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 바로크 미술 속 개 (1): 사냥의 동지이자 다양한 상징의 대상

라라와복래 2018. 7. 23. 23:36

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바로크 미술 속 개 (1)

사냥의 동지이자 다양한 상징의 대상


레안드로 바사노, <부자와 라차로>, 1580~85년, 캔버스에 유채, 134x181,5cm, 빈 예술사 박물관


신화와 종교의 개

미술사는 시대사의 반영이다. 서양미술사는, 현재의 유럽 문명이 생겨나서 발전해 온 과정에 대한 미술을 기록한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지나간 과거는 절대 끝나지 않고 항상 현재와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천 년 이상 지속된 중세의 영향력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도 그 흔적을 말끔히 지울 수 없었다. 중세의 유산은 전통과 관습으로 일상에 깊고 단단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중세의 미술은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된 성경이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종교적 인물과 사건을 눈에 보이도록 그리기 위해 화가들은 역사와 신화의 이야기를 적극 이용했다. 미술은 상징의 전파 도구였다. 보이는 것(미술)을 통해 보이지 않는 복음과 교훈(성경)을 알기 위해서는 그에 담긴 인물과 사건을 알아야만 했다. 그림과 조각 등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이나 찬사가 아니라, 많은 지식을 갖고 읽어내야 하는 종교적 메시지였다. 그것은 르네상스에서 매너리즘의 시기를 거쳐 도달한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서야 변화됐다. 유럽인들은 비로소 인간 중심 문화라는 르네상스가 꾸었던 꿈을 서서히 이뤘다. 과격한 운동감과 극적인 효과로 현실의 생동감을 구현했고, 자유로운 붓질로 색채와 음영의 풍부한 대비 효과를 가미했다. 그림의 내용도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 등이 늘었다. 그렇게 바로크 미술이 등장했다.

신뢰와 믿음의 상징

사냥하거나 일하는 모습으로 그림에 주로 등장하던 개는, 르네상스 이후부터 더욱 다양한 역할을 하게 된다. 보통 그림의 조연으로 등장해서 신화적인 상징물, 회화의 구도적 측면에서 필요한 요소, 그림을 보는 이들의 감정을 호소하는 역할 등을 맡았다. 바로크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냥터를 벗어나 초상화나 유명 신화, 역사화나 풍경화 등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개는 신뢰와 믿음의 상징이다. 모든 충직한 생명체의 이름이다. 기독교에서 변치 않은 단단한 믿음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그런 의미를 품은 개는 중세 이후 서양미술에서 좋은 뜻으로 자주 등장했다.


1. 귀도 다 시에나, <예수 탄생(The Nativity)>, 1275~80년경, 나무에 템페라와 금, 36.4x47.5cm, 파리 루브르박물관

2. <예수 탄생(The Nativity)>(부분)

이탈리아 시에나 출신의 화가 귀도(Guido da Siena, 13세기)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중세 말 비잔틴 양식의 전형적인 세로 그림 안에 인물의 경직된 표정과 자세를 깨고, 작품에 보다 인간적인 분위기를 불어넣은 최초의 화가 무리에 속한다. 위의 패널화는 예수 탄생과 수난을 다룬 총 12개로 구성된 그림의 한 부분으로 ‘옥좌 위의 성모자’를 담고 있는 듯하다. 13세기 말에 완성된 이 작품에서 성모 마리아 아래에 앉은 개는 두 다리를 모으고 얌전히 한 곳(아마도 오른 편의 주인)을 응시하고 있다.

헝가리 진화론자 아담 미클로시(Adam Miklosi)의 연구에 따르면,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개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도를 알아내는 능력을 습득하게 되었다. 원숭이는 물론, 특정 상황에서는 인간과 가까운 영장류(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보다 뛰어나다.1) 오랜 진화를 통해 인간의 요구에 더 잘 부합하도록 제 능력을 키워 왔기 때문이다. 그런 특징 때문에 인간은 사냥, 양치기, 전쟁, 외부인 감시와 물건 운반 등 다양한 목적에 적합한 품종의 개를 만들어냈다.

그림 속 개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온몸으로 주인의 신호에 집중하고 있다. 이렇듯 개가 가장 개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 그림은 당대인들에게 예수 탄생이 신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임을 은근히 말하고 있다.

개는 한 가지 더 중요한 기능을 맡고 있다. 하얗게 칠해진 개는 마치 검은 배경에서 솟아난 듯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한편, 아기 예수를 싸고 있는 담요와 그림 왼편의 시중을 드는 하인의 머릿수건과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그 위치가 절묘하다. 이러한 구도에 화가의 의도가 들어 있다면, 그것은 흰색의 순결함과 개의 충직함을 연결하여 아기 예수는 곧 하느님의 아들로서 순결하고 충직하다는 의미로 읽힌다. 동시에 삼각형을 이루는 세 지점의 하얀색은, 많은 인물과 사건이 묘사된 그림에서 우리의 시선을 성모로 향하게 만든다. 700여 년이 지난 터라 그림의 색은 많이 바랬지만, 처음 완성된 당시에는 색들이 더없이 화려해서 하얀색은 더 눈길을 끌었을 것이다.

피사넬로와 뒤러의 차이


피사넬로, <유스타시우스 성인의 환상(The Vision of Saint Eustace>, 1436~38년경, 패널에 템페라, 65x53cm, 런던 내셔널갤러리

안토니오 피사넬로(Antonio Pisanello, 1395-1455)는 동물과 식물을 면밀히 관찰해 화폭에 담은 최초의 르네상스 화가 가운데 하나다. 아직 소실 원근법이 화면에 완벽하게 자리잡지 못해 다소 답답하지만 사슴과 개는 물론이고 새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이 화폭 안에 펼쳐져 있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피사넬로의 스케치북에는 개와 동물들의 습작들이 가득한데,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노력한 결실이 여기에 담겨 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말에는 붉은 휘장을 둘러 높고 고귀한 신분임을 드러내며 한 남자가 막 등장하는 장면을 그린 이 그림은, 유명한 유스타시우스 성인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다. 로마 장군 플라시두스는 사냥을 하다가 우연히 수사슴 뿔 사이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환영을 본다. 이에 장군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름을 유스타시우스로 바꾸는데, 이후에 건강을 잃고 가족들에게도 많은 시련이 닥친다. 하지만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아 성자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림 속 플라시두스 장군은 자신에게 닥칠 시련을 모른 채, 공손히 손을 모으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있다.

땅에 코를 대고 냄새의 흔적을 쫓고 있는 스패니얼과 맨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는 하운드, 그 곁에서 정면의 사슴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마스티프(mastiff. 건물 경비견으로 쓰이는 털이 짧고 덩치가 큰 개) 등 여러 종의 개들이 말을 탄 장군을 따르고 있다. 특히 정면의 회색 그레이하운드는 토끼를 맹렬히 뒤쫓으며 장면에 생동감을 더한다. 그림 속에서 개들은, 장군이 지금 사냥 중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중요한 증인의 역할도 겸한다.


알브레히트 뒤러, <유스타시우스 성인의 환상(The Vision of Saint Eustace>, 1500~1501년, 35.54x25.9cm, 포그미술관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1471-1528)는 같은 소재를 판화와 유화로 남겼다. 그는 자연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그림 속 풍경에 잘 녹여냈다. 저 멀리 하늘에 닿을 듯한 중세의 성, 우거진 나무들과 수풀, 사냥을 막 마친 듯한 말과 그레이하운드 한 쌍과 세 마리의 사냥견 등, 대단히 사실적이다. 휴식을 취하면서도 주변을 경계하는 개들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수사슴 뿔 사이에 예수의 환영이 묘사되어 있지 않고, 공손히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장면으로 표현한 점이 피사넬로의 그림과 다르다. 또한 각각의 개들의 개성과 성격을 더욱 잘 살렸다.

작고 귀여운 애완견의 역할

바로크 시대에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작은 애완견의 등장이다. 바로크의 전조를 알린 화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 ?-1576)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가브리엘 대 천사와 토비아스>는 서양미술사의 빛나는 걸작으로 남아 있다. 사냥견에 비해 크기가 작은 애완견은 주로 여자들과 함께 등장했다. 신뢰와 충성, 사치와 원초적인 섹슈얼리티의 상징체에 이르기까지, 그림에서 맡은 역할은 폭넓고 다양했다.


조르조네, <잠든 비너스(Sleeping Venus)>, 1508~10년, 캔버스에 유채, 108.5x175cm, 드레스덴 알터마이스터 회화관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Venus of urbino)>, 1538년, 캔버스에 유채, 119.2x165.5cm, 피렌체 우피치 갤러리

티치아노는 조르조네(Giorgione Barbarelli, 1477-1510)의 <잠든 비너스>에 영향을 받아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그렸다. 50세에 처음으로 누드화를 주문받은 티치아노는 원숙한 솜씨로 미의 여신 비너스를 창조해냈다. 그림 속 여인의 포즈는 조르조네가 그린 자연 속에서 잠든 비너스의 자세와 거의 흡사하나, 티치아노는 신화성을 걷어내고 세속적인 모습으로 채웠다. 신화 속 눈 감은 비너스는 여기서 두 눈을 뜨고 그림 밖의 우리를 직시하고 있다. 비너스의 눈빛에는 제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당당함과 옷을 모두 벗고 제 몸이 전시된 상태에 대한 부끄러움이 공존한다. 두 팔을 뒤로 젖혀 가슴을 완전히 드러내는 자세에서 당당함은 더해지고, 발그스레한 볼과 겹쳐진 두 다리에서는 부끄러움이 가득하다.

상반된 감정을 모두 품고 있기에 세속의 여인은 신비롭다. 왼손으로 음부를 가리고, 오른손에는 장미 몇 송이를 쥐고 있다. 막 한 송이가 떨어졌다. 이 둘을 연결시켜 비너스가 자위를 한 번 했다는 해석도 있다. 짙은 초록의 커튼과 검은 막은 공간적으로 그녀를 완전히 분리시키며, 성적인 분위기를 은밀하지만 강하게 암시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성적인 기운이 팽팽한 그림에서, 흰 침대 시트 끝자락에 작은 개가 귀를 접고 잠을 자는 듯하다. 흰 바탕에 갈색 얼룩 개는, 시트의 흰색과 비너스 육체의 갈색을 모두 담고 있다. 색깔의 조화와 구도의 안정성을 구현하기 위해, 또한 비너스가 가진 원초적인 섹슈얼리티를 상징하기 위함이다.

후경에는 두 하녀가 옷을 꺼내고 있다. 비너스는 카소네(중세 및 문예 부흥기의 이탈리아에서 사용된, 일반적으로 호화스런 장식이 새겨진 대석관)에서 나온 듯하기도 하고, 그냥 단순히 옷을 정리하는 하녀들의 모습을 그린 듯도 하다. 그런 모호함이 비너스를 더 신비롭게 만든다. 분명한 것은, 조르조네가 비너스의 뒤편으로 배치했던 신화적 공간을, 티치아노는 현실 속으로 옮겨 왔다는 점이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은 현실의 아름다움으로 맥락이 바뀌었고, 이것은 300여 년 뒤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올랭피아>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변한다. 재미있는 점은, 티치아노는 비너스 곁에 잠자는 개를 두어 평온함을 강조했으나, 마네는 기지개를 펴는 검은 고양이를 두어 성적 요소를 더욱 강화했다.

인간으로 인한 개의 수난사

인간과 살면서 개에게는 빛과 그림자가 존재했다. 충실과 신뢰의 동물이 빛이라면, 폭력과 불결함은 어둠이다. 전자는 개가 갖고 있는 특징이나 후자는 인간의 탓이 크다. 로마제국이 몰락하자, 전투견으로 길러진 많은 개들이 전쟁터에서 버려졌다. 광폭한 야생성의 전투견들은 무리 지어 다니며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었다. 또한 유대교와 기독교 중심의 사회에서 개는 더럽고 불결하며 인간이 가진 모든 부정적인 특질을 대리한 동물로 간주됐다. 특히 검정색을 터부시하던 탓에 검은 개는, 검은 고양이처럼 완강한 선입견과 편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맥락에 등장하느냐에 따라 판단은 달라졌다. 귀족의 곁에서 검정 개는 야수성과 고귀함이 강조됐다면, 하층민 곁에서는 신분의 미천함을 강조했다.


(좌) 르냉 형제, <수레(The cart)>, 1641년, 캔버스에 유채, 56x72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우) <수레> 부분

르냉 형제의 그림을 보자. 어느 농가에 모인 아이들과 어른의 모습으로 보자면 신분은 낮으나 가난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림 속 인물들은 당시 부의 상징이던 신발을 모두 신고 있고, 아이들의 옷차림도 말끔하다. 마치 반쯤 무너진 이곳에 사는 아이들이 아니라, 부모님을 따라 여기를 잠시 방문한 듯하다.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 곁의 검은 개는 그림 밖을 쳐다보고 있다. 짚단과 수레, 여러 짐승들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마당 풍경으로 미루어 봐서 아마 양이나 염소 등을 치는 개일 가능성이 크다. 날렵한 몸과 날카로운 눈빛은 사냥개로도 손색 없어 보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왜냐하면 프랑스혁명 이전에 평민들이 소유했던 수천 마리의 개들은 사냥을 못하도록 뒷다리 관절의 힘줄을 강제로 절단했기 때문이다.

인간 역사가 크게 요동칠 때 개의 수난은 더욱 심해졌다. 사냥터에서 평민들에게 허락된 사냥감의 크기는 토끼나 새 정도였다. 사슴이나 돼지 등 상대적으로 큰 짐승은 귀족들의 차지였다. 사냥감의 크기와 신분의 높이는 비례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 이후 평민들은 귀족과 모든 것에서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고, 귀족들의 개는 희생당했다. 개는 인간에게 봉사하지만, 인간으로 인해 고통도 많이 받는다. 인간을 위해 살다가 죽은 개들을 위한 추모관을 짓는다면, 분명 유럽에서 교회의 숫자만큼은 많을 것이다.

주석

1) 피에르 슐츠, 『개가 주는 위안』, 초록나무, p.108

이동섭 (예술인문학자) 한양대학교 광고홍보학과 졸업. 파리 8대학 사진학과, 조형예술학부 석사(현대무용), 박사 준비과정(비디오아트), 박사(예술과 공연미학)를 마쳤다. 현재는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반 고흐 인생수업』, 『파리 로망스』, 『당신에게 러브레터』, 『뚱뚱해서 행복한 보테로』, 『뮤지컬 토크 2.0』, 『뮤지컬의 이해』, 『패션코리아, 세계를 움직이다』 등을 쓰고, 『파리 스케치북』,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번역하고, 『유럽 장인들의 아틀리에』의 사진을 찍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미술의 세계> 테마로 보는 미술> 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2016.04.14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80460&cid=58862&categoryId=588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