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7) 조선시대 시험과 출세

라라와복래 2015. 9. 12. 00:19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조선시대 시험과 출세

관료의 등용문, 과거제도의 명암

실학은 18세기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여전히 실체와 환상이라는 상반된 시각 속에서 실학을 바라보고 있다. 실학은 실패한 개혁의 꿈인가? 아니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고자 했던 학문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17명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개혁사상이자 문화사조로서 실학을 조명해본다.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기획: 실학박물관

조선시대 과거시험 재현

과거, 출세의 사다리

조선시대에 관료가 되는 방법은 과거(科擧)와 음서(蔭敍)가 있었다. 음서는 가문의 배경으로 관직에 나가는 것으로 문음ㆍ천거ㆍ특지 등의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과거는 출신과 관계없이 자신의 능력 여하에 따라 시험의 당락이 결정되었다. 음서는 가문의 배경으로 관직에 쉽게 나갈 수 있으나 정치 현안을 결정하는 핵심 관직에 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과거는 시험에 합격하기가 어렵지만 일단 합격하면 6품 이상의 당하관까지는 무난히 올라갈 수 있었고, 청직(淸職)과 요직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기에 과거 합격을 매우 영광스럽게 여겼다.

과거에는 문과ㆍ무과ㆍ생원진사시ㆍ잡과 등이 있었다. 문관이 되기 위해서는 문과를, 무관이 되기 위해서는 무과를, 통역관ㆍ의사 등 기술직 중인이 되기 위해서는 잡과를 치렀다. 생원진사시는 생원(生員) 혹은 진사(進士)라는 일종의 학위를 주는 시험이었다. 생원진사시는 관료 선발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생원이나 진사는 음서 후보가 될 수 있었고 사족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었다.

과거는 원칙적으로 3년에 1회씩 시행되었다. 동ㆍ서반 관료 선발을 위한 문과ㆍ무과는 3차 시험, 생원진사시ㆍ잡과는 2차 시험으로 각각 구성되어 있었다. 정기적인 시험 외에도 임금의 명으로 시행되는 비정기 시험이 있었다. 임금이 새로 즉위한 경우처럼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에 증광(增廣)이란 이름으로 과거가 시행되었다. 또한 임금이 성균관 문묘에 참배하러 갔을 때는 알성(謁聖), 혹은 왕실 혼인이나 왕비의 출산 등과 같이 왕실의 경사가 있을 때에 경과(慶科)로 별시 문ㆍ무과 혹은 정시 문ㆍ무과가 시행되었다.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시험(식년시)에는 합격 정원이 문과 33명, 무과 28명, 생원 100명, 진사 100명, 잡과 46명으로 정해져 있었다. 반면, 비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시험에는 문ㆍ무과는 정원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과거의 최종 합격자가 정해져서 합격자 명단을 발표한 후에 생원진사시나 잡과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백패를, 문과나 무과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홍패를 나누어 주었다. 문과ㆍ무과 합격자는 특별히 대궐에 들어가 임금과 종친,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서 홍패를 받았다. 일생에 한 번뿐인 영광스런 이 자리에 합격자의 부모와 친지들도 참관이 가능하였다.

이 예식이 끝난 후에는 합격자가 거리 행진을 하면서 시관ㆍ부모ㆍ친척 혹은 자신이 공부하였던 곳을 방문하여 축하를 받았는데, 이를 유가(遊街)라 한다. 유가 행렬은 맨 앞에서 길을 정리하는 사람, 그 다음 합격 증서를 드는 사람, 그 다음 악대와 광대, 그 다음 합격자가 말을 타고 뒤따른다. 유가는 보통 3일 동안 도성 안에서 이루어졌는데, 지방 출신 합격자는 고향의 마을 어귀에서 집에 이르기까지 유가를 하였다. ▶전(傳) 김홍도의 평생도 <삼일유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세의 지름길이 되는 과거시험은 문과였다. 『경국대전』에는 문과 합격자만이 서용될 수 있는 관서 혹은 관직이 정해져 있었다. 의정부의 당하관, 임금의 명령을 출납하는 승정원 당하관,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해야 하는 사간원, 임금의 앞에서 경서를 논하는 경연관, 임금의 자문을 담당하는 홍문관, 국왕의 교서를 짓는 예문관, 유생을 교육하는 성균관, 외교문서를 짓는 승문원, 국가 제사와 시호를 올리는 봉상시 등에 서용되는 관원은 반드시 문과 출신 문관이 맡게끔 되어 있었다.

업무상 혹은 정치적 하자가 없다면, 문과 합격자는 사다리를 올라가듯 이러한 관청의 관원을 차례로 거쳐서 재상인 의정의 자리에까지 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 재상을 지낸 사람은 총 364명 중에 문과 출신이 323명(약 89%)이다. 무과 출신 무관도 서반 당상관의 자리에까지는 승진하였으나, 종2품 대장이 최고 관직이었다. 문치주의의 나라 조선에서는 문과 합격자의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문과는 과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공정성 - 봉미ㆍ할봉ㆍ역서

조선에서는 과거를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법제적인 장치를 마련하였다. 문과나 생원진사시는 글을 짓는 제술 시험이기 때문에 공정한 평가가 관건이었다. 응시자의 익명성을 보증하기 위해서 봉미(封彌)ㆍ할봉(割封)ㆍ역서(易書) 등이 도입되었다.

봉미는 답안지 오른쪽 끝에 응시자의 인적 사항(이름, 나이, 거주지, 본관, 아버지ㆍ할아버지ㆍ증조할아버지ㆍ외할아버지의 이름과 관직)을 적은 피봉을 접어서 풀로 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채점 담당관이 피봉을 몰래 열어볼 수 있기 때문에, 봉미된 피봉 부분을 잘라내어 채점이 끝날 때까지 따로 보관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할봉이라고 하였다. 할봉을 할 경우에는 피봉과 답안이 혼동되지 않도록 답안과 피봉에 같은 번호를 적어 두었다.

또한 채점하는 시관이 필체나 답안지의 질 혹은 답안지 내의 표식 등으로 응시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답안을 서리들에게 모두 베껴 쓰게 하였다. 시관의 채점은 사본을 활용하게 하여서 시관과 응시자의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부정행위를 차단하였다. 이처럼 답안의 사본을 만드는 것을 역서라고 한다.

과거의 공정성을 유지하려고 한 것은 응시자의 출신이나 배경으로 관료를 선발하지 않고 개인의 능력에 바탕을 두고 관료를 선발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된 것이 있었다. 조선은 유학 사상을 정치 이념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유학 사상을 매우 중요한 도덕적 가치로 삼았다. 그러나 시험만으로는 응시자가 유학적 소양이 갖추어져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가 실학자의 과거 개혁론에서 항상 거론되었다. 실학자들은 응시자의 도덕적 인성을 검증하고, 게다가 공정하게 관료를 선발할 수 있는 방법을 언급하였다. 그러려면 관료 선발 방식을 바꾸는 것이 최선이지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 다음 차선책은 시험 방식을 시부(詩賦)나 표전(表箋)이 아니라 경의(經義)와 시무책으로 시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할봉(割封). 시권은 명지(名紙) 부분과 답안지 부분을 잘라내어서 시관이 응시자 신원을 확인할 수 없도록 하였다. 『고문서집성』 3, 해남윤씨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역서(易書). 역서된 답안지에는 ‘사동(査同)'이라고 씌어 있다. 『고전자료총서 82-2 광산김씨 오천고문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출세의 욕망이 부른 시험 부정행위, 과거시험장을 어지럽히다

과거가 최선의 입신양명을 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선비들은 과거 합격을 바라며 평생 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과거에 합격하겠다는 사람의 욕망은 부정행위를 자행하였다. 응시자의 부정행위는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험을 치르거나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대리 시험의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시험장에 응시자가 아닌 사람이 들어가서 시험을 치르게 하거나 병사들의 삼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시험장 밖에서 답안을 작성하여 시험장 안으로 들여보내기도 하였다. 시험을 관리하는 관료나 서리가 개입되기도 하였다. 시험을 주관하는 시관이 시험 문제를 유출하거나 할봉된 피봉을 빼돌려서 불합격자를 합격자로 둔갑시키기도 하였다.

다양한 방법의 부정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특히 시관의 친인척이 합격된 경우에는 사람들이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사돈방(子壻弟姪査頓榜)’ 혹은 ‘자질방(子姪榜)’이라고 비아냥거렸다. 1610년(광해군 2)에 시행된 비정기 문과에서 19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는데, 그중에는 시관의 친인척이 대거 합격하였다. 당시 시관은 좌의정 이항복(李恒福), 이조판서 이정귀(李廷龜), 형조판서 박승종(朴承宗), 호군 조탁(曺倬)ㆍ허균(許筠)ㆍ홍서봉(洪瑞鳳)ㆍ이이첨(李爾瞻), 승지 이덕형(李德泂) 등이었다. 이 시험에 박승종의 아들 박자흥(朴自興), 조탁의 동생 조길(曺吉), 허균의 조카 허보(許寶), 허균의 조카사위 박홍도(朴弘道), 이이첨의 사돈 이창후(李昌後)가 합격하였다. 이 내용을 기록한 사관(史官)은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시관들이 사사로운 술수를 부린 것으로 평가하였다.

부정행위 정도에 따라서 응시자의 과거 응시 자격을 정지하거나, 이미 합격하였다면 합격자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대리시험으로 인한 시험 부정이 심각해지자 법을 강화해서 변방의 군인으로 혹은 수군(水軍)으로 보내고 사면(赦免)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부정행위자를 서울과는 거리가 먼 변방의 군인 혹은 수군으로 평생 살게 하여 과거 응시는 생각하지도 못하게 하는 형벌이었다.

시험부정 사건은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처벌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시험 자체를 무효화하는 파방(罷榜)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하였다. 지방에서 치르는 1차 시험인 향시의 파방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특히 최종시험의 파방은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예를 들어 최종 문과시험이 무효화가 되면, 무과시험에 하자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함께 파방되어야 했다. 대과인 문과와 무과가 파방되었다면 같은 해에 시행된 소과인 생원진사시만 유효하게 둘 수는 없었다. 경제적 시간적 손실이 큰 최종시험의 파방은 되도록 자제하였으나, 그럼에도 파방된 적이 있었다. 최종 시험의 파방은 대부분 정치와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1519년(중종 19)에 실시된 현량과이다. 현량과는 조광조의 주장으로 실시된 과거로서 조광조 등의 사림파가 실각하자 파방되었다. 이렇듯 정치 세력 간의 갈등으로 몇 차례 최종시험의 파방이 있었다. ▶전(傳) 김홍도의 평생도 <소과응시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험장으로 몰려드는 인파, 화를 부르다

전란 이후 과거 응시생이 급격히 늘었는데, 그 이유는 자연적 인구 증가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17세기 이후로 과거를 통한 신분 상승을 꿈꾸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 갔다.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는 부류는 서얼과 그 후손이다. 이미 명종 때에 서얼 당사자들이 문과 응시를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서얼과 그 후손에 대한 제재 조치는 그 후 점차 완화되어서 인조 때에 서얼 자손들에게 문과 응시가 허락되었다.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서얼 당사자에게도 문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전란 이후 군인의 수가 크게 감소하자 인조는 군인의 수를 늘릴 방안을 강구하였다. 인조는 군역을 피해서 학교에 적을 둔 학생 중에서 가짜 학생을 색출하여 군역을 담당하게 할 계획을 세웠다. 학생이 군역 면제 대상이라는 점을 악용하여 학교에 이름을 올리고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았다. 군역에서 면제되려면 군역 대상자들은 양반이 확실하거나 학생임을 증명해야 했다. 양반이라는 증거는 4대조 이내에 6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이 있거나, 문과ㆍ무과 합격자의 자손이거나, 본인이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자라야 한다. 인조는 학생들에게 강서(講書) 시험을 부과하였다. 이 시험에서 떨어지면 군역을 담당해야 했다. 학생들은 각 지방의 수령이 주관하는 『소학(小學)』 강서 시험에 합격하고 증서를 받으면, 군역에서 면제되었다. 결국 군역을 면제받기 위해서 확실히 양반임을 증명하거나 강서 시험에 응해야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과거 응시를 더욱 부추기게 되었다.

전란을 겪으면서 무관의 부족을 메꾸기 위해 천인에게까지 무과 응시가 허락되었다. 그 이전에는 무과에서 28명의 합격자를 내었으나, 임진왜란 중에는 만과(萬科)라 하여 5천여 명을 선발하였다. 전란이 끝난 이후에도 무과 합격 인원은 복원되지 못하고, 1회의 무과에서 수백 명 이상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다. 무과 합격자 중에는 양반 자제도 있겠지만, 중인ㆍ평민ㆍ천민 등 다양한 계층이 섞여 있었다. 신분 상승을 꿈꾸거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중인 이하의 신분층에서도 기회가 되면 과거에 응시하고자 하였다.

과거 응시자의 급증을 가져온 또 다른 이유는 잦은 비정기 과거시험의 시행과 유생 과시의 확대로 과거 합격의 길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전란 이후에 관료 충원 목적이 아니라 백성을 위로한다는 명분하에 비정기 과거시험이 자주 실시되었다. 과거에 응시하기 어려운 지역인 제주도라든지 청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함경도와 평안도와 같은 특정 지역민만을 대상으로 비정기 과거가 시행되곤 하였다. 17~18세기에 시행된 비정기 시험은 312회로 16세기까지 행해졌던 비정기 시험의 170%에 달하였다. ◀전시직부첩. 『고문서집성』 8, 광주안씨 경주김씨 고문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또한 유생의 학업을 권면하기 위해서 성균관에서 시행한 유생 과시에 우등한 사람은 상으로 문과 복시(회시)에 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거나 문과 전시에 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이것을 직부(直赴)라고 한다. 문과의 최종시험인 전시에 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는 직부전시는 사실상 문과 합격을 주는 것이다.

지방 향교 학생이나 서울 사학(四學) 학생이 치르는 유생 과시에서 우등한 사람은 생원진사시 회시에 직부하게 하였다. 학생을 격려하여 국학을 진흥시킬 목적으로 시행했던 유생 과시가 17세기 이후에는 또 다른 과거시험으로 인식되었다.

잦은 비정기 과거시험과 유생 과시로 과거 응시 기회가 많아지자, 응시자들은 서울로 물밀듯 몰려들었다. 비정기 과거 중에서도 단 1회의 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알성시나 정시(庭試) 시험 때에는 먼저 시험장에 들어가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다가 압사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1686년(숙종 12) 4월 숙종은 성균관 문묘에 가서 작헌례를 행하고, 명륜당에서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일 예정이었다. 유생들이 모여들 것을 예상한 숙종은 명륜당의 서쪽 담장을 헐어 비천당의 바깥뜰과 통하게 하여 시험 장소를 확장하게 하였다. 당일 응시자들은 뜰 안으로 먼저 들어가려고 하다가 쓰러져 밟혀 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부상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숙종은 부상자 치료와 사망자의 휼전을 명하고 시험은 치르지 않았다.

10~20명 선발하는 과거시험에 수천 명씩 모여 들자, 법으로 정해진 시관ㆍ감시관 인원으로는 시험장을 제대로 관리하거나 채점이 세밀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더구나 중국과 같이 공원(貢院)이라 하는 과거시험장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뜰이 넓은 관청 마당에 삼삼오오 모여앉아서 시험을 치르니 시험장에서의 부정행위는 근절될 수 없었다.

성균관의 별당 비천당.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하여 과거를 시행할 때 시험장소로 사용되던 곳

성균관 명륜당. 성균관의 유생들이 글을 배우고 익히는 곳. 소과, 대과 시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실학자 성호 이익 과거 개혁을 논하다

조선 후기 잦은 비정기 과거시험과 유생 과시의 시행으로 응시자가 서울로 몰리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과거 폐단에 대하여 관료나 지식인들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실학자 성호 이익이 자신의 저술에서 밝힌 과거 개혁안을 잠시 들여다보자.

성호 이익은 본관이 여주이며, 명문 남인 관료 가문 출신이다. 증조부ㆍ조부ㆍ부친이 전부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다. 이익 자신도 1705년(숙종 31) 증광시에 응시하여서 1차 시험인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녹명단자가 격식에 맞지 않았다 하여 2차 시험인 회시에는 응시하지 못하였다. 이익의 아들 이맹휴는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남인 가문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승진이 쉽지 않았다. 이익은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당시 과거의 폐단에 대하여 고민하고 해법을 제시하였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관료로 합당한 사람을 선발하는 데 시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시험으로는 관료에 합당한 인격이나 자질이 갖추어져 있는지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검증된 사람들을 추천받아 그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이미 중국에서는 효렴과라는 이름으로 조선에서는 중종 때 현량과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지만 실패한 것이었다.

이익은 과거만으로 인재를 선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시험 횟수를 줄이고 시부(詩賦)나 표전(表箋)과 같은 문예 과목이 아닌 경의(經義)와 시무책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시(庭試)와 별시(別試) 따위도 창설한 지가 오래지 않은데, 함부로 합격되는 자가 한량없으며, 대비과(大比科)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읽고 외는 것만 숭상하니, 모두 용렬해서 아무 쓸모가 없다. 또 이른바, 절일시(節日試)ㆍ황감시(黃柑試)ㆍ사학시(四學試) 등도 옛날에는 없던 것이다. 과문을 공부하는 자로 하여금 손과 발이 줄곧 분주하여 쉴 겨를이 없게 하므로 글 읽을 틈이 없다. 그러므로 조정에는 경서에 능통한 자가 없어서 사풍(士風)이 날로 무너지니, 끝장에 가서는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익은 당대의 과거 폐단은 기본적으로 잦은 비정기 과거와 유생 과시의 실시에 있다고 했다. 응시자들이 공부가 영글지도 않았는데 계속 시험이 실시되니 요행을 바라고 부정행위가 난무한다고 보았다. 이익은 응시자들의 유학적인 소양이 성숙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5년 대비법(五年大比法)이다. 이것은 4년 동안은 경서 시험을 치르고 5년째 대책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이다. 경서 시험은 경서의 뜻도 모르면서 외우지 않도록 필답 형식으로 보는 것을 권장하였다.

이익의 과거 개혁안은 송나라의 유학자들의 생각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사실 조선은 건국 후 성리학 사상을 바탕으로 강서와 제술의 균형 잡힌 학업을 권장하였고, 식년시의 내용도 강서와 제술이 어우러져 있다. 그러나 제술만을 시험하는 비정기 시험이 잦아지면서 그 균형이 깨져버렸다. 유생 과시도 강서와 제술이 따로 있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시험을 치르기 때문에 강서와 제술을 겸비할 필요가 없었다. 이익의 과거 개혁안은 유학적 소양이 갖추어져서 그 자리에 합당한 인재 선발을 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과거는 객관성을 가지는 손쉬운 인재 선발 방법이었다. 그러나 성호 이익의 생각처럼 시험만으로는 유학적인 소양을 갖춘 도덕적 인재인지는 검증할 수 없었다. 전란 이후 국가에서는 꼭 필요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로한다거나 국가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많은 비정기의 확대는 시험을 통해서 출세해보려는 과거 응시생의 급증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수 있도록 과거시험 시스템이 개선되어야 했다. 많은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상용 시험장과 시관 확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과거제도는 점차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시험의 문제점을 보완하여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선발할 차선책이 없는 상황에서 갑오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이 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군국기무처. 갑오개혁의 중추적 역할을 한 기관

참고문헌

『경국대전』 권 1 사전(吏典), 경관직(京官職)

『성호전집』 권 44, 잡저 공거사의(貢擧私議)

『성호사설』 권 9, 인사문 주자론과시(朱子論科試)

『성호사설』 권 10, 인사문 고려시법(高麗試法)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2000.

원창애, 「조선시대 문과 직부제 운영 실태와 그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63, 2012.

원창애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 네이버캐스트>주제 전체>역사>한국사>조선역사 201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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