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인상파 (8) - 마네의 죽음과 베르트 모리조의 상심

라라와복래 2014. 12. 1. 08:51

인상파

마네의 죽음과 베르트 모리조의 상심


베르트 모리조, <빨래 너는 시골 아낙>, 캔버스에 유채, 46x67cm, 1881, 뉘 카를스베르 글뤼토브테크, 코펜하겐

1883년 에두아르 마네가 세상을 떠난 뒤에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의 상심은 너무도 컸다. 슬픔을 다스리기 위해 모리조는 무던히 애쓰고 있었다. 그 방편으로 그녀는 파리 근교 빌레위스트에 새롭게 장만한 집에서 딸 쥘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파티를 열기도 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화가나 시인들을 위한 저녁 대접도 마네의 죽음을 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초대받는 사람들은 대개 드가, 르누아르, 모네였고 시인 말라르메도 단골손님이었다. 마네가 죽은 뒤에 모리조는 자신의 마음에서 무엇인가 빠져나간 것 같은 공허감을 느꼈다. 그 느낌이 얼마나 힘겨웠던지, 모리조는 후일 죽은 뒤에 마네의 곁에 묻히도록 자신의 묘역을 미리 사 놓기까지 했다. 물론 남편 외젠 마네와 함께 나란히 묻히는 계획이었지만, 그만큼 모리조에게 마네는 예술적 후원자인 동시에 삶의 지지자였던 셈이다.

<빨래 너는 시골 아낙>은 마네의 죽음 이전에 그린 작품이기 때문에 이런 모리조의 상실감이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나 이 그림은 파리를 떠난 모리조의 시골 생활 초반에 제작된 것이라는 사실에서 흥미를 끄는 구석이 있다. 부르주아 출신의 여성이 도시 근교의 시골에 정착해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 대상이 시골 아낙이다. 카미유 피사로를 연상시키는 면이 다분하다고 하겠다. 물론 모리조의 스승이 카미유 코로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모리조는 이미 이런 화제에 익숙했을 것이다.


베르트 모리조, <빨래 널기>, 캔버스에 유채, 33x40.6cm, 1875,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 D.C

그러나 모리조의 시골 생활은 당시 파리 시내에서 추진되었던 오스망의 ‘뉴타운 개발’로 인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1875년에 그린 <빨래 널기>라는 그림과 1881년에 그린 <빨래 너는 시골 아낙>을 비교해보면 무엇이 달라졌는지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초기작에서 모리조는 멀리 검은 연기를 뿜어 올리고 있는 공장의 풍경과 전원 풍경을 대조시켜서 보여주고 있다. 오스망의 도시개발은 파리 전체를 바꾸었는데, 빽빽하게 들어찼던 주거지를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불바르(대로)를 조성하는 대신에 근교에 빌라를 건축함으로써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 결과로 생겨난 풍경이 모리조의 1875년 그림에 잘 담겨 있다. 주택의 빈터에 텃밭을 가꾸고 여름 미풍에 빨래를 너는 모습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빨래 널기’라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화제를 구성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도시와 다른 전원에서 만끽할 수 있는 화사함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에 반해 1881년에 그린 작품은 빨래 널기의 행동이 훨씬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서도 모리조는 빛의 약동이라는 인상파 특유의 주제 의식을 완숙한 기법으로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빛을 표현하기 위해 ‘떨림’의 효과를 배가시키는 이런 방식은 비평가들의 비난을 사기에 충분했지만 모리조는 굴하지 않았다. 이런 점은 확실히 마네를 닮았다. 1881년 작품에서 모리조는 생전의 마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무관심’을 적극적으로 체현하고 있다. 빨래를 너는 시골 아낙의 모습은 누구인지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초상화인 것처럼 보이지만, 초상화라는 장르의 한계를 넘어선 무엇인 셈이다. 후일 세잔의 정물화나 초상화가 보여주는 새로운 차원을 모리조도 1881년 그림에서 얼핏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던 모리조에게 마네의 죽음이라는 시련이 닥친 것이다. 그녀는 마네의 죽음 이후에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해졌다고 말하곤 했다. 모리조에게 마네는 죽음조차 상상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영원히 살아 있을 것 같았던 삶의 지표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서 모리조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마네에 대한 모리조의 집착은 당시에 보기 드문 여성 화가로 평생을 살아갔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 수도 있었을 모리조가 화가의 길을 택하는 바람에 겪었을 곤란한 사정들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팔아서 수입을 올리는 일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요원한 일이었다. 이런 영예롭지만 고독한 삶으로 모리조를 이끈 존재가 바로 마네였다는 점에서 마네의 죽음 앞에서 느꼈을 모리조의 망연자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모리조는 끝까지 인상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화가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인상파는 1886년 마지막 전시회를 열었고 그 이후 뿔뿔이 흩어졌다. 모리조에게 마네의 죽음이 더 깊게 각인될 수밖에 없는 까닭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시기에 인상파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지만, 뒤랑뤼엘은 그토록 바라던 인상주의 뉴욕 전시회를, 물론 마네를 모네라고 잘못 적어 놓기는 했지만, 성공적으로 마쳤다. 모리조의 그림도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6점이나 뉴욕에 선보였다.


베르트 모리조, <바닷가 풍경 - 로리앙의 항구>, 캔버스에 유채, 43.5x73cm, 1869,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 D.C.

전시된 그림 중에는 <바닷가 풍경 - 로리앙의 항구>라는 작품도 포함돼 있었다. 외젠과 약혼했을 때, 약혼 기념으로 그린 작품이었다. 마네의 뮤즈였지만, 그의 동생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모리조의 인생 역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택광 (문화비평가)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 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학위를, 셰필드 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 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 문화웹진 채널예스>칼럼>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201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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