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이틀
안재찬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길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낯선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울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아가미를 가진
저 아이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까지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 뒤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더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가닿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그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개들이 춤추며 밀려온다 해도 나는
소나무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구월이 되면 한번쯤은 떠올리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안재찬은 류시화의 본명입니다. 위 시는 안재찬이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하던 1981년에 동인시집 <그리고 우리는 꿈꾸기 시작하였다>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안재찬은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생활’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으며 한동안 명상 계통 책 번역과 출판 기획자 일을 하였으며 이때 류시화라는 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지구별 여행자> 등의 베스트셀러를 냈으며, 1991년 첫 시집 <그대가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1996년 두 번째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2012년 세 번째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을 냈습니다. 라라와복래와는 편집자와 필자로 함께 일을 한 인연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