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용재 오닐 "완벽한 연주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느낌"

라라와복래 2018. 6. 16. 02:51

용재 오닐 "완벽한 연주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느낌"

글: 김지수(대중문화 전문기자)


음악과 삶의 통합을 이뤄내는 비올리니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40세). 그가 2007년 결성한 클래식 앙상블 ‘디토'가 11주년을 맞았다.

언젠가 성가정입양원에서 입양을 기다리는 아기들을 돌보는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 침대에 누운 아기들은 젖병을 입에 물고도 다급하게 울어댔다. 어떤 울음은 날카로웠고 어떤 울음은 애처로웠다. 저녁이 되자 한 봉사자가 전등의 조도를 낮추고 나지막이 노래를 불렀다. 어둠의 혈관을 타고 오는 노랫소리에 마법처럼 울음이 잦아들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파도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배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평화로운 숨소리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용재 오닐이 ‘섬집 아기'를 연주할 때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날의 아기들을 생각했다. 좌표 없이 세상에 던져져 갈피없이 헤매던 울음과 그 울음을 탯줄처럼 감아 끌어 앉히는 현의 울음을. 용재가 켜는 비올라의 소리는 바이올린과 첼로의 중간쯤의 소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쓸쓸하고 다정한 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그것은 어머니의 소리 같기도 하고 아이의 소리 같기도 하다.

6·25 전쟁고아로 미국으로 입양된 그의 어머니는 어릴 때 열병으로 지적장애를 앓았고, 미혼모로 그를 낳았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그는 '어머니의 나라'를 몰랐다. 할머니가 김치를 담가주긴 했지만, 한국말은 한 마디도 못 했다. 미국 워싱턴 주에 있는 작은 마을 세큄(Sequim)의 오두막집에서, 할아버지 페리 오닐은 2005년 타계할 때까지 TV 수리점을 꾸려가며 36명의 입양아를 보살폈다.

용재의 비올라 소리에는 이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나는 그가 연주하는 ‘섬집 아기'와 그가 연주하는 ‘쇼스타코비치'를 사랑한다. 그의 연주에는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져 탱고를 추는 것 같은 낙천성과 용기가 가득했다. 그의 비올라 소리는 태풍이 몰아치는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처럼 멀리 나아갔다가 인내심 있게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받은 도움만큼 도움을 되돌려 주기 위해 음악을 한다”고 했다. “비올라는 나의 목소리”라고 했는데, 실제로도 현악기의 질감이 성악의 질감으로 표현되곤 했다.

2007년부터 UCLA교수, 2008년부터 링컨 센터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 정식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용재 오닐. 그가 이끄는 앙상블 디토와 디토 페스티벌은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클래식 프로젝트로 자리잡았다.

리처드 용재 오닐을 만났다. 가늘게 찢어진 눈과 따스한 갈색 동공, 아이 같은 들창코와 선명하게 각이 진 고집스러운 턱에서 철학자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2001년, 미 줄리아드 음악원의 강효 교수가 이끄는 실내악단 세종 솔로이스츠의 멤버로 처음 한국에 왔던 청년 비올리니스트가 벌써 마흔이 됐다. 서울의 롯데콘서트홀과 안산의 공연장에서는 그가 2007년에 결성한 실내악 앙상블 디토의 페스티벌 공연이 한창이었다.

“낙태될 수 있던 생명, 어머니의 모성애가 나를 살렸다"

—당신이 연주하는 ‘섬집 아기’는 정말 특별해요. 나는 들을 때마다 매번 눈물을 흘립니다. 연주하면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엄마가 아기를 재울 때 불러주는 노래가 ‘섬집 아기’라면서요? 아시다시피 제 엄마는 평범하지 않아요(웃음). 신체장애를 앓아서 말소리도 어눌했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엄마의 언어를 배울까 걱정하셨고 그래서 밤마다 우유 한 잔을 떠놓고 책을 읽어주셨어요. 주로 그 시간을 떠올리며 연주해요. 나는 엄마가 아니지만(웃음), 바다같이 그 넓은 마음을 읽어서 표현하려고 하지요.”

—모성애가 강한 편이군요.

“그런가 봐요(웃음). 케냐에서 만났던 한 엄마를 생각하며 연주할 때도 있어요. 5명 아기를 다 먹이지 못해 1명을 포기하면서 구슬프게 울었던 게 잊히지 않습니다. 저는 박테리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많이 아파요. 세상이 정글이라 모성애도 도전받고 있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모성애 덕분이에요. 낙태될 수도 있는 생명이었는데 어머니가 나를 지켜줘서 이 자리에 있는 거죠.”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굿. 아주 잘 지내요.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어머니는 20년 전에 만난 파트너 빌과 잘살고 있어요. 작은 마을 식당에서 청소 일을 하고 계세요. 정부에서 주는 일자리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서 자립하고 싶어 하시죠. 요즘엔 월마트 캐셔 일을 하고 싶어 하는데, 저로선 더 넓은 사회에 나가 혹시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면도 있어요(웃음).”

—실례지만 아버지의 빈자리에 대한 결핍은 없습니까?

“아버지가 있었다면 같이 운동한 것 같은 추억을 들려드릴 수 있었겠지요. 그런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없어서 아쉬운 정도예요(웃음).”


악기 가방에는 소중한 사진을 넣고 다닌다. 링컨 센터 이사회의 엘리자베스 여사,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케냐 나이로비의 슬럼가와 거기서 만난 사람들.

—내 존재의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나요?

“저는 본의 아니게 삶이 자주 바뀌는 환경에 놓였어요.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동시에 하루하루가 큰 기회라고 느꼈어요.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누구를 도울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 뿌리를 파고들기보다 나라는 나뭇가지가 여기까지 뻗어 온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하루를 낭비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

—음표를 좇는 음악가라기보다는 사명을 좇는 신학자 같군요.

“글쎄요.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부재했고 그래서 삶의 갈피마다 나를 도와준 다양한 친구들이 있었어요. 엘리자베스 선생(링컨센터 이사회 일원이자 예술단체 후원자)도 그중 한 분이죠. 그분께도 많이 배웠어요. 현실을 구조화해서 그 안의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보듬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나는 지금 당신이 한 명의 클래식 연주자라기보다는, 우리 시대의 ‘위로자' 같다는 생각을 해요. 당신의 과거, 당신의 현재, 그리고 당신의 연주, 당신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를 감동시키죠. 특히 안산의 ‘헬로 오케스트라' 24명의 다문화 아이들을 이끄는 활동은 특별해요. 당신도 미국에서 그들과 같은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았죠. 놀라운 건 운명으로 엮인 존재는 어떻게든 만나서 서로 도움을 준다는 겁니다. 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어요. “너는 달라. 그게 네 잘못은 아니야. 나도 그랬어. 내가 내 가족에게 배운 건 삶은 특별하다'는 사실이야"라고요.

“맞아요. 솔직히 아이들에게 시간을 더 쓰고 싶어요. 완전히 목표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초등학생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죠. 경제적인 것, 대학 입시, 아르바이트… 내가 부모가 아니니 그 아이들 삶에 전적으로 관여할 수 없어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도 혼자 스스로 헤쳐 나가도록 그 방법을 찾아주고 싶은데… 쉽지 않아요. 조부모와 사는 아이도 있고,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없는 게 가장 안타까워요.”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 같군요.

당연하지요. 저는 비올라 연주자예요. 비올라는 중간자예요. 바이올린의 고음부와 첼로의 저음부 사이에 있어요. 양쪽 입장에서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어떻게 도와줄까를 연구하죠. 타인의 입장에서 그들의 느낌을 받아들이면 내 내면의 소리도 깊게 성장합니다. 감정이입과 공감은 저의 본능이에요.”

—동요, 판소리, 가요… 장르 불문하고 즉석에서 멜로디를 듣고 비올라로 연주하는 걸 봤어요. 절대음감은 공감 능력과 연관이 있는 것 같네요.

“제 생각도 그래요. 잘 들어야 잘 표현할 수 있어요. 제가 멤버로 있는 미국의 현악 4중주단 에네스 콰르텟 연주자들도 공감 능력이 탁월해요.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는 그룹을 만나면 내 삶도 도전이 되지요.”


그는 오랫동안 마라톤으로 몸을 단련했다.

연주자는 무대에서 본인은 사라지고 음악만 남아

많은 음악가가 음악적으로 이룬 통합을 일상의 삶으로 가져가는 데 실패한다. 현실에서 괴리된 채 그저 음악 세상에서의 삶, 연주와 기립 박수와 앙코르 그리고 비행기와 호텔의 나날을 사는 것이다. 나는 삶의 남루에 오염될까 봐 자신을 현의 세계에 유배한 채 살아가는 천진난만한 천재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의 음악 세계는 갈수록 편협해진다. 용재 오닐은 반대다. 그는 자신이 음악의 해석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불운을 행운으로 통합하는 그의 천부적 능력이 그를 비범한 비올리스트로 만든 것 같기도 하다. 비올리스트로서 그는 최초로 줄리아드 음대의 아티스트 디플로마 과정에 입학했고, 2006년 미국 클래식계 최고 권위의 에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상을 받았다. 2집 앨범 '눈물'이 국내 클래식 음반 판매 1위를 기록했고, 3집 '겨울 여행'은 발매 1주일 만에 7000여 장이 팔리는 기록을 세우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2006년 클래식 아티스트의 영예인 에버리 피셔 상을 받을 때는 어땠나요?

“지금도 비올리니스트가 많지 않지만 그때는 더 흔치 않았어요. 에버리 피셔 상은 제가 뉴욕에 이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받았어요. 당시 뉴욕은 제게 거칠고 무례한 도시로 다가왔습니다. 돈이 없어서 17달러짜리 지하철 사용권도 못 샀어요. 줄리아드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이 됐는데, 생활비가 없어서 친구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곤 했죠. 돌아보면 그때 친구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제가 있어요. 그 이후로 제 인생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2007년 디토를 시작했고 그래미 어워드 후보가 됐고 UCLA 교수가 됐죠. 제 인생의 큰 흐름은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는 거예요. LA의 집에 가도 저는 물건이 없어요. 친구들에게 다 나눠 주거든요. 죽을 때 주머니에 넣어 가는 건 돈이 아니라 추억이에요(웃음).”

—디토의 멤버들은 어떤 방식으로 초빙합니까?

“내가 존중할 수 있는 사람들이죠. 솔로, 실내악,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롤을 소화할 수 있는 연주자들입니다. 경연에서 이기기 위해 연주를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작곡가를 이해하고 전체에서 부분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지요.”

—당신만의 연주 방식이 있나요?

“기술적인 것은 많이 생각하지 않아요. 머리와 가슴이 조화를 이뤄내는 하모니를 상상합니다. 사실 작곡가의 대곡을 허물고 맞출 때 굉장히 힘들어요. 연주자 입장에선 알을 깨고 병아리가 돼서 나오는 과정이에요.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아널드 쇤베르크가 한 말이 있어요. 작곡가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 나가는 음의 순서보다 음표들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더 많다고요. 분해하는 걸 잘하는 연주자고 있고 합치는 걸 잘하는 연주자도 있어요. 어떤 경우든 위대한 연주자가 작곡가의 세계를 해부한 후 다시 재조립해 낼 때 청중의 귀엔 마법이 펼쳐집니다.”

—연주자의 자율성과 곡의 정체성 중에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저는 곡의 정체성이 더 중요해요. 음악을 표현하려는 연주자는 무대에서 본인은 사라지고 음악만 남습니다. 인상을 남기려는 연주자는 무대에서 본인만 남지요. 나는 음악을 표현하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자아는 완전히 사라진 채로요.”

—그래서일까요. 곡을 연주한다기보다 음악이 당신의 신체로 스며들어, 당신이 연주되는 것을 보는 기분이 들어요. 아름다운 환영에 사로잡힌 것 같더군요. 특별히 완성도가 높았다고 기억하는 공연이나 앨범이 있나요?

“유니버설 뮤직의 비올리스트로 흔치 않게 10집까지 앨범을 냈어요. 고마운 일이죠. BBC 오케스트라와 예술의 전당에서 월튼 소나타 협주곡을 라이브로 리코딩 할 때도 좋았습니다. 곡도 좋았지만 BBC와 함께했다는 게 무척 자랑스러웠죠.”

—디토 프로그램 중 거장과의 협연도 매번 흥미롭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기돈 크레머와 함께 연주한 경험은 어땠습니까?

“정경화 선생은 활화산 같은 분입니다. 불굴의 의지로 그 자리에 올랐고 젊은 연주자들에겐 그 자체로 전설이지요. 기돈 크레머는 마법사이자 부처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말이 거의 없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요. 하지만 그와 연주하면 관객과 특별히 소통한다는 느낌을 받아요. 기돈 크레머는 뭐랄까, 완전히 내려놓고 연주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용기를 뜻하는 '용'(courageous)과 재능을 뜻하는 '재'(talented)를 합친 가운데이름은 세종 솔로이스츠를 창단한 바이올리니스트인 강효 예술감독이 그를 위해 지어준 것이다.

—완전히 내려놓고 연주한다…

“글쎄요,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연주를 들으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질투가 날 정도예요(웃음).”

—그런 느낌이 드는 작곡가가 있습니까?

“쇼스타코비치요. 그의 음악은 어둠의 깊이만큼 아름답습니다. 베토벤의 업적이 얼마나 위대한지는 모두가 알고 있어요. 대곡을 썼고 청각장애라는 신체적 역경도 극복했으니까요.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시대와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빚에 허덕이면 살았어요. 그 삶의 참혹함은 음악에 깊은 골짜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만들어 냈어요. 지난 세기 작곡가 중에 가장 위대합니다.”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과 나치의 러시아 점령 기간 동안 활동했다. 당시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봉쇄' 기간에는 100만 명 이상이 굶주림과 폭격으로 사망했다. 사람들은 가구에서 아교풀을 긁어먹고 키우던 고양이를 먹었으며 거리의 시체를 잘라 먹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쇼스타코비치는 매일 아침 6시 정장을 차려입고 작곡했다. 독일군의 폭격 속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잉크가 마를 때까지 기다려 악보를 챙겨 방공호로 가져갔다.

음악의 힘은 얼마나 위대한가. 용재 오닐은 음악은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믿을 수 있는 종교라고 했다.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도 음악에는 공포를 유보하는 담대함이 있다. 공중에 한 음 한 음 음표를 튕겨내듯, 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우주를 향한 경이와 존재에 대한 감사로 충만한 용재 오닐의 말은 그의 음악만큼이나 영적으로 들렸다.


항상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는 용재 오닐. 객관적인 환경은 불우해 보일지 몰라도 어린 시절 아일랜드계 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는 10년 동안 불평 한번 없이 손수 운전해 왕복 4시간의 레슨 교실에 그를 데려다주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음악적 감동이란 무엇인가요?

“우리는 석양을 보고 혹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감동합니다. 나는 감동이라는 단어를 ‘음악'을 통해 처음 접했어요. 음악의 형태는 내게 미세한 진동이나 촉각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현의 울림이 에너지의 형태로 전해지죠. 그런 경험 있지 않나요? 우주의 소용돌이처럼, 음악은 순식간에 우리의 마음의 성분을 변화시켜요. 놀라운 미스터리예요. 삶과 죽음, 흑과 백만이 뚜렷한 이분법의 세상에서 음악은 놀라운 형태로 삶의 복잡성을 담아 냅니다. 베토벤이나 브람스는 우리가 삶의 미스터리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요. 참으로 감사한 일이에요.”

인터뷰가 끝난 뒤 며칠 후 나는 롯데콘서트홀에서 디토와 미샤 마에스키가 연주하는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5중주를 감상했다. 그들의 연주엔 웅장한 슬픔과 아이러니가 깃들어 있었다. 시체와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서 울리는 교향곡처럼. 첼리스트 마에스키의 선율은 심오했고, 임동혁의 피아노는 폭풍과 이슬을 뿌려댔으며, 검은 옷을 입은 사제 같은 우리의 용재는 비올라와 한 몸이 되어 완전히 음악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리처드 용재 오닐 ‘섬집 아기’

출처 : 김지수(대중문화 전문기자)의 인터스텔라, 조선일보 & chosun.com 2018.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