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리스트 ‘파우스트 교향곡’ - 음악과 문학의 만남

라라와복래 2018. 6. 21. 12:34

Liszt, A Faust Symphony

리스트 ‘파우스트 교향곡’

Franz Liszt

1811-1886

Marco Jentzsch, tenor

London Philharmonic Choir

London Symphony Chorus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Vladimir Jurowski, conductor

BBC Proms 2011 Prom 15

Royal Albert Hall, London

2011.07.26


Vladimir Jurowski/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 Liszt, A Faust Symphony


쉼 없는 정진으로 일관된 리스트의 삶은 괴테가 그려낸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현란한 피아노 연주로 청중을 사로잡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이자, ‘교향시’라는 새로운 음악으로 신음악 열풍을 일으킨 음악의 혁명가이며, 화려한 여성 편력을 거쳐 말년에는 사제로서 신과의 사랑을 이루고자 했던 프란츠 리스트. 그러나 그는 방대한 지식을 섭렵하고도 만족하지 못했던 파우스트처럼 계속해서 사랑과 예술을 향한 끝없는 열망을 불태웠다. 그토록 파우스트와 닮았던 리스트가 파우스트에게 이끌려 교향곡을 작곡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리스트의 작곡 스케치를 보면 <파우스트 교향곡>의 몇 가지 주제들은 이미 1840년에 발견된다. 그러나 리스트가 <파우스트 교향곡>의 제1버전을 완성한 것은 그로부터 14년이나 흐른 1854년 10월이다. 제1버전에선 3악장 말미를 장식하는 장대한 합창이 빠져 있어 결말이 다소 빈약한 것이 흠이다. 게다가 몇 가지 주요 선율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충분치 않은데다 7/4박자와 같은 실험적인 박자 기호도 나타난다. 리스트는 <파우스트 교향곡>의 제1버전에 만족할 수 없어 이 곡을 대폭 개정해 1857년에 제2버전을 완성했다. 제2버전에선 트럼펫과 트롬본, 오르간과 타악기 등의 악기들이 추가로 편성되었으나 리스트는 여전히 이 작품에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1861년과 1880년 두 차례에 걸쳐 제2버전을 수정·보완하고 나서야 그는 <파우스트 교향곡>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 69세였다.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은 내용상 파우스트의 ‘비탄’으로 시작해 그레첸의 ‘기도’로 이어지고 ‘인간과 악마의 대결’을 거쳐 ‘신비의 합창’을 통한 ‘구원’이라는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리스트가 파우스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830년, 그의 나이 19세 때의 일이다. 당시 작곡가 베를리오즈가 권한 괴테 <파우스트>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읽은 리스트는 곧바로 파우스트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 자신과 파우스트를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리스트 <파우스트 교향곡>은 파우스트를 구원으로 이끄는 그레첸 악장을 감싸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리고 메피스토펠레스의 초상을 담은 마지막 3악장은 '신비의 합창'으로 마무리되어 파우스트의 구원을 나타낸다.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의 괴테 원작에 담긴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괴테의 <파우스트>를 다룬 많은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리스트 역시 괴테의 방대한 원작을 모두 음악 속에 담아낼 수는 없었다. 그보다 리스트는 괴테 <파우스트>의 주요 등장인물인 파우스트와 그레첸, 메피스토펠레스의 초상을 음악적으로 그려냈다고 할 수 있겠다. 리스트 <파우스트 교향곡>의 정식 제목인 '파우스트 교향곡, 괴테에 의한 세 가지 초상'(Eine Faust-Symphonie in drei Charakterbildern nach Goethe)엔 리스트의 이런 의도가 드러나 있다.

1악장 : 끊임없이 갈망하며 고뇌하는 지식인 파우스트

1악장 ‘파우스트’의 도입부는 고뇌하는 지식인 파우스트의 복잡한 마음을 표현하듯 첫 번째 주제부터 매우 심각하다. 지극히 난해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이 선율은 괴테의 <파우스트> 첫 장면에서 파우스트가 여러 학문을 공부한 끝에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파우스트의 고뇌' 선율

전통적인 서양의 조성음악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증3화음을 바탕으로 한 이 주제는 심각하면서도 이상한 느낌을 준다. 증3화음은 장3도에 다시 장3도를 쌓은 화음으로 조성음악에서는 부자연스런 화음이다.

난해한 첫 번째 주제에 이어 오보에가 마치 한숨을 쉬듯 꺼져가는 선율을 연주하며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주제는 '갈망'의 모티브로 불리며 아직 진리를 찾지 못한 파우스트의 끊임없는 갈망을 드러낸다.


'파우스트의 갈망' 주제

이 주제는 마치 괴테 <파우스트>의 유명한 구절 "내 가슴엔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하나는 격렬한 애욕으로 현세에 매달려 있고, 다른 하나는 억지로 속세를 떠나 높은 영의 세계로 오르려 한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두 가지 영혼 사이에서 방황하며 진리를 갈망하는 파우스트의 주제는 1악장 초반엔 지극히 어둡고 절망적으로 표현되지만 파우스트가 그레첸을 만나는 제179마디에 이르러서 이 주제는 매우 사랑스런 주제로 변형되어 그레첸을 향한 파우스트의 사랑을 드러낸다.

파우스트의 고뇌와 갈망을 나타내는 신비로운 서주에 이어 갑자기 알레그로 아지타토 에드 아파시오나토(Allegro agitato ed appassionato, 빠르고 급격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로 바뀌면 바이올린이 열정적인 파우스트 주제를 연주하면서 본격적으로 파우스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파우스트의 ‘삶에의 의지’ 주제

이 주제는 제시부의 제1주제에 해당하며 파우스트의 ‘삶에의 의지’를 나타낸다고 해석된다.

1악장 제시부에는 이 주제 외에도 무수히 많은 주제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금관악기가 주도하는 영웅적인 파우스트의 주제는 가장 강렬하며 긍정적이다. 1악장의 제221마디의 그란디오소, 포코 메노 모소(Grandioso, poco meno mosso, 웅장하게, 조금 속도를 늦추어)에 등장하는 당당한 주제는 흔히 ‘태초에’ 주제라고 불린다. 이 주제는 괴테 <파우스트> 중 파우스트가 요한복음의 첫 부분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장면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파우스트는 그의 서재에서 나중에 메피스토펠레스로 변하는 삽살개와 함께 공부하는 중이다. 그는 신약성서 중 요한복음의 첫 문장을 번역하던 중 삽살개가 메피스토펠레스로 변한다. 리스트가 작곡한 주제를 들어보면, “태초에 행위가 있었느니라”의 독일어인 “Im Anfang war die Tat!”의 리듬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걸 알 수 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케르스팅, <서재의 파우스트>


'태초에' 주제

<파우스트 교향곡> 전체에 걸쳐 매우 중요한 '태초에' 주제는 ‘종교적인 것’을 나타낼 때 즐겨 사용했던 E장조로 제시되며,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끄시도다’를 노래한다.

2악장 : 그레첸 - 순수함의 극치

2악장인 '그레첸' 악장은 리스트가 작곡한 가장 훌륭한 관현악곡으로 꼽힐 정도로 독창적이고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플루트와 클라리넷 등 목관악기의 맑은 음색으로 채색된 2악장 서주에 이어 등장하는 그레첸의 주제는 오보에와 비올라의 오묘한 조화를 느끼게 하여 독특한 오케스트레이션의 예로 거론되곤 한다.


'그레첸'을 나타내는 오보에 선율

감미로우면서도 단순하고 부드러운, 사랑에 빠진 그레첸의 마음을 잘 드러내는 이 주제는 3악장 말미에서 테너 독창자의 선율로 사용되어 '영원한 여성'의 주제로 승격된다.

2악장에는 괴테의 원작에 나오는 그레첸의 순진한 모습도 묘사되어 흥미롭다. 2악장의 제51마디부터 그레첸이 꽃잎을 하나씩 따며 꽃점을 치는 장면이 음악으로 표현돼 있는데, 이는 괴테의 원작에서 그레첸이 꽃잎을 뗄 때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라 말하는 부분에 상응한다. 리스트의 음악 속에서 그레첸의 순진한 모습은 목관악기와 현악기의 대화로 나타난다.

3악장 : 메피스토펠레스 - 파우스트의 또 다른 모습

아마도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초상을 담은 3악장의 거의 모든 주제들이 1악장 ‘파우스트’에서 왔다는 점일 것이다.

괴테의 원작 속의 메피스토펠레스는 그 자신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면서 남을 조롱하고 파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메피스토펠레스는 결코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않는다.

리스트 <파우스트 교향곡> 3악장에서도 메피스토펠레스의 주제들은 결코 새롭지 않다. 거의 모두가 1악장 파우스트 주제들을 비틀어 우스꽝스럽고 기괴하게 변형시킨 것들이다. 품위를 떨어뜨리는 갖가지 장식음과 이상한 반음계, 현악기의 줄을 손가락으로 퉁기는 피치카토 주법을 통해 파우스트의 주제들은 희화화된다.


'갈망' 모티브의 변형

파우스트의 '갈망'을 나타내는 1악장 서주의 두 번째 주제는 리드미컬하게 변형된 후 3악장 푸가의 주제로 사용된다. 리스트는 1악장과 3악장의 주제를 서로 관련시켜 메피스토펠레스의 성격을 새롭게 해석해낸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메피스토펠레스를 단지 “부정적인 영(靈)”으로만 보지 않고 파우스트의 본성에 내재된 냉소적이고 자기 조롱적인 측면을 부각시켜 괴테 <파우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리스트의 음악 속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독립된 존재라기보다는 파우스트의 부정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메피스토펠레스 악장에서 새로운 주제가 하나 등장하기는 한다. 그건 바로 메피스토펠레스의 ‘교만’의 주제다. 이는 리스트가 피아노와 현악을 위해 작곡한 ‘저주’ 협주곡(Malédiction concerto)에서 가져온 것이다. ▶안톤 로마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


리스트 '저주협주곡'의 '교만' 모티브

이 협주곡에는 ‘저주’의 주제 외에도 ‘교만’(orgueil)의 주제라 불리는 리드미컬한 주제가 등장하는데, 리스트는 바로 이 ‘교만’의 주제를 <파우스트 교향곡> 3악장 메피스토펠레스의 중요한 주제로 사용했다. 3악장 ‘메피스토펠레스’ 부분에서 오로지 ‘교만’의 주제만이 1악장 파우스트 악장에서 가져오지 않은 주제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 자신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면서 창조된 것을 부정하고 조롱함으로써 교만해지는 메피스트펠레스의 본질이 ‘교만’의 주제로 대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악장 말미로 갈수록 세력을 확장해가고 힘이 강해지고 마침내 3악장이 거의 끝나갈 무렵 관악기들이 큰 소리로 ‘교만’의 모티브를 다함께 연주하며 메피스토펠레스의 ‘교만’이 절정에 달했음을 알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교만의 모티브는 갑자기 힘을 잃고 그레첸의 순수한 선율이 나타나 메피스토펠레스를 물리친다. 이윽고 종교적인 느낌의 오르간 소리가 들려오면서 합창단과 테너 독창자가 ‘신비의 합창’을 노래하며 파우스트의 구원을 알린다.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에 불과하다. 지상에서 미치지 않았던 것이 이 천상에서 이루어지니 말할 수 없는 것이 여기서 완성되었네. 영원한 여성이 우리들을 이끌어 올린다.”

리스트는 1857년에 개정한 제2버전의 악보에 ‘신비의 합창’을 추가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연주자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합창이 없는 버전과 합창이 있는 버전의 두 가지 옵션을 악보에 적어두었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구원을 나타내는 ‘신비의 합창’이 빠진다면 파우스트의 구원 부분이 너무 빈약해 전체적인 균형이 맞지 않고 감동이 떨어지기에 오늘날엔 거의 합창이 있는 버전이 연주되고 있다.

최은규 (음악평론가, 바이올리니스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및 동대학원 석사, 박사과정 수료하고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부수석 및 기획홍보팀장을 역임했다. 월간 <객석> 및 <연합뉴스> 등 여러 매체에서 음악평론가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의전당, 부천 필 등에서 클래식 음악을 강의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공연 스테이지>공연장 나들이 2015.08.14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9811&cid=58778&categoryId=58778

*이 글은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지휘 임헌정)의 음악과 인문학이 만나는 새로운 형태의 기획시리즈 공연인 <토킹 위드 디 오케스트라(Talking with the Orchestra) 두 번째 이야기 ‘파우스트’>(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015.08.25) 공연을 앞두고 최은규 음악평론가가 네이버캐스트에 올린 해설입니다. _라라와복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