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슬퍼할 수 없는 것' - 이성복

라라와복래 2010. 8. 24. 23:09
 

 

 

 

슬퍼할 수 없는 것’

이성복

 

머리도 심장도 아닌 온몸을 던져 시를 쓰는 길 끝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

 

이 글은 <세계일보> 2009년 3월부터 2010년 2월까지 1년 동안 25명의 시인들을 찾아가 쓴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연재 중 마지막 편입니다.

 

길을 떠난 지 한 해가 되었다. 만나고 싶은 이들을 두서없이 찾아다녔다. 길 위에서 여러 시인을 만났고 좋은 시들을 읽었다. 이제 그 끝에 이른 것인데, 더 만나야 할 시인은 하염없지만 그래도 그 길 끝에서 꼭 만나야 할 것 같은 ‘무거운’ 이가 이성복(58) 시인이었다. 이성복 시인을 두고 무겁다고 한 것은 ‘시인세계’에서 국내 시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인을 꼽는 설문조사(2005년)를 한 결과 서정주 정지용 백석 김수영에 이어 다섯 번째로, 생존 시인으로는 유일하게 그이가 꼽힌 게 상징적인 이유다. 설문조사야 그때그때 사회문화적인 조건이나 문항 설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 그리 믿을 만한 게 아니라 쳐도, 한국 현대시를 거론할 때마다 비평가나 시인들까지 늘 빼놓지 않고 그이를 거론해온 마당이다. 정작, ‘생존 시인’ 이성복에게 이런 사랑과 찬사는 내내, 굴레였던 것 같다.

 

대구시 황금동 집필실 앞 야산에 오른 이성복 시인.

마를 대로 마른 참나무 곁에서 시인이 짓고 있는 맑고 슬픈 표정이란, 서럽다.

 

누이가 듣는 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地下의 잠, 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伐木당한 女子의 반복되는 臨終, 病을 돌보던 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者는 누구인가 日本인가, 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정든 유곽에서’ 부분)

 

서울대 불문과 4학년 시절, 이성복의 스승이었던 작고 평론가 김현이 <문학과지성>에 추천해 ‘정든 유곽에서’로 등단한 이래 그는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내면서 1980년대 시단에 분명한 지분을 확보한 시인으로 각광받았다. 80년대 시인들은 대부분 ‘미학’과 ‘구호’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방황했음에도 다수는 관념보다는 현실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폭압적인 조건에 놓여 있었다. 이성복은 이 조건 속에서 드물게 현실을 ‘유곽’의 무대로 세팅하는 인문적 은유로 나아갔고, 그것은 그 시대를 지나서도 생존하는 문학의 생명을 얻었다. 그는 그때 ‘유곽’이야말로 한 사회의 정신적 병증을 가장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는 ‘세트’였다고 말했다.

 

대구시 황금동, 집필실이 있는 빌라 앞 슈퍼에서 그를 만나 인근 야산으로 향했다. 참나무들이 마를 대로 말라 바스락거리는 산길에서 하오의 석양에 짙은 음영으로 빛나는 그이가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파인더 속의 그이는 거의 완벽했다. 이순을 목전에 둔 나이답지 않게 젊고 예민한 표정이다. 그는 사진을 찍히면서 아들의 평가를 빌려 자신이 “섬세하고, 열정적이고, 어린애 같고, 못 참고(좋은 거든 나쁜 것이든), 잘 삐지는” 5가지 기질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이가 어설픈 질문을 못 참거나 삐질까봐 미리 두려웠다.

 

촬영을 마치고 내려와 그의 집필실 연립주택 2층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부터는 설치미술의 향연이었다. 우아한 시인의 작업실치고는 초라한 날림집 외관이어서 그다지 기대를 하지 못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산스크리트어로 장식한 경구에서부터 시인이 산책을 나갔다가 무심히 주워 왔다고 하는 다양한 폐품들이 산과 새와 성채로 변신해 좁은 거실을 우아하게 장식하고 있다. 그이는 자신이 ‘설치미술가’로 거듭났다면 성공했을 거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유난히 추위와 더위를 많이 탄다는 그이의 겨울 집필방과 여름 집필방이 그 좁은 연립의 집필실에 따로 있었다. 주로 경리를 담당하며 가계를 꾸렸던 아버지가 물려준 ‘주판’이 책상머리에 놓인 여름방과, 그 방에서 언젠가 돈황 여행을 떠났다가 사 온 위구르족 무덤을 지키는 두상을 설명하다가, 드디어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눌 좁은 겨울방으로 들어섰다. 전기장판이 따뜻했고 공기도 안온했다.

 

비 오는 날 우산 받쳐들고 산에 오르면

산은 흘러내리는 빗물 제 혀로 핥고 있다

그리움이나 슬픔 그런 빗나간 느낌도 없이

산은 괴로움에 허리 적시며 젖고 있다

죽어가며 입가에 묻은 피를 제 혓바닥으로

핥는 짐승처럼, 그 산 내려오다 뒤돌아보면

산은 제 괴로움에 황홀히 피어나고 있다

오직 스스로를 항복받지 못했기에, 세세 영원토록 제 괴로움 홀로 누리는 산

(‘죽어가며 입가에 묻은 피를’)

 

 

낡은 연립주택 2층 겨울 집필방에 들어선 이성복 시인.

산책로에서 주워 온 모든 게 그이에겐 새로운 의미를 지닌 활물로 다시 태어나 배경이 되어준다.

 

그가 그 겨울방에서 나눈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 시로 대변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직 스스로를 항복받지 못했기에 세세 영원토록’ 괴로워하는 사람. 그는 젊은 시절에는 사회의 축도로 ‘유곽’을 상정했지만, 지금 그 유곽이란 바로 생 그 자체라고 했다. 그는 경북 상주에서 2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스스로 야심을 세워 서울로 가서 공부할 것이라고 집안에 선언을 한 뒤 단식까지 불사하여 상경한 뒤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가 정치로 나아가 출세하려는 야심을 세웠다. 그가 서울로 오자 누이와 부모까지 줄줄이 상주에서 서울로 거처를 옮긴 것인데, 지금은 그 혼자 다시 대구에 내려와 살고 있는 형국이다. 서울에 올라간 그의 야심이 어쩌다 ‘출세’를 비켜나 철학으로, 다시 문학으로 불붙어 버렸고, 서울대 불문과에 들어가 김현 평론가 눈에 띄어 문운으로만 따지자면 승승장구,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거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굴곡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것 같다고 물었더니 그는 “돌아보면 순간순간 육체적으로나 심리적 혹은 사회적으로 위험할 때가 아주 많았다”면서 “조금만 어쨌으면 거의 잡놈으로 낙인 받거나 물에 빠져 죽었거나 했을 고비들이 있었는데 잘 지나갔을 뿐이다”고 다소 과격하게 답했다.

 

나는 세월이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곱게곱게 자라왔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들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그 어려운 수업시대, 욕정과 영웅심과

부끄러움도 쉽게 풍화했다 잊어버릴 것도 없는데

세월은 안개처럼, 취기처럼 올라온다

(‘세월에 대하여’ 부분)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보다도 문학에 임하는 ‘태도’ 같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스승으로 김수영을 꼽았다. 정작 김수영의 문학보다도 그이가 문학을 대했던 태도를 이성복은 더 높이 사고 있다. 그는 김수영의 산문 중 자신의 시작을 경종하는 문구를 따로 타이핑하여 비닐로 코팅해서 책상머리에 늘 회초리처럼 놓아두고 있었다. 그 회초리의 문구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이런 문구들을 모두 아우르는, 이성복이 선택한 김수영의 마지막 문구는 “우리는 아직도 문학 이전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가 문학을 향한 절대적인 순교의 자세를 지향해야 한다고 인터뷰 내내 강조했던 것 같다. 우리가 지금 구사하는 문학이란, ‘문학 이전의 문학’에 불과하다는 외침이었다. 그는 스스로 절대 자신이 이루어 놓은 문학에 승복하지 못하는 불행한 존재였다. 한 번도 행복해질 수 없는, 그에게 문학의 세례란 저주받은 행복인 셈이다. 그는 말미에 시보다는 산문, 도저한 에세이에 서사를 잠시 얹는 그런 문장에 최근 빠져들었노라고 고백했다. 그가 겨울방에서 보여준 미발표 서사를 얼핏 보니 그의 자의식이 선명하게 잡힌다.

 

-지난 삼십년의 허송세월은 “나는 시가 싫어요” 하고 광고하고 다니는 글쓰기의 연속이었다. 비록 이 또한 과장된 표현임이 틀림없지만 문제는 시가 싫다는 자기 과시행위의 빌미로 씌어졌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가 쓴 대부분의 산문은 “나는 왜 시를 쓰지 못했는가”라는 물음의 변주로 이루어졌으며… 무능력을 미화시키는 데서 은밀한 기쁨을 즐겨왔다.-

 

마라, 네 눈 속에 내가 뛴다

내 다리를 묶어다오

내 부리가 네 눈 마구 파먹어도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마라

안간힘으로 벌려다오

갑각류의 연한 내장을 찢는

맹금류의 내 부리를

내 몸 전체가 독이라면,

내 몸 전체가 전갈류의 독주머니라면

넌 믿겠니, 나를 믿지 마라

(‘내 몸 전체가 독이라면’)

 

이성복은 슬퍼할 수 없고, 슬퍼할 수조차 없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상황은 가령 풍뎅이 같은 것이 한 번 엎어지면 오만 발버둥을 쳐도 일어나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 혹은 ‘닥터 지바고’에서 오마 샤리프가 눈속에서 입을 벌려 멀리 지나가는 가족들을 부르지만 소용이 없듯이, 입이 있어도 그 입이 아무 소용 없는 가엾은 것들의 슬픔에 대해 그날, 대구의 밤에, 내내 말했던 것 같다. 그는 근년 자신이 가장 애착이 가는 시는 ‘슬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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