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인상파 (9) - 신인상파의 등장 그리고 인상파의 종언

라라와복래 2014. 12. 1. 08:53

인상파

신인상파의 등장 그리고 인상파의 종언


조르주 쇠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캔버스에 유채, 207.5x308cm, 1884/86,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

1880년대가 저물기 시작했다. 인상파의 시절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이 만들어낸 예술은 사라지지 않았다. 예술은 시간을 견디기 위해 인간이 개발한 수단이다. 화가들은 늙어서 언젠가 세상을 떠나지만, 이들의 손길을 따라 탄생한 예술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도 마찬가지다. 마네, 모네, 피사로, 드가, 카유보트, 모리조, 시슬레, 세잔, 르누아르, 커샛…. 이 모든 이름들은 붓끝을 따라 남겨진 이미지에서 19세기 파리의 불빛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다.

1880년 후반을 지나면서 파리의 예술계는 서서히 달라졌다. 인상파 화가들의 뒤를 이어서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 폴 고갱, 툴루즈 로트레크, 그리고 반 고흐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다른 시대가 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통해 ‘신인상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예술 운동이 세상에 태어났다.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 이후에 출현한 여러 화파 중 하나인데, 인상주의의 주관성을 훨씬 객관적인 차원으로 밀어붙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쇠라는 자신을 점묘파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카메라의 렌즈처럼 화가의 눈에 비친 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점묘파는 마치 컴퓨터의 픽셀처럼 무수한 색점을 찍어서 이미지를 표현했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도 이런 점묘파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특징은 사물의 선과 색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 점묘파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인상파의 기법이었다. 매너리즘은 습관적인 인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들은 그림을 화가의 창조보다도 인내심을 요구하는 관찰의 결과물로 봄으로써 습관이 깃드는 주관을 아예 배제하고자 했다.


폴 시냐크, <아비뇽의 교황청>, 캔버스에 유채, 73.5x92.5cm, 1909, 오르세 미술관, 파리

이처럼 점묘파는 과학과 조우한 미술의 극단을 보여주는 실험성을 선보였는데, 이들의 예술 세계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없애는 것이었다. 미학적인 차원에서 절대적 평등의 세계를 추구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인상파의 거장들

신인상주의의 등장이 가시화할 무렵, 인상주의는 이제 생물학적인 수명을 다해 가고 있었다. 1894년 마흔두 살밖에 되지 않았던 카유보트가 세상을 떠난 것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상주의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보다 앞서 1892년 마네의 동생 외젠 마네가 세상을 떠났다. 충격을 받은 베르트 모리조는 하룻밤 새에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고 한다. 마네와 자신을 이어주던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고 느꼈던 것일까? 쥘리와 함께 모리조는 남편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서 더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림을 계속 그리기 위해서 살림을 줄인 것이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겨울, 프티 주네빌리에르의 정원>, 캔버스에 유채, 73x60cm, 1894, 개인 소장. 카유보트 생애 마지막 그림

카유보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895년에 모리조도 독감에 걸려 사망했다. 먼저 독감에 걸린 딸 쥘리를 간호하다가 당한 일이었다. 이후 카유보트와 더불어 모리조도 오늘날 재평가를 받기 전까지 완전히 잊히는 운명을 맞이해야 했다. 다행히 모리조는 미술사에서 보기 드문 여성 화가라는 측면이 재조명되면서 현재 마르모탕 미술관에 모네와 나란히 전시되고 있으며, 카유보트 역시 사진술과 관련해서 그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피사로는 말년에 비로소 명성을 얻기 시작해서 루브르 미술관에 마침내 자신의 그림 두 점을 팔 수 있었다. 죽기 전까지 끓어오르는 창작욕을 누르지 못했던 피사로는 1903년에 눈에 감았다.


베르트 모리조, <공상에 빠진 쥘리>, 캔버스에 유채, 71.12x60.96cm, 1894, 개인 소장

한편, 드가는 약해진 시력에도 아랑곳없이 새로운 실험을 계속했다. 1895년에 그는 카메라를 구입해서 모델이나 댄서의 사진을 찍었다. 자신의 결혼에는 무관심했던 드가는 시인 폴 발레리와 모리조의 조카 사이를 중매해서 결혼에 이르게 했다. 드가는 1917년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르누아르도 죽을 때까지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붓을 손에 고정시키고 하인과 아들에게 자신이 앉은 의자를 들어 올리게 해서 그림을 그렸다. 정말 집념의 사나이였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에 비해 비교적 젊었던 세잔은 1906년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그림은 조각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지만, 실제로 평생토록 추구한 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세잔은 결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모네와 커샛은 같은 해에 유명을 달리했다. 이 둘이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인상파였던 셈인데, 모네는 말년에 “나는 위대한 화가가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오늘날 되돌아보면 모네의 말은 지나친 겸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모네와 커샛도 드가와 마찬가지로 약해진 시력으로 고통 받아야 했다. 하지만 결코 작업을 멈추지 않았던 열정의 대가였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에 가난에 시달렸던 시슬레는 1899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설암에 걸려 고통 받던 아내를 간호하던 시슬레는 자신도 식도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 중에서도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각자 출발점과 종착점은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인상파였다. 그리고 이들을 인상파로 묶어주었던 인물이 바로 뒤랑뤼엘이었다. 인상파 화가들 중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았던 모네는 뒤랑뤼엘을 추모하며 그의 아들에게 “네 아버지에게 많은 빚을 졌다”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시작되었다가 끝이 났다. 그리고 이들이 남긴 그림은 오늘도 조용히 미술관의 전시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이 뚫고 온 그 험난한 사연의 세계를 침묵의 여백으로 남겨둔 채 말이다.

이택광 (문화비평가) 부산에서 자랐다.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문화 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영국으로 건너가 워릭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학위를, 셰필드 대학교에서 문화이론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치사회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미문화 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 문화웹진 채널예스>칼럼>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2011.04.07

http://ch.yes24.com/Article/View/17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