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화가와 모델 -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

라라와복래 2015. 2. 18. 08:37

화가와 모델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또 편지를 씁니다. (…) 당신이 여기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누워 있습니다. 하지만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변해버립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더 이상 저를 속이지 말아주세요.”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이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예술가 사이의 사랑을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로 세인들의 뇌리에 새겨준 카미유 클로델과 오귀스트 로댕. 조각가와 모델로서 또 동료 예술가이자 연인으로서 두 사람이 불태운 열정은 지금도 그들의 작품에 남아 보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이 격정의 드라마는 과연 남달리 뜨거웠던 두 사람의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두 천재의 재능을 시기한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카미유 클로델, 1884

오른쪽 카미유 클로델의 사진은 19살 때 모습으로 로댕을 처음 만나던 해에 찍은 것이다. 클로델은 어릴 때부터 돌과 흙을 좋아했다고 한다. 타고난 조각가였다. 하지만 당시 파리의 미술 명문학교 에콜 데 보자르는 여학생을 받지 않아 아카데미 콜라로시에 들어갔다. 이탈리아 조각가 콜라로시가 설립한 이 미술학교는 여학생에게도 문을 개방해 클로델을 비롯해 모딜리아니의 부인 잔 에뷔테른, 스코틀랜드의 인상파 화가 베시 맥니콜 등이 다녔다.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사진, <로댕과 생각하는 사람>, 1902

기쁨의 시작이자 슬픔과 고통의 시작

로댕이 묘사한 클로델의 모습은 대체로 명상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격정과 사랑의 행로를 생각한다면 다소 뜻밖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어쩌면 이런 명상적인 표정이 그 용광로와 같은 열정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그릇이었는지 모른다. <생각하는 사람>이 희로애락의 인생 드라마를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처럼 말이다.

로댕은 클로델뿐 아니라 그의 곁에서 평생을 지켰던 로즈 뵈레(Rose Beuret), 그웬 존(Gwen John) 등 여러 여인과 다양한 형태의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그가 평생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은 클로델이었다. 그것은 클로델도 마찬가지여서 로댕 이외의 그 어떤 남자도 로댕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데다 예술을 향한 불타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던 두 사람은 사랑으로 묶이는 순간 서로에게 강렬히 빠져들었다. 그것은 기쁨의 시작이었고 슬픔과 고통의 시작이었다.

이 사랑은 로댕의 예술에서 보다 심층적인 성과 관능의 표현을 추동했다. 앞서의 편지에서 클로델은 로댕이 그리울 때 아예 옷을 벗고 누워 있다고 고백했다. 성에 대해 솔직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로댕은 인간의 성과 관능에 대한 탐구에 빠져들었다. 일례로 가랑이를 한껏 벌린 <이리스 신들의 메신저>는 성과 관능의 본질에 대해 노골적으로 묻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과 관능이 쾌락의 차원을 넘어 세계와 창조의 중요한 에너지원임을 전해주는 조각이다. 그 신비로운 수원지를 파헤치며 로댕은 매우 감각적인 인상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특히 드로잉에서 자유로운 시도들이 나타나는데, 이후 로댕의 작품에서는 이 인상의 변주가 다양하게 이어지게 된다. 물론 성과 관능에 대한 진득한 탐구는 로댕의 예술 행로에서 언젠가는 시도될 분야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클로델과의 만남을 계기로 강렬하게 분출한 것이다.

그러나 클로델과의 사랑에 영향을 받은 이런 작품들과 달리, 정작 클로델을 모델로 한 작품들은 깊은 우수와 상념과 고독을 드러내고 있다. 넘실대는 파도를 보다가 고요한 호수를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같은 사랑이 추동한 작품임에도 클로델을 직접적으로 묘사할 때는 이렇게 정적인 작품이 나왔다. 다가올 사랑의 끝에 대한 예감이었을까, 인생이 허무한 것이라는 본질적인 깨달음에 이른 것일까, 로댕은 클로델을 묘사하며 깊은 명상에 잠겼다. <사색>, <아우로라>, <작별>, <챙이 없는 모자를 쓴 카미유 클로델>, <카미유 클로델의 얼굴과 피에르 드 위상의 왼손> 등 클로델의 이미지가 그대로 드러난 작품들은 오늘도 끝없는 사색의 물결에 자신을 적시고 있다.

로댕, <여성 누드>, 1890년 이후, 종이에 연필과 수채, 32.6x25cm, 로댕 미술관, 파리

인체를 누드로 표현하는 것이야 서양미술의 오랜 전통이고, 로댕 역시 미술학도 시절부터 누드를 형상해 왔지만, 클로델과 만나고부터 그의 작품에서 관능적인 성의 이미지가 더욱 뚜렷이 부각되어 나타났다. 특히 드로잉의 경우 매우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그림이 많아 그가 이와 관련한 자신의 관심을 매우 자유롭게 표출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여성의 성기를 적나라하게 그린 이런 드로잉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게 쉽지 않았다. 로댕은 대부분의 드로잉을 전시할 생각 없이 그렸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그다지 노골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의 조각 <키스>조차 그때는 지나치게 관능적이라는 비판을 들었고, 심지어 <키스>의 브론즈 버전이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서 전시될 때는 작품을 독방에 따로 설치하고 신청자에 한해서만 관람을 허용하기도 했다.

로댕, <사색>, 1886/89, 대리석, 74.2x43.5x46.1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로댕의 <사색> 상단 얼굴 부분

로댕의 <사색>은 마치 태풍이 불기 전의 고요처럼 광기에 이르기 전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에 잠긴 클로델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클로델은 예쁜 용모와는 달리 기질이 폭풍우 같았다. 그 묘한 불일치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릴 적 클로델은 빌뇌브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이 지방의 유별난 풍토가 그녀의 기질을 형성하는 데 큰 몫을 했다는 평가가 있다. 카미유의 동생 폴은 빌뇌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빌뇌브는 평화로움이라든가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자주 비가 내렸고, 한번 내리면 그칠 새가 없었다. 정열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바람 또한 무서울 정도로 심하게 불었다. 지금도 그 바람소리가 귀에 울리는 듯하다. 눈앞의 그 광대한 풍경에는 어떤 잠재적인 비극이 나타나 있었다. (…) 이 풍경에는 협박과 예언, 오열과 같은 깊은 사유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로댕, <아우로라)>, 1895/97, 대리석, 56x58x50cm, 로댕 미술관, 파리

로댕의 <아우로라> 측면 모습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클로델의 얼굴이 달처럼 부드럽고 은은한 빛을 발한다. 얼굴 주위로 거칠게 남은 대리석이 그와 대조를 이루며 구름처럼 펼쳐진다. 먼동이 터 올 때의 느낌, 여명이 밝아 올 때의 느낌을 사람의 얼굴을 통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신기한 느낌이 들 정도다. 아우로라는 라틴어로 ‘새벽’을 뜻하며, 로마 신화에서 새벽의 여신을 지칭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새벽의 여신은 ‘에오스’다.)

“내 인생의 꿈은 모두 악몽”

로댕이 클로델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883년의 일이다. 친구인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Alfred Boucher)가 로마로 떠나면서 자신이 지도하던 클로델을 로댕에게 맡긴 것이 그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때 클로델의 나이 열아홉. 그로부터 2년 뒤인 1885년 클로델은 로댕의 학생에서 정식 조수로 채용되었는데, 그것은 직접적인 ‘승격’의 의미를 넘어 본격적인 사랑의 전개를 알리는 신호였다. 등기소 소장의 딸로 태어나 조신하게 자란 처녀가 “내 인생의 꿈은 모두 악몽”이라고 스스로 표현할 정도로 모진 사랑의 광풍에 빨려드는 순간이었다. 조각가가 되려는 그녀의 뜻에 심하게 반대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어쩌면 더 필사적으로 반대했어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운명이었다. 클로델이 로댕의 조수가 된 지 3년이 지나도록 그녀의 부모는 딸의 애정 행각을 알지 못했다. 그만큼 둘의 사랑은 은밀했고 또 간절했다. 당시 로댕이 쓴 편지에는 이 열병의 표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대는 나에게 활활 타오르는 기쁨을 준다오. 내 인생이 구렁텅이로 빠질지라도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겠소. 슬픈 종말조차 내게는 후회스럽지 않아요. (…) 당신의 그 손을 나의 얼굴에 놓아주오. 나의 삶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나의 가슴이 신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내가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몽롱하게 취한 상태에 있다오.”

[왼쪽] 모델로서 포즈를 취한 클로델 [오른쪽] 작업실에서 작품 제작에 몰두해 있는 클로델, 1887

로댕, <다나이드>, 1890, 대리석, 36x71x53cm, 로댕 미술관, 파리

로댕의 <다나이드>를 위에서 본 모습

클로델은 <지옥의 문> 제작 당시 작품 제작을 도왔을 뿐 아니라 직접 <지옥의 문>에 등장하는 몇몇 여인상의 모델을 섰다. 1888년 <지옥의 문>의 일부로 제작되기 시작한 <다나이드>도 그렇게 카미유가 포즈를 잡은 이미지의 하나로 전해진다. 당시 로댕이 카미유에 대해 지녔던 사랑이, 감미로울 정도로 매끄러운 선, 관능적인 선에 담겨 있는 듯하다.

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오스 왕의 딸들이다. 아르고스의 왕 다나오스는 딸이 모두 50명이었는데, 아라비아와 이집트의 왕인 쌍둥이 형 아이깁토스의 아들들과 혼례를 치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을 제거하고 나라를 가로채기 위한 아이깁토스의 음모라고 생각한 다나오스는 결혼식 날 딸들에게 단검 하나씩을 주어 사위들을 죽이게 한다. 50명의 딸 가운데 하나만 빼고 모두 아버지의 지시를 따라 아이깁토스 왕은 아들 50명 중 49명을 잃고 만다. 명을 따르지 않은 큰딸 히페름네스트라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난 린케우스가 결국 다나오스 왕과 다른 다나이드들을 죽이고 나라를 차지한다. 죽은 49명의 다나이드는 남편을 죽인 죄로 지하세계에서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형벌을 받는다. 로댕의 작품은 그 다나이드 가운데 하나에 초점을 맞추어 영원한 형벌의 고통을 표현한 작품이다.

로댕의 조각에서 여인은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다. 그녀 오른쪽에는 밑 빠진 항아리가 놓여 있고 그곳에서 물이 새어 나온다. 그 물은 내의 물과 섞여 여인의 머리카락을 적시며 아래로 흘러간다. 마치 태아처럼 웅크린 여인의 몸은 매우 가련해 보인다. 로댕은 이 작품에서 여성의 ‘상처받기 쉬움’을 절절히 표현했다. 카미유가 모델을 설 때 그녀 역시 장차 이런 고통과 형벌을 받으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그녀 안에 이미 운명적으로 내재되어 있던 ‘상처받기 쉬움’이 로댕에게 이처럼 탁월한 표현을 하도록 이끈 게 아닐까.

생활의 반려를 택하고 영혼의 반려를 포기하다

이처럼 클로델은 로댕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부상했지만, 그러나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로댕 곁에는 늘 충성스럽게 그를 지키는 여자가 있었다. 침모 출신으로 죽을 때까지 무려 53년간 로댕에게 헌신하는 로즈 뵈레였다. 1864년, 그러니까 로즈 뵈레의 나이 스무 살, 로댕의 나이 스물네 살 때 만남 두 사람은 가장 어렵고 고달팠던 시기를 함께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로댕의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는 여자는 아니었다. 로댕의 출세와 그 흐름을 타고 변해 가는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로댕이 1868년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지 않았고, 그녀가 죽기 2주 전에야 비로소 그녀를 합법적인 아내로 인정한 데서 로댕이 일생 동안 그녀에게서 느꼈던 결핍감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죽기 직전 아내로 인정함으로써 일생에 걸친 그녀의 헌신에 감사를 표현했지만 말이다.

그런 로즈 뵈레로서는 아름답고 똑똑한 클로델에게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을 것이다. 로즈 뵈레 역시 아틀리에에서 로댕의 조수 역할을 했다. 로댕의 지시에 따라 점토에 물을 먹이고 기타 허드렛일을 하는 따위의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교육을 받지 못했고 예술 작품의 창조와 관련한 복잡한 지시를 이해핳 능력이 없었다. 반면 클로델은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는데다 매우 지적이고 명민했으며 조각가로서 로댕이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를 동등한 시각에서 끌어안고 고민할 줄 알았다. 그런 클로델이 곁에서 도와준다는 것은 로댕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동반자를 만난 것이었다. 게다가 클로델은 모델로서도 로댕에게 깊은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성과 관능의 표현에 대한 영감과 그것을 감싸는 우수의 이미지는 근원적으로 클로델에게서 온 것이다. 물론 로즈 뵈레도 젊은 시절 로댕을 위해 모델을 서곤 했다. 그러나 로즈 뵈레는 클로델의 저 강렬한 성적 매력과 신비스러운 호소력을 지니지 못했다.

로댕, <챙이 없는 모자를 쓴 카미유 클로델>, 1911, 반죽유리, 24x13x17cm, 로댕 미술관, 파리

이 작품은 1884년경 제작된 테라코타를 시작으로 브론즈, 반죽유리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여러 버전으로 만들어졌다. 로댕이 클로델에게 매료될 때부터 관계가 파탄이 나 헤어진 이후까지 재료를 바꿔 가며 계속 제작된 작품이다. 작품들마다 로댕이 클로델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 매력을 여전히 발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클로델과 헤어진 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로댕이 이 작품을 게속 만들었다는 것이다. 클로델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로댕의 마음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챙이 없는 모자를 쓴 카미유 클로델>은 작은 조각이지만, 클로델 특유의 신비가 잘 표현된 작품이다. 작고 갸름한 얼굴은 그 안에서 빛이 고요히 비쳐 나오는 듯하다. 그렇게 환하지도 않지만 그렇게 어둡지도 않은 빛, 그러나 클로델 외에는 그 어떤 사람도 자아낼 수 없는 빛이다. 그 빛은 로댕의 전 존재를 끌어안았던 빛이요 클로델 자신을 태워 온전히 소진한 빛이다.

클로델에게 쓴 편지에서 간절히 사랑을 갈구하던 로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하다. “나는 당신을 설득할 수 없고, 나의 말들은 무의미하구려. 나의 고통을 당신은 믿지 않으니 내가 물어도 당신은 그마저 의심하지요. 나는 오래전부터 더 이상 웃지 않으며 더 이상 노래할 수도 없다오. (…) 당신에 대한 불타는 내 사랑은 지극히 순결하오. 당신이 나에게 동정을 베푼다면 그대 자신도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1892년 원하지 않은 낙태를 한 뒤 클로델은 로댕과 더 이상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로도 1895년까지 정기적인 만남을 가졌지만 두 사람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1886년 로댕은 22년간 살던 로즈 뵈레와 헤어지고 클로델과 다른 나라로 나가 살겠다는 서약서 초안까지 썼지만, 이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로댕 자신의 말마따나 ‘동물적인 충성심’을 가진 채 평생을 자신을 따른 로즈 뵈레를 버릴 수 없었던 로댕에게 클로델의 빛은 무척이나 아름답지만 결코 소유할 수 없는 빛이었다. 로댕으로부터 돌아선 그 빛은 클로델이 정신병원에 갇히면서 그녀의 육신과 함께 천천히 사그라져 갔다. (클로델은 1905년 정신병적 징후를 보이기 시작해 1913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로댕, <카미유 클로델의 얼굴과 피에르 드 위상의 왼손>, 1895?, 플래스터, 32.1x26x27.7cm, 로댕 미술관, 파리

로댕의 <카미유 클로델의 얼굴과 피에르 드 위상의 왼손> 측면 모습

<카미유 클로델의 얼굴과 피에르 드 위상의 왼손>은 로댕 특유의 아상블라주(assemblage) 작품이다. 아상블라주란 여러 물체를 한데 모아 붙여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현대미술 기법을 말하는데, 이렇게 두상과 손을 멋대로 가져다 붙인 로댕이 그 시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노라면 왠지 로댕이 자신과 클로델의 관계에 대한 감정을 토로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이별의 정서 같은 것이 묘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클로델은 특유의 응시하는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머리 왼쪽에 피에르 드 위상의 왼손이 붙어 있다.

피에르 드 위상은 로댕의 걸작 <칼레의 시민> 가운데 고개를 돌려 고뇌 어린 표정을 짓는 인물이다. 동포를 구하기 위해 용감히 자원해 적군의 희생제물이 되기로 했지만, 그의 마음속엔들 왜 죽음과 이별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이 없었겠는가. 그 비통함이 얼굴뿐 아니라 손의 표정에도 그대로 담겨 있다. 클로델과 헤어질 당시 로댕의 심리 상태가 이와 비슷했으리라. 그 왼손을 클로델의 얼굴에 붙여 놓으니 이별의 비통함을 호소하는 것 같다. 그러나 클러델은 오로지 앞만 주시한다. 그녀는 그렇게 로댕을 떠나 자신의 길을 갈 것이고, 로댕에게는 덩그러니 빈손만 홀로 남을 것이다. 이제 현실이 된 이별을 조각가는 슬픈 음성으로 노래한다.

로댕의 조각들이 표출하는 감정을 잘 읽기 위해서는 얼굴뿐 아니라 손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고 비평가들은 말한다. 확실히 로댕 조각 작품의 손들은 그 다양한 제스처로 인간의 온갖 감정을 표현한다. 특히 얼굴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심층적인 혹은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표현할 때 그의 손 표현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이렇게 손을 중시하는 로댕이 <칼레의 시민>을 제작할 당시 일부 손과 발의 원형 제작을 클로델에게 맡겼다. 물론 마케트(maquette, 조각품의 축소 모형. 그림으로 치면 초벌 그림)) 모델링과 작품의 최종 정리는 로댕이 했지만. 로댕은 재능 있는 조수들에게 작품의 중요한 부분을 맡기곤 했다. 그러니까 이 손 또한 클로델이 만든 것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클로델이 이 작품을 봤을 때 그녀의 심경은 매우 복잡해졌을 것이다. 로댕이 그것을 노리고 만든 것은 아닐까? 두 사람만이 아는 일종의 기호 같은 작품이 아니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보낸 30년 여생

로댕과 결별한 뒤 클로델은 한동안 열심히 작품 활동을 했다. 하지만 정신질환이 발생하면서 그녀의 모든 추구는 갈수록 뒤틀려버린다. 심지어 자신의 작품을 마구 부수기까지 한다. 1906년 사랑하는 남동생 폴 클로델(유명한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외교관이다)이 결혼해 중국으로 떠나자 클로델은 자신의 작업실로 침잠해 은둔자처럼 산다. 1913년 그녀를 격려해주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는 남동생과 어머니가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린다. 30년의 수용생활 중간 중간 의사들이 가족에게 클로델을 데려가도 좋다고 통보했지만, 어머니도 남동생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클로델이 망각의 강 속으로 사라지기를 바랐던 것 같다. 1943년 10월 19일, 결국 클로델은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1951년 그녀의 첫 회고정이 열렸고, 19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녀의 재능에 마땅한 미술사적 평가가 이루어졌다.

카유 클로델, <중년>, 1893/1903, 브론즈, 114x163x72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카미유 클로델 <중년>에서 젊은 여인 부분

스스로 탁월한 조각가였던 클로델의 이 작품은 그녀 자신과 로댕의 비극적인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무엇보다 클로델의 동생 폴 클로델이 그렇게 설명했다. 작품을 보면, 한 늙수그레한 남자가 나이 든 여인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떠나고 있고, 그 뒤로 젊은 여인이 그를 향해 무릎을 꿇은 채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있다. 로댕이 젊고 아리따운 자신을 버리고 늙고 욕심 많은 동거녀 로즈 뵈레를 따라 떠나버렸음을 암시하는 조각이다. 물론 그런 자전적인 내용도 챙겨 봐야겠지만, 그걸 넘어 사람은 나이가 들면 젊음과 사랑, 열정으로부터 떠나가게 마련이며 그것이 대부분의 인간의 운명이라는, 인생에 대한 다소 허무주의적인 통찰 또한 섬세하게 잘 표현된 작품이다.

클로델과 로댕의 관계가 파탄이 나면서 생겨난 비극의 하나는, 클로델이 로댕에 대해 피해망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로댕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로댕은 나라에서 그녀의 작품을 구입하도록 애를 쓰는 등 오히려 그녀가 화단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제삼자를 통해 은밀하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로댕은 나라에서 자신의 미술관을 세우면 그 안에 전시실 하나를 만들어 반드시 클로델의 작품을 설치해줄 것을 원했다. 그래서 파리의 국립 로댕 미술관은 그의 뜻을 받들어 클로델의 방을 하나 따로 마련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카미유 클로델, <로댕 흉상>, 1892, 브론즈, 40x25x28cm, 로댕 미술관, 파리

카미유 클로델의 <로댕 흉상> 측면 모습

로댕이 형상화한 클로델을 보면 클로델을 향한 그의 개인적인 감정이 어떠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그만큼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클로델이 만든 로댕의 초상 조각에는 그녀의 감정이 그리 노골적으로 담겨 있지 않다. 매우 절제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위대한 스승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사적인 정서를 드러내기보다는 스승의 예술혼을 드러내는 데 더 관심을 쏟았던 듯하다. 차분하고 지적인 느낌이 인상적이다. 1888-89년에 테라코타로 제작되었고, 이를 토대로 1892년에 브론즈로 제작되었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한겨레신문 미술 담당 기자를 지냈다. 학고재 갤러리 관장, 서울미술관 관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쓴 책으로는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지식의 미술관》,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등 30여 권이 있으며, 대중강연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기획물 전체>미술의 세계>테마로 보는 미술  201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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