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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 중세 미술 속 개: 사냥의 동지이자 두려움의 대상

라라와복래 2018. 7. 21. 16:31

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중세 미술 속 개

사냥의 동지이자 두려움의 대상


헤라르트 레스브락, <늑대 사냥(Wolf Hunt)>, 18세기, 캔버스에 유채, 90×154cm, 프랑스 사냥박물관


개, 인간과 함께 사냥하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화석이나 동굴벽화에 따르면, 인간이 길들인 최초의 가축은 개(의 선조격인 늑대)다. 초기의 개들은 주로 사냥용, 경비견, 주술적인 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유용성으로 긍정적인 이미지가 생겨났다. 하지만 야생동물은 순식간에 돌변해서 언제 인간을 공격할지 모르니 두렵다. 고마움과 두려움이 공존하면서 개에 대한 이중적인 시선이 형성됐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를 지나 중세에 이르러서도 유럽인들은 개를, 여전히 불결하고 악마에 물든(광견병) 동물로 대했다.

그다지 폭넓게 사랑받지 못했던 개의 위상은 르네상스에 접어들며 급변한다. 개는 충직하고 충실한 동물로 자리 잡았고, 사냥의 파트너로서 역할이 커졌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 검정과 누런 하운드는 온 힘을 다해 토끼를 쫓는다. 인간은 쉽사리 잡을 수 없는 짐승을 사냥으로 포획하는 데 개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실질적인 도움이 있어야만 그 동물을 가까이 두는 인간의 속성을 탓할 수 없다.

개dog의 철자를 거꾸로 하면 신god이 되는 이유

중세는 1000년여 동안 지속되었다. 올해가 2016년이니 예수 탄생 이후 유럽에서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기간이 중세1)였다. 종교가 세상의 중심이었고, 교회가 세계를 지배했다. 그림과 조각 등 예술작품의 제작 배경과 역할이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라틴어로 쓰여진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특권층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탓에 그림과 조각은 기독교 교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아주 좋은 수단이었다. 지금은 예술품으로 간주하지만, 당시로서는 메시지 전파 수단에 가까웠다.


토마스 버스비, <광견병에 걸린 개와 공포에 질린 사람들 캐리커처>, 1826년, 종이에 프린트, 11.9cmx14.6cm, 런던 브리티시 뮤지엄

중세에 개의 위상은 좋지 않았다. 전쟁 용사로 길러진 맹견들이 전쟁터를 탈출하거나 우리에서 빠져나와 마치 늑대들처럼 무리 지어 다니며 도시 외곽이나 시골길을 배회했다. 그런 탓에 사람들 눈에 비친 개의 이미지는 나빴다. 더럽고 공포심을 주는 대상이 되었고, 광견병까지 유행하면서 그런 이미지는 돌이킬 수 없었다. 아주 치명적인 광견병 바이러스에 걸리면 개는, 입에 거품을 물고 기괴한 행동을 하며 공격적으로 돌변한다. 이런 모습이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악마’처럼 보였을 것이다.

광견병에 걸린 개에 물리면 인간의 생명은 위태롭다. 제대로 약이 없던 때라 그 두려움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세기 초반 런던에서 발행된 캐리커처에 광견병 걸린 개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가 잘 담겨 있다. 이전 시대에 비해 과학과 의학이 상당히 발달했던 때에도 이 정도였으니, 중세와 르네상스 동안 집 밖의 개들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더욱 컸으리라.


<루이 9세의 자녀 장과 블랑슈의 묘지(French School, Tomb of Jean and Blanche of France, children of Louis IX and Marguerite of Provence)>, 13세기, 금과 에나멜, 105x126cm, 파리 생드니 대성당. 금과 에나멜로 만든 개. 주인의 묘지에 함께 새겨져 있다. 죽어서도 개는 주인의 발밑을 따뜻하게 해줄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측면을 개는 타고난 매력과 사랑스러움으로 보충했고, 죽어서도 인간이 데려가는 가장 아끼는 동물이 되었다. 현재 파리의 생드니 대성당에 보관 중인 13세기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루이 왕가의 묘지에 개-그레이하운드 혹은 위펫(whippet)-는 무덤 주인의 발 아래에 새겨져 있다. 오른편의 동물은 사자다.

장례 조형물에 자주 등장하는 개는, 단지 영혼의 위로 같은 목적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서 주인의 침대 끝에 누워 잠자던 개는 사람에게 온기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영원의 침대(죽음)에서도 개가 그 온기를 죽은 주인에게 전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개를 지칭하는 영어 단어는 ‘dog’다. 공교롭게도 철자의 순서를 바꾸면 놀랍게도 ‘god’, 즉 신이 된다. 개는 신의 다른 모습이라고도 우겨볼 수 있다. 인간 사회에서 개의 역할을 살펴보면 그럴 만도 하다.


피사넬로, <그레이하운드 측면 두상>, 15세기, 펜과 갈색 잉크의 갈색 담채화, 16x23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세상의 중심은 종교에서 인간으로 다시 이동했다. 세상의 회전축이 달라지니, 모든 것들이 변화했다. 변화의 바람은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들에서 시작해 스페인, 프랑스, 독일, 플랑드르, 북유럽 등 유럽 전체로 넓고 멀리 골고루 번져갔다. 교황과 성직자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를 왕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피사넬로, <왼쪽 측면에서 본 스패니얼>, 15세기, 펜과 갈색 잉크의 갈색 담채화, 25x18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세상의 중심이 예배당에서 궁전으로 옮겨 가면서, 문학, 사상, 미술, 건축, 조각 등에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이 전방위적으로 표출되었다. 특히 그림과 조각에서는 인간을 탐구하면서 과학과 해부학이 발전했고, 프레스코, 목판화, 채색 삽화, 템페라, 드로잉, 캔버스 유화 등으로 그런 탐구의 결과물들이 적용되었다. 르네상스 회화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은, 원근법과 해부학이었다. 원근법의 발견으로 풍경은 캔버스에서 사실적으로 그려졌고, 해부학의 발전으로 신체와 표정 등의 아주 미세한 부분들까지도 표현해낼 수 있었다. 이렇게 확보된 현실성으로, 인간은 인간답게 개는 개답게 그림으로 재현됐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그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그리려 노력했다. 피사넬로(Pisanello, 1395-1455)가 그린 개의 두상과 측면 모습은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사냥개가 신분의 척도가 된 이유


가스통 페뷔스, <보살핌을 받는 사냥개(Caring for the hounds)>, 가스통 사냥책 채색 삽화 중에서. 중세가 끝날 무렵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사냥은 식량을 구하는 행위에서 일종의 사회적인 활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에서 사냥은 사회적, 정치적, 스포츠적 측면에서 아주 중요해졌다. 특히 귀족 남자들에게 사냥은 사교와 사회적 활동에서 아주 중요한 활동이자 특권이었다. 사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탁월한 사냥 솜씨는 곧 그의 사회적 신분을 공고히 하고 그가 가진 특권을 빛내주었다. 당연히 사냥에 최적화된 개를 키워야 했다. 여러 종의 개들을 교배시켜서 최고의 ‘사냥개’ 품종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들이 행해졌다.

프랑스 무종(Mouzon) 지역의 생 위베르 수도원의 사제 집단의 성공이 특히 빛났다. 그렇게 교배에 성공한 사냥개는 들의 수도원 이름을 따서 ‘생 위베르 하운드’라 불렸고, 가장 대표적인 하운드종의 선조가 되었다. 생 위베르 사제들은 이 품종의 개에 대한 가치를 확신했고, 요즘으로 치자면 훌륭한 마케팅 덕분에 프랑스 왕이 특별히 아끼는 귀족들에게 왕의 선물로 매년 여섯 마리의 생위베르 하운드가 보내졌다. 자연스럽게 왕이 하사한 생 위베르 하운드는 부(富)와 권력의 상징으로 이름이 높아지게 되었고, 그 결과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이 품종의 개를 갖기를 원하면서 엄청난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정도 인기를 끌자 정말 웃지 못할 현상이 벌어졌다. 귀족들에게 특급 보물로 대접받게 된 생 위베르 하운드는 사냥의 파트너보다 귀족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그들은 미사를 보러 교회도 개와 함께 갔으니, 사제들 눈에 그들의 기도는 하느님보다 개를 향하는 듯 보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사제들은 교회에 개의 출입을 금지했다. 사제들의 기대와 결과는 달랐다. 한시도 자신의 개를 떼어놓을 수 없었던 귀족들은 교회 밖에서 개와 함께 미사를 보는 대신, 교회 앞에서 사제들로 하여금 개에게 축복의 기도를 하도록 강요했다. 국민 대다수가 보기에 귀족의 개 팔자가 상팔자였다. 동물을 축복하는 이런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중세의 대표적인 표현 양식인 채색 사본으로 기록된 가스통 페뷔스(Gastom Phebus, 1331-1391)의 <보살핌을 받는 사냥개>에 묘사되어 있듯이, 개는 인간이 키우기에 적합하게 언어소통이 가능하도록 훈육시켰다. 또한 귀족과 함께 다닐 수 있도록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이런 개들은 하인보다 상전임을 스스로 안다. 대야에 물을 받아 와서 개를 정성스레 씻기는데, 저 개의 표정이 대단히 사실적이다. 마치 제 주인인 귀족의 눈빛인 양 하인을 노려보고, 하인의 시선은 아래로 향한다. 시선의 위치를 통해 권력의 우위를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사냥과 공놀이


장바티스트 우드리, <사슴을 쫓는 개(Adeer chased by dogs)>, 1725년, 캔버스에 유채, 171×156 cm, 루앙미술관

루이 14세가 좋아했던 화가 장바티스트 우드리(Jean-Baptiste Oudry, 1686-1755)는 프랑스 로코코 스타일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특히 왕이 아끼던 개들을 많이 그렸다. 루이 14세는 사냥을 대단히 즐겨 했기에 우드리는 사냥과 개가 등장하는 그림을 특히 많이 남겼다.

여기서도 평온한 풍경 안에서 개들의 급작스런 공격에 놀란 사슴은 맹렬히 도망치려 하지만 이미 앞발과 등을 물렸고, 목을 노리며 뾰족한 송곳니와 발톱을 드러낸 개들에 의해 쓰러지기 직전이다. 사슴의 죽음의 자리와 사냥개들의 삶의 자리가 겹쳐져 있으니, 사방으로 사냥개들에게 포위당한 사슴이 살아서 저곳을 벗어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죽음에 직면한 사슴의 공포가 커질수록 피맛을 본 사냥개의 용맹함도 더불어 상승한다. 사냥감이 땅에 쓰러져 숨이 끊어져야만 사냥이 끝난다. 생은 죽음과 가까이 갈수록 치열해진다.


장바티스트 우드리, <멧돼지 사냥(La chasse au sanglier)>, 18세기,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사냥박물관

멧돼지는 사슴과 달리 여섯 마리의 개들이 달라붙어 목숨을 걸고 싸워도 쉽게 제압되지 않는다. 검은 멧돼지가 세 마리의 개는 제압했지만, 세 마리에게는 공격을 당하고 있다. 싸움이 아주 팽팽해 쉽게 끝나지 않을 사냥이다. 목숨을 건 사냥개들의 용맹한 싸움을 기록한 이러한 그림들을 보며 루이 14세는 사냥의 쾌감과 묘미를 자주 음미했을 것이다. 또한 아주 자세하게 그려졌기에, 마치 야생에서 ‘작은 전쟁’을 치러서 적을 제압한 듯한 희열로 왕은 들떴을 것이다.

사진이 없던 시절 그림은 기록의 수단이었다. 루이 14세를 따라 실제 사냥 장면을 많이 보았을 우드리는 사냥에 깃든 긴장과 불안, 치열함을 사냥개와 사냥감들의 극적인 순간을 통해 우리에게 긴박하게 전달하고 있다.

사냥의 흔적은 공 던지기 놀이에 남아 있다. 인간이 던진 공을 개는 마치 인간이 맞힌 새를 잡으러 뛰어가듯 전속력으로 달려가 물어서 다시 인간에게 가져다준다. 목적은 달라도 그 습성은 남아 우리를 즐겁게 한다.

좋은 사냥꾼은 개를 책망하지 않는다


피터르 브뤼헐, <눈 속 사냥>, 1565년, 오크 패널에 유채, 117x162cm, 빈 미술사박물관

개의 충성심은 강고하다. 모든 마음 있는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개는 마음으로 품은 대상을 외면하는 법이 없다. 인간은 자신이 키우던 개도 쉽게 잘도 버리지만, 버려져서도 개는 제 주인을 버리지 않는다. 미련할 만큼 우직한 마음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인간보다 개를 더 아낀다. 특히 함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냥에서 이런 충성심은 절대적이다. 16세기 서양 미술사에서 빠질 수 없는 스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 1526/1530-1569)은 눈 속에서 사냥을 하는 한 무리의 개와 사냥꾼을 그림 전경 왼편에 배치하고 있다. 그 왼쪽 뒤편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중경에는 얼음판 위에서 동네 사람들이 놀고 있으며, 멀리에는 집과 마을 풍경, 더 멀리로 산이 뾰족하게 솟아있다. 정말 잘 짜인 구도와 배치로 그림은 완벽에 가까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그림은 종교에서 설교했던 이상적인 마을의 풍경을 재현하지 않는다. 브뤼헐이 살았던 당대의 세속적인 일상 풍경을 담고 있다. 개들도 그 풍경에 어울리는 모습이다. 전형적인 그레이하운드 혹은 작은 늑대 하운드종, 몸집이 좋은 테리어종으로 구성된 사냥개 무리는, 당시 유럽 농촌에서 사냥을 직업으로 삼았던 혹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겨울에 먹잇감을 구하러 사냥에 나가야만 했던 촌부(村夫)들의 개에 가깝다. 여기서 사냥은 귀족의 놀이나 사회적 스포츠가 아니라, 식탁 위에 단백질의 고기를 올리기 위한 생존 활동이었다. 혹시 저 사냥꾼들이 산을 향하여 막 사냥을 떠나려던 참이었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사냥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는 길이라면 마음이 아프다. 날카로운 긴 창엔 한 마리의 꿩도 꽂혀 있지 않고, 사냥꾼의 등은 황량하게 비어 있기 때문이다. 앙상한 겨울나무 가지에 앉은 삐쩍 마른 검은 새들과 낮게 깔린 회색 하늘은 노력에 비해 수확이 적은 날의 우울함을 강조한다.

“내 이름은 보리, 진돗개 수놈이다. 태어나보니, 나는 개였고 수놈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로 시작하는 소설 『개』를 쓴 김훈은, 유명 사냥꾼에 따르면 사냥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절대로 개를 탓하지 않아야 한다고 썼다. 직접 앞장서서 사냥에 뛰어든 개가 사람보다 더욱 크게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에, 이미 자존심에 상처 나서 주눅 든 상태이기 때문에 혼을 내면 자신감을 잃어서 다음 사냥에서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고 한다. 좋은 사냥꾼은 절대 개에게 사냥의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브뤼헐의 그림에서도 그런 책망을 볼 수 없다.

주석

1) 르네상스인들이 자신들의 시대와 이상향인 고대 그리스-로마 사이에 낀 시기라며 폄하해서 중세(middle age)라 불렀다.

이동섭 (예술인문학자) 한양대학교 광고홍보학과 졸업. 파리 8대학 사진학과, 조형예술학부 석사(현대무용), 박사 준비과정(비디오아트), 박사(예술과 공연미학)를 마쳤다. 현재는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반 고흐 인생수업』, 『파리 로망스』, 『당신에게 러브레터』, 『뚱뚱해서 행복한 보테로』, 『뮤지컬 토크 2.0』, 『뮤지컬의 이해』, 『패션코리아, 세계를 움직이다』 등을 쓰고, 『파리 스케치북』,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번역하고, 『유럽 장인들의 아틀리에』의 사진을 찍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미술의 세계> 테마로 보는 미술> 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201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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