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논어 명언명구] 아대가자(我待賈者) -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린다

라라와복래 2015. 2. 22. 00:52

[논어 명언명구]

아대가자(我待賈者)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린다

과거의 응답 없는 세상과 오늘의 고용 없는 성장의 고통은 다르지 않다.

공자는 무너지지 않고 기다리는 자의 마음을 노래한다.

 

사람은 아동기를 거친 뒤 일정한 학습기를 통해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기량과 지혜를 갖춘다. 그렇게 힘겨운 터널을 통과한 뒤에 세상을 향해 기회의 문을 두드린다. 공자 시대는 신분과 관습의 벽에 막혀 능력이 있어도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오늘날은 기득권과 불황의 현실로 인해 온갖 스펙을 다 갖춰도 좋은 직장을 얻기가 쉽지 않다. 공자 시대나 오늘날이나 실력을 갖춘 이들은 100번 원서를 내고서 드물게 오는 연락을 기다린다. 그들은 ‘언젠가 연락이 오겠지!’라며 자신을 위로하지만,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자꾸 쳐다보며 초조해진다.

공자는 자신을 찾는 사람이 없자 마냥 흘러가는 시간을 기다릴 수 없었다. ‘이러다가 끝내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그를 엄습해 왔다. 공자는 50세 즈음에 조국 노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이상을 펼칠 기회를 얻고자 했다. 취업의 측면에서 보면 공자는 평생 구직자 신세였고, 일시적으로 정규직에 취업한 것을 제외하면 장기적인 실업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과 불안에 굴복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이상을 지키며 그 길을 걸어갔다. 홀로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을까?

<논어> 자한(自罕)편 13장

— 223번째 원문

자공이 공자의 속내를 떠보려고 물었다.

“선생님,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고 합시다.

그것을 궤짝 속에 고이 감춰두겠습니까,

아니면 제값을 쳐주는 상인을 찾아서 파시겠습니까?“

공자가 지체 없이 대꾸했다.

“팔아야지, 암 팔아야 하고말고!

나는 늘 제값을 쳐주는 상인을 기다리고 있네.“

자공(子貢)은 성이 단목(端木)이고 이름이 사(賜)로 공자보다 서른한 살이나 어렸다. 그는 공자학단에서 보기 드물게 국제무역에서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하고 언어 구사력이 뛰어나서 노나라의 군사적 위기를 해결한 외교가이기도 했다. 아마 그는 공자학단에서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성공한 인물이었다. 또한 자공은 공자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제자였다. 그는 기회를 찾지 못해서 마냥 기다리는 공자가 세상에 나서서 자신의 뜻을 일구려는 마음을 접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오늘날도 취업의 문을 계속 두드려도 열리지 않자 아예 취업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공은 공자의 대답을 듣고서 선생님이 여전히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능력 있는 외교가였던 자공(子貢)

온(韞)은 싸다, 감추다의 뜻이다. 독(匵)은 궤, 작은 상자를 가리킨다. 사(斯)는 이, 여기의 뜻이다. 장(藏)은 감추다, 품다의 뜻이다. 구(求)는 찾다, 구하다의 뜻이다. 賈는 값의 뜻이면 ‘가’로 읽고, 장사의 뜻이면 ‘고’로 읽는데, 여기서는 가로 읽는다. 고(賈)는 일정한 근거지를 갖고 하는 장사를 말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상(商)과는 다르다. 좌고행상(坐賈行商)이란 표현이 두 단어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고(沽)는 팔다는 뜻이다. 대(待)는 기다리다, 갖추다는 뜻이다.

공자, 소년 가장에서 노나라의 영웅이 되다

공자의 일대기를 그린 <공자성적도> 중 ‘직사위리(織司委吏)’. 공자는 평생 구직자였으며 곡식 창고를 관리하는 일도 했다.

후대 평가만을 보면 공자는 취업과 같은 문제를 고민하지도 않았고 넉넉한 생활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공자는 평생 구직자였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어머니와 먹고 살기 위해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고 했다. <공자성적도>를 보면 공자는 곡식 창고를 관리하기도 하고, 가축을 돌보기도 했다. 이러한 번듯한 일 이외에도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갖가지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공자는 편의점에서 밤늦은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또 다른 곳으로 달려가는 소위 ‘알바’ 청춘이었다. 즉 공자는 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나온 것이 아니라 ‘소년 가장’이었던 것이다.

공자가 서른 즈음에 학문적 성취를 이루면서부터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공자라는 이름이 일파만파 퍼지게 된 사건이 있었다. 기원전 500년 노나라 정공(定公)과 제나라 경공(景公)이 협곡에서 진행한 회담 자리에서 제나라 측이 큰 외교적 결례를 범하게 된다. 정공을 수행하던 공자는 불같이 화를 내며 경공에게 시시비비를 따졌다. 이에 제나라는 사과의 의미로 이전에 노나라에게 빼앗았던 땅을 돌려주었다. 공자 일생의 행적을 도해한 그림인 <공자성적도>에서는 이를 ‘협곡회제(夾谷會齊)’로 그리고 있다. 공자는 이 사건으로 인해 노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었고 그의 명성도 노나라를 넘어서 멀리 이웃 나라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나를 채용하다!

<공자성적도> 중 ‘직사승전(職司乘田)’. 공자는 요즘 같으면 소위 ‘알바’ 청춘으로 가축 돌보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했다.

공자의 외교적 성공은 역설적으로 그를 위험에 빠뜨렸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더 강한 개혁을 하고자 했지만 기득권 세력은 반대를 했다. 아울러 이웃 제나라는 공자가 노나라의 국정을 안정시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제나라는 방해 공작의 일환으로 여성 가무단[女樂]과 화려한 말[馬]을 노나라에 외교적 선물로 제공했다. 노나라의 집권층은 제나라의 가무단에 푹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또 국가의 공식적인 제례를 지키고 그 음식을 신하와 원로들에게 나누어주는 매뉴얼마저 지키지 않았다.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공동체 의식을 키우는데, 지배자들은 그것마저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공자는 조국 노나라에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하고 발걸음을 바깥으로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무려 15여 년간에 걸쳐 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예술로 세계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배려와 정의를 중시하는 정치를 하고자 했다. 하지만 가는 나라마다 공자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흔쾌히 공자에게 정치적 기회를 주지 않았다. 거듭되는 실패 끝에 공자는 “누군가 나를 쓴다면, 1년 만에 그럴 듯한 변화를 일구어내고, 3년이면 눈에 띄는 성과를 낼 텐데.”(苟有用我者, 期月而已可也, 三年有成. ―<논어> 자로(子路)편 10장)라고 말했지만 그를 찾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공자는 평생 동안 직업을 찾는 구직자 신세였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은 찾았지만 결국 얻을 수가 없었다.

공자는 구직에 실패했지만 그로 인해 무너지지도 않았다. 그는 한편으로 공동체가 자신을 써주기를 바라며 취업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바라는 길을 걸어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취업의 길만을 바라보았다면 공자라도 좌절했을 것이다. 그는 후자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자원을 찾았던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바라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매진하면서 다음 세대가 살아가야 할 밑그림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논어>의 세계이다. 이렇게 보면 공자는 누군가 자신을 채용하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채용한 것이다.

‘인정(認定)’을 위한 투쟁과 그 너머

평생에 걸쳐 실패를 맛본 공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대학의 입시나 취업 원서를 넣고 난 뒤에 합격자 발표일 날 컴퓨터로 확인할 때 마음이 웬만큼 단련된 사람도 마우스를 누르기가 두렵다. “축하합니다”라는 문구가 나오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물었던 마음의 생채기가 다시 아려온다. 불합격도 불합격이지만 준비한 만큼 인정(認定)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통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어>에도 사람이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도 그 욕망에 집착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주위 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할까 걱정하라!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논어> 학이(學而)편 16장

우리는 보통 “나는 타인을 잘 알지만 타인이 나를 제대로 모른다”라며 서운하게 생각한다. 이에 따르면 ‘나’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제대로 인정을 받는 셈이다. 하지만 후자의 ‘나’가 단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라고 한다면,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이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사람은 인정을 위한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상위 서열을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이기도 한다.

공자는 투쟁을 통해 ‘내’가 인정을 획득하는 길보다 “내가 먼저 상대를 인정하는”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내가 상대를 인정하면 결국 ‘모든 내’가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내가 관계하는 사람을 하나씩 하나씩 인정하면 나도 결국 상대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호 인정은 사람 사이에 지배와 복종이 아니라 협력하는 파트너십을 낳게 된다. 다시 말해서 상대를 나의 짝[配]으로 여기는[慮] ‘배려(配慮)’의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 누구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할 수 있다. 바로 공자 자신이 시대와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은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에는 인정 투쟁에 나서야 할까? 공자는 당대가 아니라 후대 또는 역사가 알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논어>의 첫 구절에서 의미심장한 선언을 한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군자답지 않겠는가?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이 ‘군자’는 예술의 천재, 미래를 기획하는 사상가처럼 당대에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좌절하고 자신의 길을 포기할 것이 아니다. 이 군자는 서태지처럼 음악이 좋아서 실패의 위험과 사회적 평판을 고려하지 않고 학교를 그만두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즉 군자는 인정에 목매지 않고 남들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남다른 사람’일 뿐이다. 공자가 구직의 실패와 시대의 냉대에 좌절했더라면 후대 유교 문화의 틀을 만드는 인물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국가의 공적 기능

<공자성적도> 중 ‘태산문정(泰山問政)’. 수레를 타고 제나라를 향해 가는 공자 일행이 태산에서 어느 여인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요즘 정치권에서 ‘기회의 문’을 넓히기 위해 낙수효과(落水效果, trickle down effect)와 분수효과(噴水效果, fountain effect, trickle-up effect)를 말한다. 낙수효과는 대기업과 고소득자의 소득이 늘어나면 투자가 많이 이루어져서 저소득층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논리로 분배보다 성장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하지만 이미 고용 없는 성장이 장기화되고 있는 만큼 낙수효과의 실효성도 떨어지고 있다.

분수효과는 대기업과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서 저소득층에게 복지정책을 펼치면 투자 증대로 이어질 수 있는 이론이다. 하지만 막대한 재원이 들어가는 복지는 재정적자로 이어지는 위험을 안고 있다. 공자는 낙수효과 분수효과를 말하지 않았지만 국가가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행복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사회구조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낙수효과나 분수효과 중 어떤 정책이 국가 경제를 선순환시킬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정책보다는 원론적인 차원에서 접근했다. 특히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던 만큼 국가적으로 국방, 건축, 행사 등 재정 수요가 많았다. 당시 지배자들은 증가하는 재정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손쉽게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거두는 방안을 강구했다. 아울러 세금을 감당하지 못한 백성들은 살던 곳을 떠나서 산에서 살거나 도망친 사람끼리 집단 취락지를 형성했다.

공자가 제자들과 태산(泰山)을 지나는데 한 여인이 무덤에서 목 놓아 울고 있었다. 그 까닭을 알아보니 딱하기 그지없었다. 산에서 사느라 시아버지, 남편, 아들이 차례로 호랑이에게 물려죽었다는 것이다. 공자는 여인이 왜 안전한 마을에 살지 않고 위험한 산에 살아서 화를 당하느냐고 물었다. 여인은 이곳에 세금, 부역 등을 부과하는 가혹한 정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공자는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가정맹호(苛政猛虎)”라는 말을 남겼다.(<예기(禮記)> 단궁(檀弓)편)

당시 국가는 백성들의 경제적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문제가 생기면 법과 권력의 이름으로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려고 했다. 공자는 당시 정치 지도자를 만나면 그들에게 반대로 국가가 백성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되물었다. 공자는 국가가 지배자 개인의 사치와 맹목적인 국가의지의 실현을 위해 백성들로부터 끊임없이 수탈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살 수 있도록 봉사하는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공공성을 잃어버린 국가는 또 하나의 수탈 기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를 비롯하여 유가는 국가가 수탈 기구로 떨어지는 것을 막고 공공성의 강화로 상생의 기구로 만들고자 분투했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인문과학>철학>동양철학  201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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