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화가와 모델 - 모네와 카미유 동시외

라라와복래 2015. 2. 6. 09:59

화가와 모델

모네와 카미유 동시외

빛과 그림자는 공존한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가 있어야 빛이 있다. 흔히 빛의 화파(畵派)로 불리는 인상파는 단순히 빛의 표정만 잘 묘사한 게 아니다. 그림자의 인상 또한 훌륭히 담아냈다. 인상파 화가 가운데서도 그 본질에 가장 충실했던 화가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다. 그의 그림은 미술사상 가장 매혹적인 빛과 그림자의 드라마라 할 수 있다.

모네의 찬란한 빛과 그 빛만큼 뚜렷한 그림자는, 인생이 당당히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할 삶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모네가 자신의 영원한 모델이자 첫 번째 부인인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 1847-1879)와 만나고 헤어진 것도 그 명암의 한 장이었다.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인 그로서는 담담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의 본질이었다. ▲모네, <베레모를 쓴 자화상>, 1886, 캔버스에 유채, 46x56cm, 개인 소장

모네의 영원한 모델이자 빛으로 남은 아내

모네와 만나기 전 카미유는 직업 모델로 일하고 있었다. 1865년, 그녀가 16살 때 그리고 모네가 25살 때 두 사람은 화가와 모델로 만났다. 곧 사랑에 빠진 그들은 함께 살기 시작했다. 1867년, 카미유가 큰아들 장을 임신했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싶어 했으나 모네의 아버지는 둘의 결혼을 극력 반대했다. 카미유가 모네의 아내가 될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본 것이다. 가난한 서민 출신에다 모델이라는 그녀의 배경이 싫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무렵 모네가 모델로 그녀를 그린 작품들은 하나같이 화사하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주위의 평가야 어떻든 짝을 만났다는 기쁨에 젊은 에술가의 붓길은 거칠 것이 없었다.

모네, <카미유(초록 드레스의 여인)>, 1866, 캔버스에 유채, 231x151cm, 브레멘 쿤스트할레

모네가 카미유를 만난 이듬해에 그린 그림이다. 카미유는 리옹에서 상인의 딸로 태어났다. 가족이 파리로 이사했다가 바티뇰(Batignolles)에 정착하게 되면서 10대 때부터 화가들의 모델을 서게 되었다. 당시 바티뇰에는 화가들의 작업실이 많았다. 모네는 작업실을 나눠 쓰던 동료 화가 바지유(Fréderic Bazille)의 소개로 카미유를 알게 되었는데, 그때 카미유는 18살, 모네는 25살이었다. 모네는 카미유의 매혹적인 눈에 특히 반했다고 한다.

카미유에게 검은 줄이 있는 초록 드레스를 입혀 그린 이 작품은, 살롱 전에 출품되어 비평가들과 관객들에게 꽤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런 만큼 젊은 화가 모네에게는 이름을 알릴 수 있는 훌륭한 제자가 되어준 그림이다. 당시 무명화가의 그림 값으로는 고가인 80프랑에 팔려 재정적으로 쪼들리던 두 연인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빛과 대기에 집중하는 인상파의 특징은 아직 그다지 드러나 있지 않지만, 세련된 대상 묘사와 감각적인 색 처리에서 화가의 탁월한 기량을 엿볼 수 있다. 카미유는 모네뿐 아니라 르누아르와 마네를 위해서도 모델을 서주었다.

르누아르, <모네 부인>, 1872, 캔버스에 유채, 54.5x72cm, 굴벤키안 미술관

르누아르의 붓으로 표현된 카미유의 모습이다. 흰색 소파에 묻힌, 푸른 드레스를 입은 카미유가 신문을 읽다가 스치듯 화가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그 캐주얼하고 편안한 동작을 르누아르 특유의 자유롭고 활달한 터치로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이 무렵 모네 가족은 아르장퇴유에 살았는데, 친구 르누아르가 모네의 집에 자주 머물다 가곤 했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나란히 이젤을 펼쳐 놓고 주변 풍경을 그릴 때가 많았다. 부지런했던 르누아르는 그러는 동안 이렇듯 모네의 부인까지 화폭에 담았다.

모네, <생타드레스의 테라스(생타드레스의 정원), 1867, 캔버스에 유채, 98.1x129.9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모네가 생타드레스(Sainte-Adresse)에 있는 고모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린 그림이다. 당시 카미유는 임신을 한 상태였는데, 아버지와 고모가 결혼을 격렬히 반대하니 모네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입장이었다. 결혼하겠다고 계속 고집을 피우다가는 자칫 집에서 보내오는 생활비마저 다 끊길 판이었다. 그래서 모네는 홀로 아버지와 고모를 찾아가 더 이상 카미유와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 척했다. 그러는 사이에 카미유가 파리에서 장을 낳았고, 이를 보러 며칠 파리를 다녀간 것 빼고는 모네는 여름과 가을 내내 생타드레스에 머물렀다.

그림은 생타드레스의 어느 정원에서 바라본 해변 풍경을 그린 것이다. 수평선 쪽으로 옹플뢰르(Honfleur)가 아련하고 배들이 점점이 떠 있다. 화사한 빛을 받는 정원에서 네 사람이 앉아 있거나 서 있는데, 앉아 있는 신사는 모네의 아버지 클로드 아돌프이고 그 왼편에 등을 보인 여인이 고모 소피로 보인다. 서 있는 여인은 모네의 고종사촌 잔 마르게리트, 그 옆의 남자는 고모부일 것으로 추정된다.

모네, <정원의 여인들>, 1866/67경, 캔버스에 유채, 256x208cm, 오르세 미술관

1866~1867년 사이에 그린 <정원의 여인들>은 카미유를 향한 화가의 살가운 시선과 빛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동시에 드러내 보인 걸작이다. 높이가 2m 56cm인 이 작품을 야외에서 그리기 위해 모네는 참호까지 팠다고 한다. 그림의 아랫부분을 참호 속에 넣으면 거대한 이젤이 없어도 윗부분을 쉽게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작품을 살롱 전에 출품했다가 퇴짜를 맞긴 했지만, 이렇게 고생해 가며 야외의 빛을 포착하려 노력한 모네는 결국 훗날 인상파의 거두로 우뚝 서게 된다.

이 작품을 위해 카미유 역시 모네 못지않게 고생했다. 그림에서는 네 명의 여인이 제각각 꽃과 풍경에 취해 어우러져 있지만, 이들 네 명의 모델은 모두 같은 사람이다. 바로 카미유다. 물론 머리 빛깔을 바꾸는 등 화가는 네 여인을 제각각 다르게 표현했지만, 가만히 보면 그림 속의 네 여인은 비슷한 체격에 비슷한 인상을 준다. 같은 공간에 놓여 있으면서도 서로 교감해 섞이지 않고 왠지 각자의 역할에 몰입해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데서 우리는 모네가 여러 명의 모델을 한꺼번에 모아 놓고 그리지 않고 한 사람씩 따로 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카미유가 그렇게 1인 4역을 했던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생산해내며 두 사람은 서로 호흡이 무척 잘 맞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무렵 깊은 만족감과 성취감 속에서 모네는 한 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지금 작업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정원의 여인들>은 젊은 날 카미유의 풋풋한 인상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인상파의 적극적인 옹호자였던 소설가 에밀 졸라는 이 작품을 보고 이렇게 적었다.

“밝은 여름옷을 입은 여인들이 정원 산책로를 거닐며 꽃을 꺾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인들의 흰 치마폭 위로 내리쬐는 햇살은 화사함을 더해준다. 나무 한 그루에서 퍼져 나온 옅은 빛깔의 그림자가 마치 널찍한 회색 모포처럼 오솔길과 여인들의 옷자락에 스며들어 있다. 이보다 더 기막힌 효과가 있을까?”

빛의 사도가 그 대장정의 첫걸음을 떼는 모습을 졸라는 이와 같은 감격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카미유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그로부터 오는 행복, 그리고 자신의 예술에 대한 뚜렷한 확신과는 별개로 당시 모네의 경제적 형편은 매우 곤궁했다. 아들 장의 대부이기도 한 친구 바지유에게 이런 편지를 띄웠다. “통통하고 예쁜 사내 녀석이 귀여워 죽겠네. 하지만 먹을 것도 없이 지내는 애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터진다네.”

파라솔을 든 여인

모네가 미루고 미루던 결혼식을 거행한 것은 1870년의 일이다. 이 해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발발할 조짐을 보이면서 모네는 동원 대상이 되었는데,(모네는 알제리에서 군복무를 한 뒤 1862년 제대했다), 기혼자의 경우 제일 늦게 소집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6월 28일 마침내 미루고 미루던 결혼식을 올렸다. 유명한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Gustave Courbet)가 증인을 섰다. 결혼식에 카미유의 부모는 참석했지만, 모네의 아버지는 참석하지 않았다. 부부가 된 두 사람은 파리를 떠나 노르망디의 유명한 휴양지 트루빌(Trouville)로 갔다. 신혼여행의 목적도 있었고, 징집에 대비한 목적도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모네는 영불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으로 가기 전, 르아브르에 있는 병든 아버지를 찾아보았는데, 이때 아버지로부터 영국 체재에 필요한 경비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모네가 아버지를 찾아뵐 때 혼자 갔다는 사실, 그래서 새로 결혼한 모네 가족이 따로 영국으로 가 영국에서 만났다는 사실로 볼 때 아버지는 모네의 결혼을 끝내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모네, <파라솔을 든 여인(카미유와 장)>, 1875, 캔버스에 유채, 100x81cm,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

1871년 프랑스로 돌아온 이후 모네가 그린 카미유의 모습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파라솔을 든 여인>(1875)이다. 언덕에 올라가서 화가를 내려다보는 카미유의 모습이 마치 선녀 같다. 구름이 끼었지만 청명한 하늘은 빛을 가리기 위해 파라솔을 든 여인의 실루엣과 함께 신선하고도 상쾌한 분위를 전해준다. 거칠고 빠른 붓놀림은 하늘과 여인, 풀밭을 넘나들며 화면 전체를 휘감아 찰나와 순간의 미학을 이룬다. 사실 이 세상에 찰나가 아닌 것이 어디 있고, 순간이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빛도 찰나고 인생도 찰나다. 어쩌면 모네는 화가와 모델로서 두 사람의 관계도 찰나로 예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까지 카미유를 모델로 해서 많은 숫자의 그림을 그렸지만, 왠지 이 그림 속의 카미유는 그의 곁을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같이 보인다. 하나의 환영처럼 대기 속으로 분해되려는 카미유, 그리고 마치 그녀를 송별하듯 고즈넉하게 올려다보는 화가의 시선, 이렇듯 이 그림에서는 예술도 사랑도 자꾸 하나의 순간으로 찰나로 화하고 있다.

모네, <야외의 어떤 습작 - 왼쪽을 바라보는 파라솔을 든 여인>, 1886, 캔버스에 유채, 131x88cm, 오르세 미술관

모네, <야외에서 그린 인물 -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파라솔을 든 여인>, 1886, 캔버스에 유채, 131x88cm, 오르세 미술관

<파라솔을 든 여인>을 그린 지 11년 뒤인 1896년, 모네는 유사한 그림을 두 점 더 그린다. 예전 그림처럼 파라솔을 든 여인이 언덕 위에서 화사한 빛을 받고 있는 그림들이다. 두 작품 다 모델은 알리스의 맏딸 쉬잔이 섰다. 쉬잔의 모습을 화폭에 옮기며 모네는 죽은 카미유의 옛 모습을 아프게 떠올렸을 것이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가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지하세계에서 불러내려던 것처럼 모네는 그림으로 카미유의 영혼을 불러내려는 것 같다.

비록 사별했지만 한번 맺은 부부의 연은 쉽게 식지 않는 법이다. 더구나 모네는 카미유를 모델로 그릴 때 단순한 직업 모델들의 경우와는 달리 부부이자 영원한 친구로서 그녀에 대한 신뢰감과 친밀감을 바탕에 깔고 그렸다. 이 부분은 카미유 외에 그 누구도 제공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쉬잔은 모네가 무척 사랑한 의붓딸로서 카미유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친밀감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런 친밀감이 있었기에 모네 또한 이 주제를 다시 그려볼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그림이 환영을 불러오는 듯한 느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소설가이자 미술 비평가인 옥타브 미르보(Octave Mirbeau)는 이 그림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햇살이 내리쬐는 작은 언덕 위에서 여인이 가볍게 사뿐사뿐 걸어간다. 세련되게 차려입은 여인에게서는 불쑥 허공에서 나타난 환영 같은 매력이 느껴진다.

한 지붕 두 가족

<파라솔을 든 여인>이 제작된 지 4년이 지나 카미유는 자궁암으로 죽었다. 둘째 아들 미셸을 임신하기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카미유는 1876년 둘째 아들을 낳은 뒤 계속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1년 뒤인 1879년 9월 4일, 모네가 지켜보는 가운데 32살의 나이로 영면했다. 모네는 1875년경부터 카미유와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해 줄곧 갈등을 겪었는데, 이렇게 중병에 걸려 죽음에 이른 자신의 조강지처를 보면서 나름의 죄책감을 느꼈으리라 여겨진다.

사실 <파라솔을 든 여인>을 그리던 해 모네는 다른 여인과 긴밀한 관계에 빠져들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알리스 오슈데(Alice Hoschedé).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인 에르네스 오슈데의 부인이다. 알리스가 1877년에 낳은 그녀의 여섯 번째 아이 장 피에르 오슈데는 에르네스가 아닌 모네의 피를 이어받았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모네가 이처럼 다른 여인과 가까워져 가는 사이에 카미유는 말라 가는 식물처럼 이 위대한 예술가의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네와 알리스가 밀접하게 가까위진 데는 1870년대 후반 불어 닥친 불경기가 큰 몫을 했다. 가뜩이나 낭비벽이 심했던 에르네스 오슈데는 이로 인해 파산을 했다. 에르네스가 자살을 기도했다가 파리에서 홀로 재기를 도모하자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알리스는 여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모네의 베퇴유(Vétheuil) 집에 합류했다. 모네의 제안에 따라 두 가정이 한 지붕 아래 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없는 여인이 병든 아내가 있는 남자와 동거한다는 것은 주위로부터 눈총을 사기 딱 좋은 일이었다. 그런 시선을 애써 무시할 만큼 모네와 알리스 사이에는 정서적 유대가 있었을 것이다.

점점 건강을 잃어 가던 카미유의 당시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당시 모네와 오슈데의 실제 관계가 어느 정도였든 여자의 직감으로 카미유는 앞으로 전개될 모든 상황을 예감했으리라. 이런 묘한 상황에서 알리스는 나름대로 정성스럽게 카미유를 간호했고 카미유는 그녀의 친절에 의지했다. 아니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카미유를 돌봐준 알리스는 그녀의 임종 의식까지도 꼼꼼히 챙겼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적인 교류가 두 여인 사이에 존재했음에 틀림없다. 거기에는 빛도 있었을 것이고 그림자도 있었을 것이다. 카미유가 세상을 떠난 뒤 알리스가 그녀에 대한 질투심으로 집안에 있던 카미유의 사진과 카미유와 모네가 주고받은 편지 등을 다 없애버린 것은 그 그림자의 영향 탓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남아 잇는 카미유의 사진은 알리스의 손길을 벗어날 수 있었던 단 한 장뿐인데, 1871년 모네 가족이 영국에 갔다가 네덜란드를 거쳐 돌아올 때 찍은 사진이 그 사진이다. ▶카미유 동시외의 유일하게 남은 사진, 1871

모네, <붉은 케이프 - 모네 부인), 1873경, 캔버스에 유채, 100.2.5x80cm, 클리블랜드 미술관

모네와 카미유, 두 사람의 정서적인 갈등이 배면에 깔려 있는 그림이다. 그 갈등은 표현의 대비를 통해 나타난다. 모네가 있는 실내는 다소 어둡고 카미유가 있는 문밖은 환하게 빛이 내리쬔다. 실내에는 원색이 아무 것도 없지만, 바깥은 수풀의 녹색과 카미유 어깨망토의 붉은색이 찬란하다. 카미유는 빠른 걸음으로 집 앞을 지나가고 있고, 화가는 멈추어 선 자세로 고정된 시선을 던지고 있다. 무언가 두 사람이 어긋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 결혼생활에 대한 모네의 불안은 커져 갔다고 한다. 카미유의 병도 이 무렵부터 자라나기 시작했다. 텅 빈 듯 보이는 실내는 그래서 더 우울하다. 서로 사랑함에도 왜 이처럼 어긋나기만 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카미유도 모네를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고, 모네도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채 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지금 서로에게 침묵하고 있다. 1926년 죽을 때까지 모네는 이 그림을 팔지 않고 자신만의 소유로 간직했다고 한다. 카미유에 대한 모네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다.

모네, <일본 여인(기모노를 입은 카미유)>, 1875/76, 캔버스에 유채, 231.5x142cm, 보스턴 미술관

<붉은 케이프 - 모네 부인>을 그릴 무렵부터 기울기 시작한 부부 사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화가와 모델로서 계속 협업을 했다. 카미유의 밝고 환한 얼굴과 춤추는 듯한 자세, 붉은색의 기모노, 일본 부채가 그림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나 빠듯한 경제사정 등 화가와 모델이 맞닥뜨리고 있던 현실의 어려움은 감춰져 있다. 어쨌거나 이 그림은 철저히 시장을 겨냥한 것이었다. 모네는 인상파 스타일의 거친 풍경보다 이런 화려하고 인습적인 인물화가 보수적인 컬렉터들에게 잘 먹히리라고 보았고, 그의 예상대로 이 그림은 경매에서 2010프랑에 낙찰되었다. 그러나 모네는 훗날 자신이 돈을 위해 타협을 한 데 대해 스스로 자책하곤 했다.

캔버스의 빛으로 피어나 마음의 그림자로 지다

모네에게 카미유의 죽음은 엄청난 슬픔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강지처의 죽음 앞에서도 타고난 예술가였다. <영면하는 카미유 모네>를 보면, 죽은 부인까지 자기 모델로 삼는 그의 태도가 무서울 정도다. 훗날 프랑스 총리가 되는 친구 클레망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네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너무도 소중했던 여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이제 죽음이 찾아왔네. 그 순간 나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지. 시시각각 짙어지는 색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추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던 거야.”

모네, <영면하는 카미유>, 1879, 캔버스에 유채, 90x68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카미유가 모네의 영원한 모델이라는 사실은 이렇게 주검이 되어서조차 남편을 위해 모델을 서주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난다. 카미유의 주검은 무게조차 없는 것 같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는지는 주검의 그 ‘가쁜함’이 웅변적으로 증언한다. 그녀에게 죽음은 진정한 평화요 휴식이었던 것이다. 망자의 평화를 보면서 모네는 한편으로는 아내의 수고가 덜어진 데 대해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아비로서 그 고통의 세월 동안 제대로 그녀를 이해하고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일었을 것이다. 이제 그가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처럼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그려주는 것뿐이었다. 그날 그는 한 지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불쌍한 제 아내가 오늘 아침 세상을 떠났습니다. (…)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돈을 동봉할 터이니 전에 우리가 몽 드 피에테에 저당 잡힌 메달을 되찾아주십시오. 그 메달은 카미유가 지녔던 유일한 기념품으로, 그녀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걸어주고 싶습니다.

모네, <정원의 알리스 오슈데>, 1881, 캔버스에 유채, 81x65cm, 개인 소장

알리스가 정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알리스의 나이는 37살이었다. 매우 평화롭고 한가한 일상의 정경을 그린 그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햇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치고, 이를 받는 나무와 꽃이 화사하다. 나무와 꽃, 그리고 알리스를 품어 안는 울타리는 안정적인 가정의 울타리를 연상시킨다. 비록 조강지처를 잃었지만, 모네에게 알리스는 안정된 가정의 울타리를 새로이 제공해준 고마운 여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은 든든한 아내요 어머니의 이미지로 그려진 인상이 짙다. 알리스는 카미유의 빈자리를 잘 메워주었지만, 집안에서 카미유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죽은 이에게 계속 질투심을 느꼈던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카미유에 대한 모네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도 넘어설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부인의 주검 앞에서도 색채의 변화, 곧 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추적했던 모네는 카미유와의 사별 이후 인물화에 대한 관심을 점차 줄여 나가고 풍경화를 더욱 많이 그리게 된다. 알리스와는 1892년 결혼식을 올렸지만(1891년에 에르네스 오슈데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카미유에 비하면 그림으로 그려진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 반면 알리스의 딸들은 곧잘 모델로 동원되곤 했다. 모네는 이 의붓딸들을 매우 사랑했고, 의붓딸들과 함께 야외에 나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모네의 그림에서 딸들은 인물로서 개성을 드러내기보다 풍경의 한 부분으로 동화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그런 점에서 모네에게는 카미유만이 진정한 모델이라 하겠다. 그녀는 그렇게 영원한 빛으로 그려졌고, 또 그렇게 마음에 영원히 그림자로 남았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한겨레신문 미술 담당 기자를 지냈다. 학고재 갤러리 관장, 서울미술관 관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쓴 책으로는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지식의 미술관》,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등 30여 권이 있으며, 대중강연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기획물 전체>미술의 세계>테마로 보는 미술  201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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