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한국 문단의 `영원한 자유인` 황석영

라라와복래 2010. 7. 19. 09:13

 

 

 

한국 문단의 `영원한 자유인` 황석영

 

한국의 작가 황석영과 노벨 문학상을 받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가 사석에서 만났다. 황석영이 귄터 그라스에게 던진 첫마디는 "너 누구냐(Who are you)?"였다. 물론 황석영은 귄터 그라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행사장에 있던 세계 각국 작가들이 귄터 그라스 앞에서 굽실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심사가 편치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 인연으로 귄터 그라스는 지금도 황석영을 '후 아 유'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이것이 작가 황석영(67)이다. 세상 어느 것에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을 걸어온 작가 황석영은 한국 근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았다. 만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다시 찾아온 조국에서 전쟁을 맞았고, 해병대 시절엔 베트남전에 참전해야 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앞장섰으며, 당국의 허가 없이 방북했다 독일에서 망명생활을 했고, 조국에 돌아와서는 옥살이를 해야 했다.

 

황석영이 최근 한국 근현대 자본주의의 속내를 다룬 소설 '강남몽'(창비 펴냄)을 펴냈다. 비 내리던 지난 금요일(16일) 그를 매일경제신문편집국에서 만났다.

 

―'강남몽'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강남에 산 적이 있는지.

 

▶난 청소년 시절부터 오랫동안 영등포에 살았다. 그래서 그쪽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살 곳이 못 됐다. 거의 하천둔치와 모래땅이었고 전기가 안 들어오는 곳도 많았다. 그랬던 곳이 지금의 강남이 된 거다. 강남은 한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땅이다. 강남 개발 과정에는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이 응집돼 있다.

 

―소설을 보면 실존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당연하다. 이 소설은 거의 다큐 소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기자처럼 취재했다. 비교적 근래에 있었던 일이 소재라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써야 했다. 근대사 자료는 가지고 있는 게 많아서 큰 어려움이 없었고, 최근 10여 년 이내 자료는 일일이 찾아 모았다.

 

―트위터도 하는데 젊은이들과 소통하고 싶어서인가.

 

▶젊은이와 소통한 게 아니라 세상과 소통한 거다. 프랑스 르몽드에서도 "한국에서는 황석영 같은 원로작가도 인터넷에서 젊은이들과 소통한다. 프랑스 작가들도 배워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온 적도 있었다. 소통은 작가의 책무다.

 

내가 텔레비전 오락프로인 '무릎팍도사'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주변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다. 하지만 난 나갔다. 방송이 나간 후 젊은 사람들한테 연락이 많이 왔다. 진지하고 무겁고 야단만 치는 노인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젊은이들이 내 새로운 독자가 된 거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는데 후회하지는 않는지.

 

▶작가라는 게 워낙 그런 업(業)을 타고나는 것 같다. 그런 파란이 다 작가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오히려 쟁점을 찾아다니고 만들고 하는 게 작가다.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게 몇 살 때였나.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대구로 피란갔다가 돌아왔는데 집이 반파되어 있었다. 잔해를 뒤져 살림살이를 찾아내고, 덜 무너진 데 식구들이 몰려 자고 했다. 그 이야기를 작문으로 썼더니 상도 받고 신문에까지 나오고 그랬다. 그게 아마 처음 세상에 내 글을 내보낸 일이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으면 '작가'라고 대답했다.

 

―서슴지 않고 사회적 발언을 하는 편인데 대한민국이 잘 가고 있다고 보는가.

 

▶워낙 삐걱삐걱하면서도 잘 굴러온 나라인지라 잘되겠지만 걱정은 된다. 편 가르기가 너무 심화됐다. 정치인들은 편 가르기 하는 게 무슨 자신들의 존재가치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종종 네티즌들한테 비판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명박 대통령하고 유라시아 순방을 같이 갔을 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 온 몽골과의 '알타이경제문화대연합'에 대해 이 대통령이 동의했던 것이다. 정권 초기 중도실용을 표방하면서 대북관계를 진전시킨다고 했기 때문에 믿었던 부분도 있었다. 이제는 거의 흐지부지됐다. 천안함사건이 터지면서 더욱 힘들어진 것 같다.

 

―'알타이연합'에 집착했던 이유는.

 

▶우리 민족은 지금은 작은 땅에 갇혀 살지만 대륙을 호령하던 유목민들이었다.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진다. 몽골은 우리 기술이나 개발경험을 필요로 하고, 우리는 몽골의 자원과 토지가 필요하다. 통일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좁은 땅에서 감정싸움을 하는 이상 통일은 요원하다. '알타이연합'에 북한을 끌어들이면 자연스럽게 감정이 해소될 수 있고, 명분도 유지할 수 있다.

 

―그때 비난도 많이 받았는데.

 

▶변절자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건 좀 심했다. 나는 어느 특정 정치집단에 충성을 바친 적이 없다. 작가는 독립된 사람이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문학인은 그래야 한다. 비난도 생각보다 쉽게 사그라졌다. 아마 대중이 나의 순수성을 알았던 것 같다. 내가 뭐 내 욕심이나 정치적 욕망 때문에 그랬겠냐. 그리고 나이를 먹으니 많은 걸 이해하게 된다. 웬만한 비난은 신경 쓰지 않는다.

 

사실 여당이고 야당이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이)재오나 (김)문수하고도 친하고 손학규, (이)해찬, (김)근태하고도 친하게 지낸다. 그게 나다(황씨는 이들을 지칭할 때 직함을 안 붙였고, 성을 빼고 이름만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의미다).

 

―1990년대 후반 북한에 꽤 오래 머물렀는데

 

▶김일성을 22번 만났다. 한번은 김일성이 내게 북한의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관절이 없는 사회'라고 대답했다. 그만큼 경직된 사회라는 의미였다. 심장에서 벌어지는 일이 사회적 완충장치 없이 곧바로 발끝까지 전달되는 병영 같은 사회였다. 시간이 더 지나면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것이다.

 

―문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당대에 충실하고, 시대와 함께 완전무결하게 소멸하고 싶다. 비장한 각오는 아니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농담 삼아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국 현대문학은 곧 김수영과 황석영이다. 이렇게 기록됐으면 좋겠다고. 시인 김수영을 좋아한다. '사상계'로 문단에 처음 나왔을 때 명동 돌체 다방에서 그 양반 담배 심부름 했던 기억이 난다.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성격이 좀 느긋해졌다. 그전에는 급하고 그랬는데 너그러워졌다. 일이 생기거나 그러면 옛날에는 즉각 반응했는데, 요즘엔 몇 박자 늦게 반응한다. 사람들과 무엇인가를 할 때 서너 걸음 비켜 서서 따라간다. 그게 나잇값인 것 같다.

 

―종교에 대한 관심은 없는지.

 

▶집안은 개신교인데 난 종교가 없다. 앞으로도 종교를 믿고 싶지는 않다. 만약 누가 권총을 가슴에 갖다대고 종교 안 믿으면 죽인다고 하면 그때는 불교를 선택하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가장 정서적으로 느낌이 오는 종교는 불교다.

 

―대표작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은.

 

▶지나간 작품 중에 예쁜 자식은 없다. 지금 자식이 가장 예쁠 뿐이다. '삼포 가는 길'을 썼을 때는 그게 대표작이고, '장길산'을 썼을 때는 그게 대표작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강남몽'이 내 대표작이다.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면 '강남몽'도 잊어버릴 것이다.

 

―자녀들 얘기를 잘 안 하는 편인데.

 

▶큰아들(호준)은 유명한 작곡가다. 국악에서 재즈까지 넘나드는 예술가다. 딸(여정)은 음악에 재능이 있는데 지금은 출판사에 다닌다. 막내(호섭)는 미국 컬럼비아대학 박사과정에 다니고 있다.

 

■ He is…

 

작가 황석영은 1943년 만주 창춘(長春)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평양을 거쳐 영등포에 정착했다. 6ㆍ25 때는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경복고등학교를 다니다 자퇴하고 가출해 남도지방을 방랑했다.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1962년 '사상계'에 단편 '입석부근'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66년 해병대에 입대해 복무하던 중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베트남에서 돌아와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해 군사정권에 맞섰다. 전라남도 해남ㆍ광주에서 문화운동을 하다가 광주민주화 운동을 겪었고, 그때 일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으로 세상에 알렸다.

 

1989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초청으로 방북했다. 방북 이후 1993년까지 베를린 뉴욕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했으며, 돌아와서는 5년 동안 복역했다. 대표작으로 '삼포가는 길' '한씨연대기' '장길산' '무기의 그늘' '손님' '오래된 정원' '돼지꿈' '개밥바라기별'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매일경제 허연 기자ㆍ정아영 기자 / 사진 이승환 기자 / 입력 2010.07.1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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