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 폴 베를렌
가을 노래
가을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
끊기지 않는 우수로
내 마음
괴롭히네.
종소리 울릴 때
창백하고
곧 숨 막혀
옛날들
기억나
눈물 흘리네.
그리고 휩쓸어 가는
모진 바람에
이끌려
가네
여기저기로
낙엽처럼.
출전 : <예지(叡智)>(곽광수 옮김, 민음사, 1975)

시를 말하다
문태준 (시인)
시인 말라르메는 폴 베를렌의 1주기에 부쳐 ‘묘석'을 지었다. “이제 막 우리들의 방랑자로부터 벗어나서/ 고독하게 뛰어다니는 베를렌을/ 누가 찾는가!/ 그는 풀 속에 숨어 있다.// 얕은 여울이라고 비난을 받는 죽음을/ 입도 대지 않고 단숨에 마셔 버리지도 않고/ 다만 선선히 수긍하고 죽음을 잡은 베를렌이여.” 베를렌은 시 ‘이 다정스런 노랫소리 들어 보오’에서 “착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미움도 시샘도/ 죽음 오면 남는 것 없다고.”라고 노래했지만, 정작 그의 삶은 아늑하지도 고즈넉하지도 단순하지도 평온하지도 않았다. 베를렌의 생애는 “순수와 혼탁, 참회와 방탕 사이를 오가는” 것이었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비교적 행복한 유년 생활을 보냈고 마틸드 모테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지만 랭보를 만나면서 모질고 세찬 파도에 휩싸였다. ▶베를렌은 말라르메, 랭보와 함께 프랑스 상징파 3대 거장의 하나이며, 음악적으로 서정을 읊는 데 뛰어났다.
랭보와의 만남은 그를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었다. 베를렌은 그보다 열 살 연하인 랭보를 “천사이며 동시에 악마인 필멸의 존재”(‘아르튀르 랭보에게’)로 여겼다. 베를렌과 랭보의 인연은 랭보의 시를 베를렌이 본 후 여비를 동봉해 “오너라. 그대 위대한 영혼이여. 그대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베를렌은 임신 중인 아내 마틸드 모테를 두고 랭보와 함께 훌쩍 떠나 파리, 벨기에, 런던 등지에서 살았다. 마틸드 모테는 이 둘 사이를 떼어 놓고 베를렌의 마음을 돌이켜 먹게 하려 수차례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다.
두 방랑 시인은 함께 살며 사랑했지만 상봉과 기약 없는 이별을 반복했다. 베를렌이 랭보를 런던에 홀로 두고 브뤼셀로 가는 배를 타고 떠났을 때 랭보는 다음과 같은 애절한 편지를 썼다. “돌아와, 돌아와, 친구여, 단 하나뿐인 친구여, 돌아와 다오. 착해지겠다고 맹세할게. 내가 기분 나쁘게 굴었다면, 장난이 지나쳐서 그랬던 거잖아 (…) 우리는 대담하고 인내심 있게 다시 살아가는 거야. 오! 이렇게 애원할게! 게다가 자기한테도 그것이 좋아. 돌아와, 네 물건들이 모두 여기 있어 (…) 너를 다시 볼 수 없다면, 해군이나 육군에 입대해 버릴 거야. 아 돌아와, 눈물이 멈추지가 않아.” 두 시인은 자주 다투었고, 서로 동정심 없이 차갑게 수시로 이별을 선언했고, 급기야 떠나려는 랭보를 향해 베를렌이 권총을 발사해 상처를 입히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일로 베를렌은 몽스 형무소에 수감되어 감옥 생활을 했으며, 수감되어 있는 동안 교회에 귀의하기에 이르렀다.

베를렌(왼쪽)과 랭보(오른쪽)
그러나 출감 후에도 베를렌의 방랑과 방탕한 생활은 계속되었다. 잠깐 교편을 잡는 동안 만난 뤼시엥 레티누아와 살았으며, 그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자 “제 아들은 죽었습니다. 오 하느님, 당신의 율법을 경애합니다./ (…) / 당신께서는 제게 주시고 다시 데려가십니다./ 당신께 영광을!”(‘뤼시엥 레티누아’)이라고 써 비탄을 쏟아 냈으나, 광기의 생활은 이어졌다. 윤락 행위를 하는 여인들과 어울렸고 육체적 욕망에 매인 외설스러운 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가령 “너희들의 팔, 난 그것들도 좋아해, 너무도 예쁘고, 너무도 희고,/ 보드라우면서도 단단하고, 오동통하고, 필요하면 실팍져, 예쁘고/ 희기가 너희들 엉덩짝 같고, 또 욕정을 일으키기도 마찬가지,/ 사랑할 때는 뜨겁고, 하고 나서는 묘지처럼 서늘한 너희들의 팔.”(‘나는 집중하려니 너희들의 허벅지와 엉덩이로’)과 같은 음산한 곡조가 짙은 시를 지었다.
베를렌은 황홀과 불안, 삶의 환희와 끔찍함이라는 두 감정을 모두 살았다. 그러나 그의 시는 삶의 실의와 우울, 고뇌, 광란에 빠진 영혼 등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랭보의 시구인 “도시 위로 부드럽게 비가 내린다”를 차용한 시 ‘도시 위로 비 내리듯’에서도 겉으로 표현된 “도시 위로 비 내리듯/ 내 마음에 눈물진다./ 내 마음에 젖어 드는/ 이 서글픔 웬일인가?/ (…) / 사랑도 없이 미움도 없이/ 내 마음 왜 이토록 괴로운지/ 알 수 없으니 이에 더한/ 괴로움 정녕 없어라.”라는 울음소리와도 같은 탄식은 인생의 근원적인 비애감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시 ‘가을 노래’도 풍랑을 만난 배가 물 위에 정처 없이 떠돌 듯이 정처 없는 인생의 슬픔을 노래한다. 이 시는 김억과 박목월 등에 의해 번역되어 우리나라 시단에 일찍이 소개되기도 했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이리로, 저리로, 떨어져 나뒹구는 낙엽에 투영된 시적 화자의 목소리에는 외로움과 불길함, 깊은 슬픔이 묻어 있다.
베를렌의 시는 더러 애매하고 모호하다. 우리 인간을 가련한 존재로 인식하는 그는 인간을 극악(極惡)과 지선(至善)으로 양분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한 편의 시가 드러내는 것은 “모호함이 분명함에 어우러지는 회색”의 색채라고 보았다. 한 시인이 시를 창작할 때 조금의 오차조차 없이 시어를 고르려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베를렌은 순간순간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적 느낌을 문면에 드러내는 일에 충실하고자 했다. 모네, 피사로, 마네, 로코코 회화의 거장 와토 등의 화가들과 친분을 유지했던 베를렌의 시 세계는 한마디로 우수의 화관을 쓰고 있었다. 투명하면서도 동시에 관능적이었고, 아름다우면서도 지극히 서글픈 서정을 노래했다. 그리고 방종의 충동을 노래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프랑스 시단에서 ‘시인의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개인적으로는 저주받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폴-마리 베를렌(Paul-Marie Verlaine, 1844.3.30-1896.1.8) 프랑스 메츠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옮겨 중등교육을 받았다. 파리 대학 법학부를 중퇴한 후 시청에 근무하면서 시작에 전념했고 1869년 <풍자시>를 통해 등단했다. 같은 해 <멋있는 향연>을 발표하고 친구의 여동생과 결혼했으나 보불 전쟁이 일어나 국민군으로 소집됐다. 이후 파리 코뮌의 반란에 가담하며 아내와 갈등을 겪기 시작했고 아르튀르 랭보와의 동거, 아내에 대한 횡포, 방랑 등으로 지속적인 가정불화를 일으켰다. <말없는 연가>의 여러 시편은 이 시기에 쓰였다. 1873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랭보에게 권총을 발사한 사건으로 2년여 동안 투옥된 이후 깊은 회한에 사로잡혀 가톨릭에 귀의했다. 그 시절 쓴 시집이 <예지(叡智)>다. 점점 높아지는 명성과 달리 생활은 극도로 문란하여 말년은 비참하게 보냈다. 음악성과 율동성, 상징적인 시어를 중시했으며 낭만주의에서 상징주의로 넘어가는 시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시인이자 상징파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글 문태준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산문집 <느림보 마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