님, 방금 그 작품은 내가 쓴 게 아닙니다. 아무리 애써도 시를 쓸 수가 없어 유명한 시인의 수상 작품을 필사해봤어요. ―‘내 눈을 감기세요’ 부분
사회 주류의 폭력에 희생된 이들의 반란
김이듬의 시에는 자주 미혼모, 창녀, 장애인, 이혼녀, 동성애자, 정신질환자, 거지, 가난한 노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이 직접 등장한다. 이들은 사회의 주류에 편승하지 못하고 중심에서 거듭거듭 밀려난 자들이다. 공동체의 주류는 이들을 이질적이고 위험스런 존재로 여기고 ‘정화’의 대상으로 삼는다. 말하자면 이들은 일종의 ‘덤’이고 ‘부산물’이며 ‘잉여’인 셈이다. 비록 유무형의 박해와 소외에 의해 주변부까지 밀려나긴 했지만 완전히 추방될 수는 없으므로 주류들의 눈 밖에서라도 머물기로 한다. 그리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이에 조금씩,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형태로 자기들만의 질서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김이듬은 바로 그들의 질서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는다. 중심부의 문화적 무의식을 잠식할 만한 새로움이 거기에 있고 거만하고 부조리한 기성의 질서에 일침을 놓을 날카로움이 곤두서 있기 때문이다. 이제 김이듬의 시에서 비주류들은 꿈틀대던 잠재력을 펼치려는 참이다. 다만 앙갚음은 아니게, 잊고 있던 사이에 성큼 중요해진 듯하게 반란이 일어나려 한다.
다만 꼭 그래야만 한다면,
허무와 활기가 동시에
B시의 밑바닥에서 어지럽게 퍼져 오를 거예요. ―‘B시에서 일어날 일’ 부분
히스테리아에서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엿보다
‘히스테리아’라는 기묘한 나라는 앞선 시집들에서 해 온 작업들에 비추어 김이듬만이 세울 수 있는 세계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렇다면 히스테리아는 어디에 터전을 잡고 있는가. 보편적인 인식으로 세계를 중심과 주변부로 나누려 한다면 히스테리아는 분명히 주변부 어디에 울타리를 치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김이듬의 히스테리아는 여럿이서 하나를, 다수가 소수를 둘러싸고 박해를 가하는 그 현장을 말하는 중이다. 바로 그 현장에서라면 진짜 중심은 어디인가 하는 것이 김이듬의 질문이 아닐까.
김이듬은 이번 시집을 통해 박해의 한가운데로 기꺼이 들어가서 ‘하나’의 목소리, 소수의 목소리를 따라 외친다. 오직 ‘차이’로서만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지만 지금부터는 가능성이 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가능성이 주변으로 전이될 것임을 활발하고 솔직한 시어로 주장한다. 그 최종 목적이 어우러짐을 향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어우러짐! 히스테리아에서 유토피아의 모습을 찾겠다는 이 무모한 시도 또한 시 이력 14년에 다섯 번째 시집을 내놓는 김이듬에게 맡겨봄직한 도전으로 보인다.
■ 시인의 말
우울, 몽상, 슬픔
그리고 광기 같은 게 불러주었으나
떠돌았으니
원주, 증평, 담양
그 숨은 빛의 통로들
없었다면 받아 적지 못했을 것이다.
외로운 일,
감사하다.
2014년 여름
김이듬
■ 시인의 산문
‘달의 물’ 한잔 마시라고 했다. 그것은 찬 ‘다래물’이었다.
‘다이어리’를 잃어버린 사람 있으면 찾아가라고 했다. 나갔더니 누군가의 ‘바이올린’이었다.
그래서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라는 시를 초교지에서 뺐다. 몇 편 더 누락했다. 다 삭제할 순 없으니까. 대폭 수정할 기회가 있었지만 대다수의 시를 그대로 두었다. 분통 터졌고 고치기 귀찮았다. 기억보다 무의식적 기억, 발언 혹은 의견 이전인 채로 방치하는 쪽을 택했다. 내 의지와 동떨어진 ‘저항resistance’ 상태로 수정을 거부하는 심리적 충동이 들끓었다. 뭐라 하든 어쩌리.
“내 작업은 비난받고
나의 일은 어리석고 쓸모없는
불손한 죄로 보여지나니”
3백여 년 전, 윈칠리라는 여성 작가의 말을(버지니아 울프, <나만의 방>), 유감스럽게도 헐떡거리며 이 낡고 우울한 하소연이 고인 웅덩이를, 휘저어보려는 게 아니다. 뛰어들려 했다. 파도 속으로, 3백여 명의 피바다로, 살아남아서 광란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에 투신하여 단 한 편이라도 써야 했다. 부활의 시, 복수의 시, 애도는 이르지 않나? 하지만 이렇게 되다니! 내겐 지속적인 불안감이 남아 있다. 안면의 틱, 육체를 종종 내다 바치는데도 제정신이 돌아오기 전에 피부가 걸쳐 있다.
■ 작가 소개
김이듬은 진주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다. 부산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경상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2001년 계간 <포에지> 가을호에 ‘욕조 a에서 달리는 욕조 A를 지나’ 외 6편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데뷔했으며, 시집으로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와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가 있다. 시와 세계 작품상, 김달진 창원문학상, 올해의 좋은 시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상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시골 창녀
진주에 기생이 많았다고 해도
우리 집안에는 그런 여자 없었다 한다
지리산 자락 아래 진주 기생이 이 나라 가장 오랜 기생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우리 집안에 열녀는 있어도 기생은 없었단다
백정이나 노비, 상인 출신도 없는 사대부 선비 집안이었다며 아버지는 족보를 외우신다
낮에 우리는 촉석루 앞마당에서 진주교방굿거리춤을 보고 있었다
색한삼 양손에 끼고 버선발로 검무를 추는 여자와 눈이 맞았다
집안 조상 중에 기생 하나 없었다는 게 이상하다
창가에 달 오르면 부푼 가슴으로 가야금을 뜯던 관비 고모도 없고
술자리 시중이 싫어 자결한 할미도 없다는 거
인물 좋았던 계집종 어미도 없었고
색색비단을 팔러 강을 건너던 삼촌도 없었다는 거
온갖 멸시와 천대에 칼을 뽑아들었던 백정 할아비도 없었다는 말은
너무나 서운하다
국란 때마다 나라 구한 조상은 있어도 기생으로 팔려간 딸 하나 없었다는 말은 진짜 쓸쓸하다
내 마음의 기생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밤 강가에 머물며 영감(靈感)을 뫼실까 하는 이 심정은
영혼이라도 팔아 시 한 줄 얻고 싶은 이 퇴폐를 어찌할까
밤마다 칼춤을 추는 나의 유흥은 어느 별에 박힌 유전자인가
나는 사채 이자에 묶인 육체파 창녀하고 다를 바 없다
나는 기생이다 위독한 어머니를 위해 팔려간 소녀가 아니다 자발적으로 음란하고 방탕한 감정 창녀다 자다 일어나 하는 기분으로 토하고 마시고 다시 하는 기분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흔들며 엉망진창 여럿이 분위기를 살리는 기분으로 뭔가를 쓴다
다시 나는 진주 남강가를 걷는다 유등축제가 열리는 밤이다
취객이 말을 거는 야시장 강변이다 다국적의 등불이 강물 위를 떠가고 떠내려가다 엉망진창 걸려 있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더러운 입김으로 시골 장터는 불야성이다
부스스 펜을 꺼낸다 졸린다 펜을 물고 입술을 넘쳐 잉크가 번지는 줄 모르고 코를 훌쩍이며 강가에 앉아 뭔가를 쓴다 나는 내가 쓴 시 몇 줄에 묶였다 드디어 시에 결박되었다고 믿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눈앞에서 마귀가 바지를 내리고
빨면 시 한 줄 주지
악마라도 빨고 또 빨고, 계속해서 빨 심정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와 절박하지 않게 치욕적인 감정도 없이
커다란 펜을 문 채 나는 빤다 시가 쏟아질 때까지
나는 감정 갈보, 시인이라고 소개할 때면 창녀라고 자백하는 기분이다 조상 중에 자신을 파는 사람은 없었다 ‘너처럼 나쁜 피가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펜을 불끈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지금 유등 축제가 한창인 달밤에 늙은 천기(賤技)가 되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추는 것 같다
히스테리아
이 인간을 물어뜯고 싶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널 물어뜯어 죽일 수 있다면 야 어딜 만져 야야 손 저리 치워 곧 나는 찢어진다 찢어질 것 같다 발작하며 울부짖으려다 손으로 아랫배를 꽉 누른다 심호흡한다 만지지 마 제발 기대지 말라고 신경질 나게 왜 이래 팽팽해진 가죽을 찢고 여우든 늑대든 튀어나오려고 한다 피가 흐르는데 핏자국이 달무리처럼 푸른 시트로 번져가는데 본능이라니 보름달 때문이라니 조용히 해라 진리를 말하는 자여 진리를 알거든 너만 알고 있어라 더러운 인간들의 복음 주기적인 출혈과 복통 나는 멈추지 않는데 복잡해 죽겠는데 안으로 안으로 들어오려는 인간들 나는 말이야 인싸이더잖아 아웃싸이더가 아냐 넌 자면서도 중얼거리네 갑작스런 출혈인데 피 흐르는데 반복적으로 열렸다 닫혔다 하는 큰 문이 달린 세계 이동하다 반복적으로 멈추는 바퀴 바뀌지 않는 노선 벗어나야 하는데 나가야 하는데 대형 생리대가 필요해요 곯아떨어진 이 인간을 어떻게 하나 내 외투 안으로 손을 넣고 갈겨쓴 편지를 읽듯 잠꼬대까지 하는 이 죽일놈을 한방 갈기고 싶은데 이놈의 애인을 어떻게 하나 덥석 목덜미를 물고 뛰어내릴 수 있다면 갈기를 휘날리며 한밤의 철도 위를 내달릴 수 있다면 달이 뜬 붉은 해안으로 그 흐르는 모래사장 시원한 우물 옆으로 가서 너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위 글은 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 책 소개에서 가져온 것입니다._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