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베르트 모리조 - 잊혔던 인상파 여류 화가

라라와복래 2014. 12. 1. 08:57

베르트 모리조

잊혔던 인상파 여류 화가

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blog.naver.com/dkseon00/140064824836    2009.03.15

네이버블로그 <레스까페>의 주인장인 선동기님은 블로그의 글과 그림을 모아 <처음 만나는 그림>(아트북스, 2009)과 <아트 북스, 나를 위한 하루 그림>(2012), <그림 속 소녀의 웃음이 내 마음에>(을유문화사, 2017)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습니다. 전업 미술가가 아니면서도 ‘그림을 읽어주는 남자’ 선동기 님은,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에 자신만의 상상을 더하게 함으로써 그림을 보다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도록 이끌어줍니다.

 

미술사에서 여류 화가를 만나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많은 여류 화가가 있었겠지만 근대적인 의미의 여류 화가로 이름을 남긴 사람은 이탈리아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c.1656)가 처음입니다. 그 시기가 1600년대 초반이니까 400년 정도 되었군요. 그리고도 오랫동안 여류 화가들에 대한 기록은 말 그대로 가뭄에 콩 나듯 합니다. 여성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씌운 남성들의 횡포가 있었기 때문이죠. 프랑스의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도 그녀가 남긴 족적에 비하면 너무 잊혀진 화가입니다

마네의 그림, 상복을 입은 베르트 모리조  Manet, Berthe Morisot with a Bouquet of Violets, 1872

마네의 그림인 이 작품 속 여인은 베르트 모리조입니다. 마네는 모리조의 초상화를 모두 11점이나 그렸습니다. 이지적인 외모에 고집도 있어 보이는 그녀는 인상파의 초기 멤버이자 인상파의 특징을 그녀의 작품 속에 그대로 보여주었던 화가입니다. 그녀의 생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모리조는 부유한 공무원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사법 보좌관으로 권력과 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열정적인 아마추어 화가이자 미술가들의 후원자였습니다. 모리조가 평생 중상류층 계급의 일원으로 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아버지의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자매들은 당시 관습대로 좋은 결혼을 위해 다양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학과 문학, 미술 선생님을 두고 공부를 했는데 미술 선생님이었던 코로의 지도 아래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미술에 발을 내딛습니다. (그림 제목을 직역하면 ‘제비꽃 다발을 든 베르트 모리조’인데, 제비꽃은 상중임을 나타냅니다. 마네는 1872년에 아버지를 여읜 모리조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상복을 입은 베르트 모리조’라 했습니다. 선동기님은 ‘검은 리본의 베르트 모리조’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_라라와복래) 

로리앙 항구  The Harbor at Lorient, 1869, 43.5x73cm

항구를 따라 난 길을 걷다가 잠시 난간에 앉았습니다. 햇살이 얼마나 좋은지 그림 밖으로도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하늘은 그대로 항구의 바닷물에 같은 색으로 내려앉아 화면 전체가 시원합니다. 그러나 흰 옷의 여인 표정은 양산에 가렸다고는 하지만 살짝 어두워 보입니다. 답답한 심사라도 있으신가요?

모리조는 미술 선생님 코로에게 야외에서 작업하는 방법(플레네르 기법)을 배웁니다. 그런데 자매들 중에서 언니인 에드마와 모리조가 미술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두 자매는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좋은 곳으로 시집을 보내고자 했던 그녀들의 어머니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마음, 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독서  La Lecture(Reading), 1869~70, 101x81cm

작품 속의 여인들이 혹시 모리조의 어머니와 언니 에드마가 아닐까 싶어서 찾아보았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림 속의 여인들이 모리조의 얼굴과 닮았습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습니다. 검은색 옷을 입은 중년 여인과 흰 옷의 젊은 여인의 대비도 좋고 책을 읽는 모습과 생각에 빠진 대비도 편안합니다.

23세 때 코로의 지도를 받고 살롱에 출품한 작품이 당선이 되었습니다. 스승인 코로는 그녀의 작품에 ‘코로의 제자’라고 서명을 해도 좋다고 허락하는 것으로 그의 기쁨을 대신했습니다. 당시 코로의 인기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10년간 모리조는 살롱에 작품을 출품합니다. 언니인 에드마와는 우애가 아주 좋았습니다. 에드마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때까지 둘은 함께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사이좋은 자매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요람  The Cradle, 1872, 56x46cm

턱을 괴고 잠든 아이를 바라보던 엄마의 입에 살짝 미소가 어렸습니다. ‘이녀석 어쩌면 엄마하고 똑같은 자세를 하고 잠을 자네!’ 그림 속의 여인은 모리조의 언니 에드마입니다. 이 작품은 특히 당시 여성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는데 그림 속 요람의 모습과 장식등이 요즘 말로 하면 최신 제품을 소개하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리조의 감각이 드러난 작품이죠.

27세가 되던 1868년 겨울, 모리조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에두아르 마네를 만나게 됩니다. 이미 마네의 명성과 그가 미술에서 일으킨 혁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네는 36세였습니다. 

발코니에서  on the Balcony, 1872

언젠가도 말했던 적이 있지만 발코니는 안과 밖의 중간 지대입니다. 몸은 밖으로 나와 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실외도 아닙니다. 야외에 나가지 않고 야외 느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실내도 아니고 실외도 아닌 발코니는 인상파 화가들의 좋은 소재였습니다. 가을 오후 모녀가 내려다보는 것은 무엇일까요. 엄마는 바람을 타고 지나가는 시간을 본다고 하지만 아이는요?

마네와 모리조의 관계는 좀 특이합니다. 마네에게서 여러 가지를 배운 것만 가지고 본다면 스승과 제자일 수도 있겠으나, 모리조가 제안한 독특한 구성과 방법을 작품 속에 받아들였고 그것에 감사를 표한다고 마네가 이야기한 것을 보면 동지 같은 느낌도 듭니다. 마네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모리조에게 이젤을 선물할 만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어떤 감정 위에 서 있었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독서  Reading, 1873

길 건너에 한 무리의 농부들이 짐을 싣고 있는데 여인은 양산과 부채를 저만치 내려놓고 책을 잡고 있습니다. 여인의 살짝 찌푸려진 미간을 보다가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의 내용이 아주 심각한 것일까요? 아니면 책을 잡았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 심사를 불편하게 한 것일까요? 무엇이 맞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초록이 가득한 풍경만큼은 고요하고 차분하군요.

33세가 되던 1874년, 마네는 한 무리의 화가들 모임에 가입할 것을 모리조에게 권유합니다. 나중에 인상파가 된 그 모임에는 모네, 르누아르, 파사로, 드가 같은 화가들이 구성원이었습니다. 드가와 그의 동료들은 그녀의 작품을 보고 인상파의 좋은 예가 된다고 선언합니다. 동료로 받아들인 것이죠. 부드러운 붓 터치와 마무리되지 않은 배경, 그리고 빛이 우러나는 색 등이 그들이 말한 이유였습니다.

아일 오브 와이트 섬의 외젠 마네 Eugene Manet on the Isle of Wight, 1875, 38x46cm

아일 오브 와이트는 영국의 섬 이름입니다. 창밖으로 펼쳐진 항구를 건너오는 바람이 부드럽게 커튼을 흔들고 있습니다. 의자에서 몸을 돌리고 앉아 밖을 주시하는 남자의 눈매가 깊습니다. 꽃과 여인과 바다, 그리고 배… 사랑스러운 주제가 조그만 그림 속에 꽉 차있군요.

훗날 인상파가 되는 모임을 만나던 그해, 모리조는 인상파 전시회에 처음 참여했고 전문 화가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12월 모리조는 마네의 동생 외젠 마네와 결혼합니다. 마네의 제수씨가 된 것이죠. 외젠 마네는 작가였는데 결혼을 한 후 그는 철저하게 아내가 가진 화가로서의 인생을 존중해줍니다. 결혼생활을 위해서 그림을 포기하라는 말도 없었는데, 지금에야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로 봐서는 열린 남자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녀의 작품에는 남편인 외젠 마네가 몇 번 등장합니다.

부지발에서 외젠 마네와 딸 Eugene Manet and His Daughter at Bougival

부지발은 파리에서 15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상파의 요람’이라고도 불렸던 지역입니다. 아빠의 무릎 위에 장난감을 올려놓고 놀고 있는 아이의 이름은 쥘리입니다. 귀여운 아이는 나중에 자라서 엄마인 모리조와 인상파 화가들의 이야기를 쓴 일기로 책을 펴내기도 합니다. 혹시 이 그림에서 생명력을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셨는지요? 저는 아빠의 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눈은 너무 선명하고 또렷합니다. 딸을 바라보는 아빠들의 눈은 대개 저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딸들은 모를 뿐이죠.  

숨바꼭질  Cache-Cache(Hide-and-Seek), 1873, 45x55cm

제목은 숨바꼭질이지만 내용은 제목과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꽃이 핀 나무에 아이를 두고 엄마는 자리를 피할 모양인데 아이는 눈을 감을 생각이 없습니다. 숨바꼭질은 노래 가사처럼 ‘어두워져 가는 골목에서’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칠 때 숨고 찾는 재미가 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얼마나 많이 숨고 얼마나 찾아다녔을까요? 혹시 그 술래잡기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모리조의 작품 속 인물과 배경은 일상에 기초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모리조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시골의 풍경들이었습니다. 그 이상의 주제들, 예를 들면, 도시의 거리라든가 누드 인물화 같은 것들은 아직도 여성인 그녀에게 버거운 것이었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어려웠었고 그것은 여성들에 대한 당시 사회의 제약이었습니다. 드가와 평생 친구였던 그녀의 후배이자 또 하나의 여류 화가였던 메리 커샛((Mary Cassatt, 1844-1926) 역시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공원에서  In a Park, 1874

공원으로 곤충채집을 나와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다가 힘이 들었는지 아이는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웠습니다. 등신대 인형같이 묘사된 아이를 보다가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왕이면 조금 디테일을 살려주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돌아보면 인상파 화가들 작품 중에는 저 아이보다 더 대충 묘사된 작품들도 많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초록은 정말 좋군요.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색과 빛의 효과에 열광할 때 모리조와 마네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갖도록 전통적인 접근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모리조는 마네에게 팔레트에서 검은색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인상파의 주류를 따르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계속해서 살롱전에 전시된 인상파 화가는 모리조와 드가뿐이었군요.  

밭  Grain Field, 1878, 47x69cm

밀밭 전체가 노란 빛으로 휩싸였습니다. 하늘은 흐렸지만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노란색 빛은 아이를 밀어내고 있는 듯합니다. 모리조의 작품이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다른 점은 모든 방향으로 크게 붓 터치를 해서 작품이 투명한 느낌을 준다는 점입니다. 또 다른 특징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흔들지 않는다면 디테일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1892년 그녀의 나이가 51세 되던 해, 남편 외젠 마네가 오랜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몇 주 후 모리조는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를 개최합니다. 전시회는 열었지만 떠난 남편의 자리가 컸겠지요. 그 자리를 딸 쥘리와 드가, 모네, 르누아르가 그녀를 찾아와 메워주곤 했습니다. 좋은 동료들이었습니다.

주방  Dining Room, 1875

주방의 서랍장은 열려 있고 여인의 얼굴은 살짝 붉었습니다. 놀란 듯한 눈을 보면 음식 준비에 정신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보기 좋습니다. 저렇게 무엇인가에 열심인 모습은 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요즘 나는 무엇에 내가 가진 것을 걸고 있고 누구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을까요? 찾아봐야겠습니다.

모리조는 자신의 작품이 판매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동료들, 마네와 모네, 르누아르의 작품들을 구매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작품들은 나중에 딸 쥘리에게 물려지게 됩니다. 54살이 되던 해 아픈 딸을 간호하다가 모리조는 폐렴에 걸렸고 결국 이 병으로 그녀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가 묻힌 곳은 마네와 남편 외젠의 옆자리였습니다.

겨울 (머프를 낀 여인)  Winter (Woman with a Muff), 1880

모리조는 평생 860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망증명서의 직업란에는 ‘무직’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원했다는 자료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녀는 적어도 당시 사회의 여성에 대한 차별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든 여인들의 능력을 믿는다. 그리고 남자들이 자신과 동등하게 여자를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 자신이 남자들만큼 가치 있기 때문에 끝없이 사회를 향해 의문을 제기했었다.” 

빨래를 너는 시골 여인  Peasant Hanging out the Washing, 1881, 46x67cm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화가보다는 마네의 친구이자 모델로 더 알려졌고, 1905년 런던에서 열린 인상파 전시회에 그녀 작품 13점이 전시되기 전까지는 국제적으로도 그녀의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모리조는 페미니즘 역사가들로부터는 19세기 잊혀진 여류 화가 중의 한 명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서보다는 최근 더 많은 영예를 누리고 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같은 인상파 화가인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덜 평가를 받았다면 지금에라도 자기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당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