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 소설가
김승옥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찬사와 함께 60년대 문학계를 풍미했던 소설가 김승옥. 그는 <서울 1964년 겨울>(제10회 동인문학상), <서울의 달빛 0장>(제1회 이상문학상), <무진기행> 등으로 1960년대 우리나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1980년대 초 <먼지의 방>(동아일보)을 연재하던 중 신군부의 검열에 항의하며 절필을 선언해 많은 이들의 안타까운 탄식을 불러일으켰다.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지만 2004년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을 통해 절필 24년 만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김승옥. 긴 겨울잠 같았던 투병 생활을 뒤로 하고 활동을 재개한 소설가 김승옥의 인생을 마주해보자.
김승옥 선생님의 건강상의 이유로, 인터뷰 내용은 서면 인터뷰 및 자서전 <내가 만난 하나님>을 토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Q.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11년이 지났습니다. 요즘 건강 상태는 어떠신지요?
제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날이 2003년 2월이에요.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이문구의 부음을 접하고 장례식장에 도착한 직후였죠. 바쁘게 지내던 일상이 화근이었던 것 같아요. 낮에는 세종대학교 교수로 활동했고, 밤에는 성결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했거든요. 시간만 나면 성경책을 읽었고요. 그러다 보니 늘 잠이 모자라고 피곤한 상태였죠. 거기에 친구의 죽음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으니 쓰러지는 게 당연했을지도 모르죠. 그런 제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게 기적 같아요. 물론 언어장애가 왔지만 다른 곳은 전혀 이상이 없어요. 모두 이런 저를 보고 기적이라고 했죠.
처음에는 거동도 불편했지만, 이제는 혼자서 외출을 하고 지인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러워졌어요. 제 건강 상태가 호전될 수 있었던 건 가족 덕분이에요. 아내와 두 아들이 많은 고생을 했어요. 가족이 없었다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겠죠. 그리고 동생 김영옥과 김상옥도 저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고요. 지금은 식이요법과 간단한 운동으로 정상에 가까운 체력을 유지하고 있어요. 음식은 가리는 것 없이 뭐든 잘 먹고 있습니다.
요즘 주말은 서울에서, 주중엔 거의 순천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2010년 순천시가 조성한 순천문학관에 제 작품집과 문학상 상패,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의 영화 간판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이 있어요. 그곳에 제 집필실도 마련돼 있거든요. 주로 문학관을 찾는 관광객들과 만남을 갖고, 책도 보고, 또 매일 글공부를 하고 있어요. 서울과 순천을 오가며 만나는 친구들과의 시간도 건강을 회복하는 데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Q. 선생님의 유년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셨나요?

저는 1941년 12월 23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어요. 1945년 광복되던 해에 귀국해서 어머니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성장했죠. 1948년, 제가 여덟 살,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에 ‘여수순천사건’이 터졌어요.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토착적인 남로당과 함께 여수, 순천 등지를 점령하고 적화 활동을 시작하자 진압군이 포위하고 토벌했던 사건이죠. ◀젊은 나이에 청상이 되어 삯바느질로 3형제를 키운 김승옥 선생의 모친. “우리 아들이 읽고 싶은 책은 마음대로 읽게 하고 사고 싶은 책은 그냥 가져가게 하면 월말에 들러 값을 치르겠다”고 했다던 그의 모친. 전후 한국 문단의 암울하고 고답적인 문체를 벗어난 <생명연습>과 <무진기행> 같은 혁명적 감수성의 기원은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어머니 윤계자 여사와 김승옥 선생의 어릴 적 모습.
이 사건으로 우익이다 좌익이다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총살되었어요. 당시 30대 초반이셨던 제 아버지도 그 사건 속에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어요.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인데, 그때가 마지막이었던 거죠. 불쑥 들어오셔서 용돈을 주고 떠나셨어요. 꽤 액수가 컸기 때문에 그날을 기억해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시대이기 때문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공포심밖에는 없었지만, 어린 나이임에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인간이 죽을 수 있는 존재란 사실이 제 인생의 큰 문젯거리가 되어버렸죠. 인간은 왜 태어날까? 영원히 사는 방법은 없을까? 죽어 없어질 바엔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그런 생각들이 저를 짓눌렀어요.
좌익이다 우익이다 나누어서 서로 죽이는 이유가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 어른들의 설명이었어요. 생각이 다르면 서로 죽여야 하는 게 인간이란 말인가? 좋은 생각이란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생각일 텐데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생각이란 결국 나쁜 생각이 아닌가? 도대체 어떤 생각인가? 머릿속이 복잡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다가 3년 후, 제가 열한 살이던 초등학교 4학년 때, 두 남동생 아래로 하나밖에 없던 세 살짜리 여동생이 심한 열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제가 항상 업고 다닐 만큼 사랑했던 여동생이었는데 그런 여동생이 죽으니 죽음이라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슬픔이 분노로까지 이어졌죠. 이제 말을 몇 마디 배워 “오빠, 밥 먹자.” 하던 아이가 추운 겨울날 땅에 파묻힌 것을 생각하면 어디서건 눈물이 쏟아졌어요. 여동생이 죽은 후에 저는 순천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어요. 사람이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뭔가 희망을 걸고 열심히 참석했죠.

Q. 가족을 잃은 아픔을 신앙으로 이겨내신 건가요?
세상을 떠난 여동생과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세상에 홀로 남아 어린 아들 셋 키우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신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했어요. 방학 중엔 새벽기도도 다녔고, 평소엔 저녁식사 후 동생들을 데리고 여러 곡의 찬송가를 부르며 공부를 하곤 했어요. 믿음 생활 덕분에 비교적 성실한 소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무리 목사님의 설교를 열심히 들어도 인간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어요. 죽으면 땅에 파묻는데 도대체 천국을 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믿으라는 것은 저에게 좀 무리한 당부였어요. ▶여섯 살 되던 해 무렵의 김승옥 선생. 1950년 5월 김승옥의 아버지는 여순사건으로 사망했다. 아버지의 소식에 김승옥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오동도로 갔다. 자식들과 함께 바다에 빠져 죽으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의 두려운 기억은 김승옥 선생에게 평생 가족을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자리 잡았다.
결정적으로 교회 출석을 그만두고 무신론자로 변하게 된 건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죠. 그때 성경을 완독했는데 성경을 읽고 나니까 오히려 더 큰 의심에 빠지게 되더군요. 지금은 다시 종교에 귀의했지만, 당시 저로서는 전 우주의 영원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음성으로, 특히 이스라엘의 특정인에게 이스라엘 말씨로 얘기하셨다는 사실을 도저히 긍정하기 어려웠어요.
‘아,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책이었구나. 이스라엘의 건국 신화에 권위를 붙이기 위해서 하나님을 끌어다 붙였구나.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단군신화라는 건국 신화에 하나님 권위를 갖다 붙이는 건 일상다반사가 아닌가?’ 그런 의심이 더욱 깊어진 거죠. 성경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책이라고 규정하고 나니까 저와 기독교는 아무 관계가 없어졌고 대학에 진학한 후에 교회는 아주 남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제가 훗날 전도를 하고 다니니 주위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낄 만했지요.

Q. 학창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 6.25가 터진 1950년, 그때 우리 가족은 경상남도 남해로 피난을 갔는데 피난지 남해에서 우연히 <검사와 여선생>이라는 소설을 읽게 되었어요. 또, 김래성 씨의 <청춘극장>도 그곳에서 읽었죠. 햇볕이 뜨거운 여름철, 아주 무료하기 짝이 없는 그곳에서 소설책을 읽으며 세계에 대해 새로 눈을 뜬 거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넓은 세계를 한 권의 책 속에서 발견한 셈이죠.
순천중학교에 다닐 때에도 독서를 많이 했어요. 주로 소설책을 즐겨 읽었어요. 이광수, 김동인 등 국내 작가들과 프랑스의 기 드 모파상, 영국의 D. H. 로렌스, 러시아의 톨스토이 등의 작품을 챙겨 보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러면서 순천중학교 교지 편집부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고, 교지에 콩트나 수필 등을 발표하기도 했어요. 월간 <소년세계>에 동시를 투고해서 게재되기도 했지요. ◀전라남도 순천에서 성장한 김승옥 선생. 그는 순천 중고등학교 시절 교지 편집, 학교 대표 배구선수, 학생회장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고 교지에 콩트와 수필을 투고해 일찍부터 문학에 두각을 나타냈다. 순천고 재학 시절 김승옥 선생의 모습.
그렇다고 해서 책만 읽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중학교 시절부터 배구부에서 활동을 했는데 학교 대표로 배구 시합도 나가곤 했어요. 그때 배구를 시작한 것이 순천고등학교 시절까지 이어져 고교시절에도 학교 대표 배구선수로 활동을 했죠. 고등학교 시절 내내 학생회장을 맡기도 했고요. 문학의 밤 행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 작품을 탐독하기도 했죠.
Q. 서울대 불문과에 진학한 것은 문인이 되기 위해서였나요? 대학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순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했죠. 대학 생활과 서울 생활이라는 두 가지 낯선 생활이 한꺼번에 시작되었는데 ‘낯설다’는 말이 피부에 와 닿았어요. 우선 서울 생활로 말하자면 의식주 같은 기본적인 것까지도 저 스스로 해결해야 했으니 막막했죠. 이전까지는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어도 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으니 의식주 문제는 제 알 바가 아니었는데 제 손으로 벌어서 세 끼 밥을 먹어야 하고 잠자리를 구해야 하고 옷과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니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어머니께 손을 벌릴 수도 없었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거의 미국 원조에 의지하고 있을 때라 살림살이가 매우 초라한 때였죠. 그중에서도 스물여덟의 나이에 과부가 되어 혼자의 힘으로 시어머니와 세 아들을 돌보는 어머니의 살림이란 말할 것도 없어서 저는 서울에 올 때부터 이미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에 다니기로 결심을 했어요. 저와 같은 사정이 아니더라도 학비와 생활비를 도와줄 수 있는 부모가 있는 경우에도 대학생이라면 아르바이트로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것이 그 당시 대학사회의 상식이기도 했고요.
사실 제가 불문학과에 지망한 이유는 문학과는 관련이 없었어요. 영어나 독일어는 고등학교에서 배웠으니 새로운 언어인 불어를 배워서 외교관이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었거든요. 그게 제가 불문학과를 지망한 이유예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 들어와서 보니까 외교관이 되겠다고 들어온 사람은 저 하나뿐이더라고요. 모두 문학을 하겠다고 들어온 사람뿐이었어요. 지금은 고인이 된 문학평론가 김현이라든가 김치수 같은 동기들 모두가 온통 문학을 하겠다는 분위기인데 저 혼자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Q. 시사만화가로 활동하신 것도 아르바이트의 일환이었나요?
성북동에 있는 어느 집에서 중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집이 가정교사를 두고 아이를 가르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집이 아니었더라고요. 과부 어머니가 남편이 남겨준 약간의 재산을 가지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아들 셋을 키우는 집이었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고향에 계신 제 어머니가 떠오르던지요. 그래서 박한 보수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가르치는 기분으로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나중에는 미안해지더라고요. ▶김승옥 선생이 사회적 행위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바로 시사만화였다. 그는 고향 순천집의 번지수를 따서 ‘김이구’라는 필명으로 1961년 2월 14일까지 모두 134회에 걸쳐 연재 시사만화를 그렸다. 그의 그림 솜씨는 훗날 동인지 <산문시대>를 비롯하여 ‘문학과지성사’의 잡지와 단행본과 연재소설에 두루 쓰였다
그 무렵에 한국일보에서 서울경제신문이란 일간지를 창간한다는 광고가 나왔어요. 그때 저는 어렸을 때부터의 그림 솜씨를 동원해 연재만화 샘플을 몇 장 그려서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앞으로 부치면서 “아직 연재만화가 결정되지 않았으면 본인에게 그리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보냈더니 뜻밖에도, 정말 뜻밖에도 문화부장 엄영이란 분한테서 “고료를 계약할 테니 신문사로 와달라”는 회신이 왔어요. 얼씨구나 하고 달려갔죠. 제가 예상한 고료보다 적은 액수였지만 대학생 한 사람이 하숙비를 내고 책을 사 보고 조금씩 저축해서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에는 충분한 액수였어요. 그래서 엉뚱하게도 만화가 노릇을 하게 되었어요. 만화 작가로서 본명 대신 ‘김이구’라는 필명을 썼죠. 순천 고향 집 번지수에서 가져 온 이름이었어요.
그런데 신문의 연재만화라는 게 가난한 집 가장교사 노릇 이상으로 골치 아픈 일이더라고요. 아침에 눈만 뜨면 그날 그려야 할 만화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어요. 그때 제가 그린 만화 주인공 이름이 ‘파고다 영감’이었어요. 맨날 만화를 생각해야 하니 학교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죠.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에 ‘고바우 영감’을 그리는 김성환 씨와 친해졌는데 제가 그분의 팬이 되어서 매일 오후 3시만 되면 동아일보 근처에 있는 보래로라는 다방에서 만나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어요. 말하자면 3시 이후의 강의 시간엔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죠.

Q. 문학에 첫걸음을 내디딘 건 언제였나요?
학교에서는 강의 시간에 별로 충실하지 못하고 친구들과도 깊이 어울리지 않고, 어쩌다가 문학 이야기 같은 게 나오면 가장 잘 아는 체 열을 올리는 저를 같은 과 친구들은 문제아 취급을 하기 시작했죠. 나중에 <산문시대>를 하면서 친해진 김현, 김치수 등도 그때는 저를 ‘건방진 촌놈’이라고 생각했고 저 역시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그 무렵 가까이 지낸 친구는 독문과의 김주연이라고, 그 친구가 한 달에 두 번 나오는 문리대 학생신문 <새세대> 기자가 됐어요. 그래서 그 친구 소개로 저는 <새세대>에 ‘학원만평’이라는 만화 몇 컷을 그리며 친분을 갖게 되었지요. 제가 정식으로 <새세대> 기자가 되면서부터는 매일 생활을 같이 했고요.
그러던 어느 날 김광규, 이청준, 박태순이라는 친구들이 저를 찾아오더니 동인회를 꾸미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주로 서대문에 있는 박태순의 집 문간방에서 모임을 가지곤 했어요. 모임을 가질 때는 의무적으로 글 한 편씩을 써 가지고 오기로 했지만 제대로 실현되지는 않았죠. 사실 저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기 위해 문학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요. 문학을 좋아하고 글 같은 걸 쓰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취미였지 장차 문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죠. 그렇다고 다른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모임이 제가 문학을 시작하게 된 첫걸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어느 가정집의 입주교사를 할 때쯤 소설이란 걸 처음으로 쓰게 됐어요. 신춘문예에 응모할 예정으로 쓰긴 했지만 당락을 신경 쓰진 않았어요. 그 학기만 마치면 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하고 있을 때였고, 군에 입대하기 전에 ‘물건 하나 만드는 기분으로’ 한 편 써보자는 게 제 생각이었어요.
마감 기일이 제일 늦은 한국일보의 신춘문예 모집에 투고를 하고 학기말 시험이 끝나 짐 보따리를 몽땅 싸 들고 순천 집으로 내려갔죠. 그런데 뜻밖에도 1월 1일자 신문을 보니 제 소설 <생명연습>이 당선되어 있었고 한국일보 순천지사에서 사람이 와서 당선 소감을 써 보내라고 하더군요. 그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뻤지만 동시에 굉장히 불안했어요. 어쩐지 자꾸 회피하고 싶었던 문학이란 놈에게 덜미를 잡힌 기분이었죠. 운명을 만난 느낌이 드는데 뿌리치고 싶으면서도, 막막했던 제 미래가 그 안개를 열고 비교적 뚜렷이 보이는 길을 제시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굉장히 복잡했어요.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이른바 작가가 되고 보니 1960년대 엉망진창인 우리 사회를 문학작품으로 묘사하기에는 차라리 상대적 가치관이 더 올바른 기준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스물다섯이란 젊은 나이에 동인문학상을 받는 등 문학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만 제 인생은 방황투성이였어요. 상황과 형편, 호기심과 욕심에 따라 직업도 자주 바꾸고 일도 많이 벌이며 방황했지요. 얼핏 보면 사는 게 화려하고 재미있어 보이지만 남는 것은 오히려 적자(赤字)뿐이었어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죠.

1965년도 동인문학상 수상 작품인 <서울 1964년 겨울>은 단편소설의 백미이자 우리 문학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작품은 60년대 중반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벌어지는 도시의 소외현상을 잘 형상화시키고 있으며 단편 자체의 미학성을 완벽하게 구현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5년 동인문학상을 받을 당시 김승옥 선생의 모습으로 앞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김승옥 선생이다.

Q. 그래서 영화 쪽으로 방향을 돌린 건가요?
소설 가지고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또 영화 쪽이 소질에 더 맞는 것 같았어요. 영화감독을 하는 것을 보고 있던 아내는 영화계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보고는 적극적으로 말렸죠. 당시 대종영화상 각본상도 받고 내가 감독한 김동인 원작 소설 <감자>가 스위스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고 프랑스 르몽드지에 크게 소개되기도 해서 영화 쪽에 자신감을 갖고 돌진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내의 반대가 필사적이어서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겨울여자>, <영자의 전성시대>, <장군의 수염>등 시나리오 쓰는 일로 후퇴했는데, 원고 쓰는 일만 가지고선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월간잡지 샘터사의 편집부장으로 들어갔습니다. ▲1974년 순천에서 촬영된 조문진 감독의 영화 ‘황홀’은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 원작이다. 당시 영화에 카메오로도 출연한 이장호(왼쪽부터) 감독과 김승옥 소설가, 주연 배우 윤정희, 조문진 감독.
Q. 1964년 사상계 10월호에 발표,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극찬과 함께 문학사의 한 장을 연 작품이 <무진기행>입니다. 소설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건 무엇인가요?
저는 이때 한 살 연상의 여성을 사랑했지요. <무진기행>은 그 여성과 결별한 뒤 제 첫사랑의 느낌을 모티브로 쓴 소설입니다. 제 고향인 순천이 배경이라면 배경이지요. 순천 지역의 공간을 재구성했다고 보면 돼요. 순천과 순천만 연안 대대포 앞 바다와 그 갯벌에서의 체험을 창작 모티브로 삼았어요. 소설 속의 '희(姬)‘라는 여인에 관해 얘기하면, 그녀와는 결혼까지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 부친의 좌익 전력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어요. 그리고 1964년 6월 순천에서 여인의 시체를 본 경험이 있는데, 이는 <무진기행> 창작의 기폭제로 작용했습니다.
작품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서울에서의 경쟁적 삶을 구가하기보다는 한 번쯤 무진과 서울을 왕복하면서 좀 더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경험하는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무진기행>의 주인공 ‘나’는 현실에 가장 잘 적응한, 또 더럽혀진 사람이에요. 작품 무대 무진, 즉 순천 고향을 떠나 출세한 사람. 하지만 ‘똑똑한’ 그는 고단한 서울에서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무진에 내려와 ‘지상에서 세운 모든 것들이 햇볕에 의해 몽롱하게 풀리는’ 경험을 하게 되죠. 중년의 남자가 앞만 향해 내달렸던 허망함을 무진에서 위로 받고자 한 거죠. 어쩌면 순천은 도처에 널려 있는 도시이고, 일상에 밀려 변방으로 쫓겨난 아득한 도시인 셈이죠.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무진이 있는 거죠.
Q. 80년대 초, 동아일보에 장편 <먼지의 방>을 연재하던 중 절필을 선언했습니다. 이유는 무엇인가요?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고 군 검열로 원고가 몇 줄씩 잘려 나가는 일이 이어졌어요. 그때의 일로 집필 의욕을 상실해버렸죠. 유신 시절 10년 동안의 젊은 지식인들 이야기이니 계속 써봤자 저와 신문사만 골치 아프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연재 15회 만에 소설 연재를 중단해버렸어요. 동아일보 소설 연재의 중단으로 가장 괴로운 사람은 제 아내였어요. 수입이 없어졌으니 말이죠. 변변찮은 인세로 간신히 버텨 왔는데 제가 그만 펜을 놓아버렸으니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그때부터 아내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런 아내를 말리지 않았어요. 교회에서라도 뭔가 위로를 받는 게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던 아내가 저를 전도하더군요. 그렇게 3개월 정도는 억지로 끌려 다녔어요.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닌 경험이 있었기에 낯설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교회 예배에 참석은 했어도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와 닿지는 않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밤, 하나님의 흰 손을 보고 육성을 듣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어요. 만일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전 죽었을지도 몰라요.
저는 신앙을 통해 영혼의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굳이 다시 펜을 잡을 이유가 없었어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글을 통해 영혼의 자유를 느꼈다면, 하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영혼의 자유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죠. 제 체험이 너무 특이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가 소설을 쓰고 있는 게 아니냐고 말했어요.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으면서 간증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저는 오로지 경험한 사실만을 말할 뿐이에요. 저 역시도 철저한 무신론자였고, 종교란 윤리적인 생활을 하자는 사회적 운동이라고만 생각하던 사람이었어요. 그러던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열정적인 신앙인이 되어 간증을 하고 전도를 하고 돌아다니니 저를 알던 사람들이 느꼈을 당혹감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죠.
Q. 아직도 선생님의 새 작품을 기다리는 팬들이 많습니다. 언제쯤 쓸 수 있을까요?
요즘 저의 일상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글쓰기’예요.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이전과 같은 감수성 짙은 문장을 뱉어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요. 이제는 종교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특히 인간의 죄의식을 다룬 글을 쓰고 싶어요.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자연히 그런 관심을 갖게 됐죠. 시간과 건강이 허락된다면 꼭 그런 작품을 쓰고 싶어요. 되도록 빠르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두르진 않을 거예요. 주님이 내게 말을 걸어 오신 것처럼 나도 대중에게 책을 통해 말 걸기를 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지길 바라고 있어요.
Q. 선생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소설가, 그리고 선교사. 그 두 가지가 제 인생의 꿈입니다.
Q. 이 시대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예전에는 김승옥이란 사람이 소설가로서 1백년 이상 기억되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 가지가 더 늘었네요. 스스로 체험하고 만난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열심이었던 사람. 그렇게 두 가지에 열심이었던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김승옥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했다. 1945년 귀국하여 전남 순천에 거주하였고, 부친이 여순사건 직후 사망하며 어머니와 남동생들과 함께 성장했다. 1952년 월간 <소년세계>에 동시를 투고하여 게재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동시, 콩트 등 창작에 몰두하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한국일보사 발행 서울경제신문에 연재만화를 그리며 학비를 조달했다.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생명연습>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1965년 졸업을 전후로 대표작인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을 발표하였으며,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1980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먼지의 방> 연재를 시작했으나 광주민주화 운동과 그에 대한 군부대의 진압 사실을 알고 연재를 자진 중단하며 절필을 선언, 1999년 세종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로 부임했으나 2003년 중풍으로 쓰러지며 교수직을 사임했다. 절필과 뇌졸중으로 오랜 시간 침묵했던 김승옥은 현재 건강이 많이 호전된 상태이며, 순천문학관 김승옥관에 마련된 집필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인물>문학인> 한국문학인 201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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