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화가와 모델 - 반 고흐와 룰랭 가족

라라와복래 2015. 1. 11. 20:47

화가와 모델

반 고흐와 룰랭 가족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그가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의 모습보다 더 사랑해서, 혹은 자신이 누구보다 잘났다고 생각해서 이렇듯 열심히 자화상을 그린 것은 아니다. 무명의 예술가로서 자신의 몸을 다잡기 위해, 자기 확신을 얻기 위해 그는 스스로의 모습을 꾸준히 기록했다. 더불어 자기 자신이야말로 돈 한 푼 들지 않는 모델이기에 가난한 그는 수시로 자화상을 그렸다.

<해바라기>나 <까마귀가 나는 밀밭> 같은 정물화와 풍경화로 더 유명하지만, 열심히 자화상을 그린 데서 알 수 있듯이 반 고흐는 인물화에도 관심이 아주 많았다. 화업(畵業) 초기인 헤이그 시절 반 고흐는 이미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리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단지 경제적인 여건상 모델을 사 인물화 연습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주위에서 그에게 인물화를 의지해 오는 경우도 드물었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인물화를 그릴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자화상을 그리는 틈틈이 반 고흐는 연이 닿는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을 그렸다. 내향적인 그가 그렇게 부탁해서 그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에게 동정적인 이들이었고, 그만큼 개인적으로 기억하고 기리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그려진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가 룰랭 가족이었다. ▲반 고흐, <이젤 앞의 자화상>, 1888, 캔버스에 유채, 65x50.5cm,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따뜻하고 정이 많았던 애주가 룰랭

반 고흐, <우체부 조세프 룰랭의 초상>, 1888, 캔버스에 유채, 81.2x65.3cm, 보스턴 미술관

애주가였던 룰랭은 ‘카페 드 라 가르’에 빈번히 드나들었다. 1888년 5월~9월 사이 반 고흐는 이곳에서 방을 하나 세내어 살고 있었던 까닭에 그와 자주 접촉할 수 있었다. 반 고흐가 룰랭을 모델로 해서 그린 유화는 모두 여섯 점이다. 펜화로도 세 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워낙 술을 좋아한 위인이어서 그런지 이 그림을 그릴 무렵 47세였던 룰랭은 실제보다 나이가 훨씬 더 들어 보인다. 그림을 그리던 때가 여름이어서 지독하게 더웠으므로 정복과 모자를 갖춰 입고 모델을 서는 게 고역이었으나 룰랭은 반 고흐의 요구에 충실히 따랐다. 반 고흐는 깊은 심연을 느끼게 하는 푸른색 제복이야말로 이 그림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배경의 하늘색은 그 제복의 무거움 위로 떠다니는 호탕한 룰랭의 마음씨를 드러내 준다.

널리 알려진 <우체부 조세프 룰랭의 초상>은 이 가족의 가장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호방하게 생긴 룰랭은 반 고흐와 아주 가까웠던 사람이다. 우체부인 룰랭은 반 고흐가 프랑스 남쪽의 아를로 이주했을 때 그곳에 정착하도록 도와주고 가장 의지가 된 이웃이다. 룰랭은 직접 편지를 배달하는 집배원은 아니었다. 아를 역에서 우편물을 분류하는 책임자였다. 당시 먼 곳과의 소통은 우편물을 통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는데, 반 고흐가 오매불망 바라던 고갱이 아를로 합류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 것도, 삼촌 센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된 것도 모두 편지를 통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우체부인 룰랭은 늘 소외감에 시달려 온 반 고흐에게 아직 세상이 그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소중한 상징 같은 존재였다.

룰랭은 술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피가 따뜻하고 정이 많은 사람답게 그는 술을 아주 사랑했다. 그의 푸른 우체부 제복과 주독으로 인해 빨개진 뺨과 코는 반 고흐에게 그럴 수 없이 매혹적인 색채의 대비로 다가왔다. 룰랭은 모델을 서본 경험이 없어서 다소 뻣뻣하게 자세를 잡았지만, 그런 서툰 자세보다 반 고흐를 더욱 애먹인 것은 모델을 서면서도 그가 끊임없이 술과 먹을 것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모델에게 반 고흐는 모델료를 계산해 줄 필요가 없었다. 그저 함께 술을 마시고 식사를 하면서 끈끈한 우정을 확인하면 그걸로 족했다. (반 고흐는 룰랭의 가족 한 사람당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모델료 대신 초상화 한 점씩을 주었다.) 그 따뜻한 우정이 <우체부 조세프 룰랭의 초상>에는 훈훈하게 배어 있다. 비록 파란색의 제복이 룰랭을 다소 가두듯 가라앉히고 있지만, 그의 얼굴과 손에서 퍼져 나오는 훈훈한 인정은 반 고흐에게 분명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아를에서 룰랭이 자신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에 대해 반 고흐는 테오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나에게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기에는 나이가 그리 많지 않지만, 우체부 룰랭은 마치 노병이 젊은 병사에게 그러하듯 진중한 마음과 다정함으로 나를 대해 주었다.”

반 고흐, <우체부 조세프 룰랭의 초상>, 1889, 캔버스에 유채, 64.5x55.2cm, 뉴욕 현대미술관

반 고흐는 룰랭의 외모를 소크라테스에 비교했지만, 어떤 때는 그의 인상이 러시아 사람 같다고 말하곤 했다. 특히 소설가 도스토옙스키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넓은 이마와 코, 수염의 형태가 상당히 비슷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그림 속의 룰랭은 왠지 소설가의 카리스마 같은 것을 풍긴다. 깊이 통찰하는 듯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반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린 시점은 룰랭이 마르세유로 전근을 가고 나서다. 반 고흐는 룰랭을 단 한 번 앉혀 놓고 이 그림을 완성했다고 자랑한 적이 있는데, 그 같은 반 고흐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일부 미술사가는 반 고흐가 직접 실물을 보고 그린 게 아니라 기억 속의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추축한다.

보스턴 미술관 소장의 작품을 제외하면 룰랭의 나머지 초상은 모두 얼굴을 클로즈업한 흉상이다. 이 작품 또한 예외는 아니다. 당연히 사이즈도 보스턴 미술관 소장품보다 작다. 하지만 이 작품은 2014년 말 기준으로 지금껏 팔린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13위에 랭크되어 있다. 당시 팔린 가격에 물가 인상률을 적용하면 현재의 시가는 1억1천3백만 달러(1천2백57억 원) 이상이다.

한낱 범부에 불과한 사람이었다고는 해도 룰랭의 뜨거운 기질은 그로 하여금 시대의 질곡을 향해 늘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게 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으며 불의에 대해서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딸이 태어났을 때 장군 조르주 블랑제의 딸 이름을 따 마르셀(Marcelle Roulin, 1888-1980)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도 룰랭의 이런 기질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딸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가톨릭교회와 성직자들의 보수적인 태도에 대한 불만이 이런 형식으로 나타났는데, 딸의 세례 때 그가 부른 찬가도 ‘라 마르세예즈’, 곧 프랑스 국가였다. 여동생 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반 고흐는 그런 룰랭을 이렇게 묘사했다. ▶반 고흐, <우체부 조세프 룰랭의 초상>, 1888, 캔버스에 유채, 64.1x47.9cm, 디트로이트 미술관

“요즘 노란 장식이 있는 남색 제복을 입은 우체부를 그리고 있단다. 얼굴은 소크라테스를 닮았지. 코는 거의 없는 듯 펑퍼짐하고 앞이마는 불쑥 튀어나왔어. 머리는 벗겨졌고, 발그레하니 토실토실 살찐 뺨 위에는 작은 회색 눈이 자리하고 있단다. 수염은 희끗희끗하고 귀는 커다랗지. 이 남자는 열렬한 공화주의자인데다 사회주의자란다. 이치에 밝고 아는 것도 많구나.”

‘대체 가족’으로 다가왔던 룰랭 가족

1841년 랑베스에서 태어난 조세프 에티엔 룰랭(Joseph-Etienne Roulin, 1841-1903)은 1868년 열 살 아래의 오귀스틴 알릭스 펠리코(Augustine-Alix Pellicot, 1851-1930)와 결혼했다. 슬하에 4남매를 두었으나 막내가 열 살이 채 못 되어 죽었다.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막내를 제외하고 두 아들 아르망과 카미유, 딸 마르셀은 그의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간간이 반 고흐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이들 가족이 반 고흐의 모델이 된 시기는 1888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로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었다. 룰랭이 마르세유로 전근을 가게 되는 바람에 아쉽게도 더는 그들을 그릴 수 없었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 가족은 단순히 모델의 역할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 고흐에게 진정으로 따듯하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선명히 각인시켜 주었다. (자신의 가족과 늘 긴장 관계에 있었던 반 고흐에게 룰랭의 가족은 ‘대체 가족’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룰랭 부부는 반 고흐가 고갱과의 다툼 끝에 자신의 귀를 잘라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의 곁에서 끝까지 그를 돌보고 위로해 주었다. 퇴원 뒤에도 정성껏 준비한 아침을 들고 반 고흐의 작업실을 찾아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자신을 이렇듯 한 식구로 대하고 걱정해 주는 이들을 보며 반 고흐는 마음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왼쪽 그림은 단란한 룰랭 모녀의 모습이다. 노란색과 녹색을 주조로 한 화면은 평화와 안정, 따사로움을 느끼게 한다. 하얀 옷을 입은 아기는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노란색과 녹색이 아기의 하얀색을 받치기 위해 선택된 색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 관계는 이파리들과 꽃의 색채 관계와 유사한 것이다. 해바라기를 그리던 시기의 노란색에 대한 애정이 이 사랑스런 모녀의 초상에 묻어 있어 행복한 삶에 대한 반 고흐의 희구가 선명히 느껴진다. ◀반 고흐, <아기를 안고 있는 룰랭 부인>, 1888, 캔버스에 유채, 92x73,5cm, 필라델피아 미술관

반 고흐, <아기 마르셀 룰랭>, 1888, 캔버스에 유채, 35x24.5cm,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운 아기 그림이다. 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그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기의 매력이 잘 표현되어 있다. 눈은 눈동자뿐 아니라 흰자위까지 푸른빛을 띠어 청명한 느낌을 주고, 화면 전체에 깔린 연둣빛은 돋아나는 새싹의 싱싱함을 전해 준다. 반 고흐는 이 초상화를 1889년 5월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보냈는데, 당시 임신 중인 테오의 아내 조는 7월 5일 반 고흐에게 편지를 써서 그림을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한다고 사의를 표했다.

“식탁의 내 자리에서 이 그림은 가장 잘 보입니다. 푸른 눈과 사랑스런 작은 손, 동글동글한 뺨을 완벽하게 느낄 수 있어요. 우리 아기도 이 아기처럼 튼튼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아기의 큰아빠가 아기 초상화를 그려 준다면 더욱 좋겠죠.”

조가 그림에서 느낀 대로 마르셀은 건강하게 오래 살았다. 91세가 넘게 살았으니 말이다. 물론 테오와 조의 아들 빈센트 필리프 반 고흐 역시 88세까지 살아 어머니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었다. 덧붙이자면, 빈센트 필리프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백부의 작품들을 잘 관리했을 뿐 아니라 이를 토대로 암스테르담의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을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반 고흐, <아르망 룰랭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5x54.1cm, 폴크방 미술관, 에센

룰랭 가의 큰아들 아르망이 스무 살 때 그려진 초상이다. 아버지에 비해 침착하고 차분한 인상을 준다. 반 고흐가 인물화를 그릴 때 배경색을 곧잘 모델의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점에 착안한다면, 이 그림의 녹색은 아르망이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아르망을 그린 다른 초상화를 보면 그는 모델 서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보이기도 한다. 표정에 약간의 슬픔도 담겨 있다. 모델로서 자신의 의무를 성실히 다하고 있고, 그 내면에 공감한 반 고흐가 특유의 붓 터치를 억눌러 보기 드문 절제의 미를 나타내 주고 있다.

반 고흐, <학생>(카미유 룰랭), 1888, 캔버스에 유채, 63.5x54cm, 상파울루 미술관

반 고흐는 카미유를 ‘꼬마’라고 부르곤 했다. 장난기와 활력이 넘치는 열한 살짜리 소년의 인상을 포착하기 위해 애쓴 그림이다. 붉은색과 오렌지색, 녹색과 하늘색이 어우러져 적절한 긴장감과 균형감이 느껴진다. 반 고흐는 헤이그 시절부터 일종의 ‘만인보(萬人譜)’ 같은 그림을 그리기를 원했다. 동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을 인물화로 그려 남김으로써 일종의 연대기 작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룰랭 가족의 초상화는 한 가족을 대상으로 그린 시도가 집중적으로, 그리고 꽤 훌륭한 성취로 나타난 그림이라 하겠다. 그가 인물화를 그릴 기회가 많지 않아 ‘만인보’의 꿈이 끝내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기회만 허락되었다면 진정 훌륭한 시대의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뛰어난 룰랭 가족의 초상화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산산이 부서진 화가 공동체의 꿈

파리에서 활동하던 반 고흐가 남프랑스의 아를로 내려간 것은 대도시의 번잡함과 삭막함이 싫어진데다 물가가 싸고 기후도 온난한 남녘으로 내려가면 그가 늘 꿈꾸었던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화가들의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꿈은 고갱의 합류로 부분적으로나마 이뤄지는가 싶었지만 얼마 안 가 불거진 고갱과의 갈등과 결별은 그 꿈을 산산이 부숴 놓았다.

반 고흐가 굳이 남하해 공동체를 추구한 것은 사실 그의 영혼이 그만큼 춥고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이 추위와 고독을 녹이기 위해 그는 평생 미친 듯이 애를 썼으나 늘 실패로 귀결되었다. 아를에서의 삶도 그랬다. 그러나 룰랭 부부와 극소수의 다른 동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그래도 삶은 아직 살 만한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룰랭 가족이 전근 명령에 따라 마르세유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반 고흐가 느낀 아쉬움은 매우 컸다. 이 가족의 부재는 아를에서 그의 보호막이 사라짐을 의미했다. 그런 상황에서 병의 재발과 주위의 적대적인 시선이 두려워진 반 고흐는 결국 생 레미의 정신병원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반 고흐, <노란 집>, 1888, 캔버스에 유채, 76x94cm,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반 고흐가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며 아를에 내려와 세 든 집이다. 대칭을 이룬 건물의 왼쪽은 식료품점이었고(상점의 어닝이 펼쳐져 있다), 오른쪽이 반 고흐가 쓰는 공간이었다. 1층에는 큰 방 두 개가 있어 작업실과 부엌으로 썼고, 2층의 방 두 개를 반 고흐와 고갱이 사용했다. 창 덮개가 열린 오른쪽 방이 고갱이 쓰던 방이었고, 창 덮개가 닫힌 왼쪽 방이 반 고흐의 방이었다. 고갱이 이 집에 머문 것은 불과 9주일간이었다. 둘은 다퉜고 결국 헤어졌다.

반 고흐, <붕대를 한 자화상>, 1889, 캔버스에 유채, 51x45cm, 개인 소장

불같은 성격으로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던 반 고흐는 고갱하고만큼은 잘 사귀고 싶었다. 반 고흐는 그를 동시대 최고의 화가로 생각했고 마음 깊이 존경했다. 고갱이 아를에 합류하자 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그와 함께 이상적인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꿈도 꾸었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견해가 달랐던 둘은 곧 갈등하기 시작했고 말다툼이 잦아졌다. 그러자 반 고흐는 고갱이 자신을 떠나리라는 생각에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고, 1888년 12월 25일 결국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자르고 말았다. 과다 츨혈이 있었지만 그는 붕대로 상처를 두른 뒤 자른 귀를 종이에 싸서 고갱과 자신이 잘 가던 사창가의 창부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 쓰러졌는데, 다음 날 경찰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그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원형적인 어머니 상을 보여준 룰랭 부인

룰랭 가족과 지낼 때 룰랭의 호탕한 웃음도 반 고흐를 편안하고 푸근하게 해 주었지만 룰랭 부인의 부드러운 미소 또한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넉넉한 풍채의 룰랭 부인은 평범한 외모였으나, 반 고흐는 그 평범함으로부터 성모의 자애와 관용 같은 것을 느꼈다. 반 고흐가 평생 동안 그린 인물화 가운데 가장 많이 그린 이가 바로 룰랭 부인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가 이 여인에게 얼마나 친근한 모성을 느꼈는가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를 사랑하면서도 어머니와 갈등하던 반 고흐. (반 고흐로 인해 얼마나 상심했는지 그의 어머니는 작은아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빈센트를 데려가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싶구나”라고 적기까지 했다.) 그런 그로서는 룰랭 부인에게서 원형적인 어머니의 상을 찾고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오른쪽 그림 속의 반 고흐의 어머니는 매우 당당하고 기품이 있어 보인다. 반 고흐의 눈에만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사람이었다고 한다. 반 고흐의 예술적 재능은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아마추어 화가였는데, 반 고흐가 미술에 눈을 뜨게 된 것도 어깨너머로 어머니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며 자란 턱이었다. 어머니는 꽃과 식물을 즐겨 그렸다. 특히 수채화를 잘 그렸다. 반 고흐의 소싯적 드로잉 중에는 어머니가 그린 꽃다발을 베껴 그린 것도 있다. ▶반 고흐, <어머니의 초상>, 1888, 캔버스에 유채, 40.5x32.5cm, 패서디나 노튼 시몬 미술관

그러나 반 고흐가 열한 살 때 기숙학교에 보내지면서 반 고흐는 어머니와 다른 가족과 헤어져 극심한 소외를 겪게 되었고, 이후 화상과 성직자로 자립하는 데 실패하면서 가족과의 긴장과 갈등이 커졌다. 기숙학교로 갈 때 얼마나 심적 고통이 컸는지 평생 그때의 고통을 잊지 못해 “내 어린 시절은 우울하고 춥고 황량했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그가 귀를 자르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머니도 반 고흐가 어릴 때부터 고통에 차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고는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네 형은 늘 아팠지. 그게 네 형과 우리 모두의 고통의 근원이었다.” 이 그림을 보노라면 반 고흐가 그의 어머니를 얼마나 우아한 분으로 생각했는지, 그러면서도 그런 어머니와 온전한 교감을 이루지 못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반 고흐, <자장가)>(룰랭 부인), 1889, 캔버스에 유채, 93x73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반 고흐가 룰랭 부인을 처음 그린 것은 발작으로 귀를 절단하기 며칠 전이었다. 이 사건 이후 룰랭 부인을 그리는 것은 반 고흐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보다 적극적으로 근원적인 어머니의 이미지를 찾게 된 것이다. 하지만 룰랭 가족이 마르세유로 떠나게 되면서 반 고흐는 이 그림 연작을 룰랭 부인 없이 완성하게 된다. 이렇게 그려진 <자장가> 연작은 모두 여섯 점으로 이뤄져 있다. 룰랭의 초상을 여러 점 그린 뒤 룰랭에게 한 점을 주었던 것처럼 룰랭 부인에게도 이 연작 가운데 한 점을 주었다. <자장가> 연작을 포함해 반 고흐가 그린 룰랭 부인의 초상은 모두 여덟 점이 넘는 것으로 파악된다.

위 그림 <자장가>에서 룰랭 부인은 꽃무늬 벽지를 배경으로 의자에 앉아 있다. 단정하게 포갠 그녀의 손에는 줄이 쥐어 있는데 이는 요람을 흔들기 위한 줄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발 앞에는 딸 마르셀의 요람이 있다. 아기가 등장하지 않는 이 그림에 ‘자장가’라는 제목이 붙은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이 그림을 통해 반 고흐는 말한다. 진정한 어머니는 자식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자리에 있어 주는 어머니다. 그저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는 어머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자장가를 좋아하는 것은 무엇보다 어머니가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끝없이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룰랭 부인이 쥔 끈은 단순히 마르셀의 요람에만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반 고흐의 영혼을 담은 요람에도 이 끈은 이어져 있다. 반 고흐는 지금 이 원형적인 어머니의 자장가를 들으며 편안히 행복하게 잠들고 싶은 것이다. 반 고흐는 이 그림 좌우에 <해바라기> 연작 두 점을 배치하고 싶어 했는데 그의 <해바라기>가 희망과 사랑을 상징하는 그림이라는 점에서 이 세 점의 배열은 한마디로 그가 꿈꾼 행복의 삼위일체라 할 수 있다.

<해바라기>, 1888, 캔버스에 유채, 95x73cm,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반 고흐가 <자장가> 좌우에 <해바라기> 그림을 배치하고 싶었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 폭 제단화를 염두에 둔 구성이다. 세 폭 제단화는 일반적으로 가운데 그림이 제일 크고 좌우의 그림이 가운데 그림보다 작은 형태로 제작된다. 가운데 그림의 주제는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나 성모자상 등이며, 좌우 날개는 성인들이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전통에 비춰볼 때 반 고흐가 세 폭 제단화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룰랭 부인을 성모의 위치에 놓고 보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색채 배치에 있어 룰랭 부인의 머리색인 오렌지색과 노란색이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이렇게 세 폭 그림이 이뤄지면 반 고흐는 그 세트를 자기를 떠나버린 고갱에게 주려고 했다. 1889년 5월에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 고흐는 자기의 구상을 스케치로 남겼다.

반 고흐에게 해바라기는 많은 의미를 지닌 꽃이다. 그가 일곱 살 때 교회 무덤에서 자기 이름과 똑같은 이름의 아이 묘비를 발견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태어나기 1년 전 태어나자마자 죽은 형의 묘비였다. 그 무덤가에는 해바라기가 피어 있었다. 훗날 반 고흐의 그림에 나타난 해바라기는 왠지 부활과 희망을 느끼게 한다. 특히 위 그림처럼 온통 노란색으로 충만해 ‘빛 위의 빛’을 느끼게 하는 그림은 더더욱 그렇다.

룰랭 가족이 마르세유로 간 뒤에도 애써 관계를 유지하고 지냈지만, 아무래도 한동네에 살 때처럼 친근하게 소통할 수는 없었다. 1890년 5월 반 고흐는 내과의사 가셰 박사가 있고 동생 테오도 가까이 지낼 수 있는 파리 인근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거처를 옮겼다. 반 고흐가 룰랭 가족과 계속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다면 어쩌면 자살에까지 이르는 불행을 맞지 않지는 않았을까. 반 고흐가 때로 혈연보다 더 가깝게 느꼈던 이웃 룰랭 가족. 이들을 모델로 세우고, 혹은 기억 속의 그 모습을 더듬어 가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만도 반 고흐에게는 무척 소중하고 행복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한겨레신문 미술 담당 기자를 지냈다. 학고재 갤러리 관장, 서울미술관 관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쓴 책으로는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지식의 미술관》,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등 30여 권이 있으며, 대중강연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기획물 전체>미술의 세계>테마로 보는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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