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포레 ‘레퀴엠’(Fauré, Requiem in D minor, Op.48)

라라와복래 2018. 8. 24. 10:40

Fauré, Requiem in D minor, Op.48

포레 ‘레퀴엠’

Gabriel Fauré

1845-1924

Laurence Guillod, soprano

Thomas Tatzl, baritone

Groot Omroepkoor

Radio Filharmonisch Orkest

Conductor: James Gaffigan

Concertgebouw Amsterdam

2017.02.12


James Gaffigan - Fauré, Requiem in D minor, Op.48


레퀴엠(Requiem)은 죽은 이의 안식을 기원하는 음악이다. 애초에는 가톨릭 미사에서 불리던 전례음악이었고, 악기 반주 없이 사람의 목소리로만 이뤄졌던 아카펠라 음악이었다.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여기에 악기 반주가 덧붙여졌다. 또 고전주의로 접어들면서 왕족과 귀족의 명령이나 청탁을 받아 레퀴엠이 작곡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레퀴엠은 교회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콘서트 음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바로 이 고전의 시기에 우리가 즐겨 듣는 모차르트의 <레퀴엠 d단조>가 태어났다.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레퀴엠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서 베를리오즈, 베르디, 포레 등이 또 다른 ‘레퀴엠’을 음악사에 올렸다.

독일어 가사로 쓰인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도 걸작의 반열에서 빼놓을 수 없다. 브람스의 레퀴엠은 ‘감상용’으로 적절하다. 마태복음과 시편을 가사로 삼은 첫 곡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부터 은근하고 장중하게 사람을 사로잡는다. 레퀴엠의 통상적 가사 중간에 오언의 시를 첨가했다. 좀 더 현대로 오면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의 <전쟁 레퀴엠>이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영국 시인 윌프레드 오언(Wilfred Owen, 1893-1918)의 시를 가사로 삼았다. 브리튼은 라틴어로 된 레퀴엠의 통상적 가사 중간에 오언의 시를 첨가했다. 작곡가의 의도는 명확해 보인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영혼들에 대한 위로, 아울러 더 이상 전쟁은 안 된다는 평화의 메시지다.

고요한 명상의 세계로 이끄는 포레의 ‘레퀴엠’

서양음악사에 이름을 올린 그 많은 레퀴엠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베를리오즈와 포레의 레퀴엠이 보여주는 대비다. 50년을 사이에 두고 쓰인 이 두 곡은 한마디로 ‘극과 극’이다.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이 광포할 정도로 음악을 몰아붙이는 것에 비해, 포레의 그것은 고요한 명상의 셰계로 듣는 이를 이끈다. 음악의 규모에서도 베를리오즈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500명을 넘길 정도로 웅장함을 구현했지만, 포레는 시골마을의 작은 성당에서 울려 퍼져도 어울리 것 같은 소박한 규모의 레퀴엠을 남겼다. 50년을 앞뒤로 같은 나라에서 활약했던 두 사람은 어떻게 그리도 다른 레퀴엠을 썼던 것일까?

생상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포레도 베를리오즈와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베를리오즈의 광적인 열정에 견준다면 소박하고 단아했다. 파리 마들렌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성가대 지휘자, 또 파리 음악원 교수였던 포레는 마흔두 살에 작곡한 <레퀴엠>에서 죽음의 공포를 걷어내고 평화로운 안식을 노래한다. 다른 작곡가들의 레퀴엠에서 빈번히 형상화되던 지옥불의 공포가 사라진 자리를 따뜻한 위로의 감정으로 채운다. 그는 ‘죽음의 자장가’로도 불렸던 자신의 레퀴엠에 대해 “죽음이란 고뇌에 차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마음으로 다음 세상을 맞는 것”이라고 말했다.

포레의 정신을 지배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가톨릭적 세계관이었으며, 그것은 음악에 대한 관점으로도 이어졌다. 그는 60세가 조금 넘었을 무렵 아들 필리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음악이란 우리를 매일의 삶으로부터 될 수 있는 한 멀리까지 올려주려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청력을 거의 잃었던 시절이었다. 포레에게 음악이란 그렇게 지고한 것이었다. 게다가 레퀴엠을 쓸 당시 그의 가슴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2년 간격으로 잇따라 잃은 직후였다. 그래서 그의 레퀴엠에서는, 저 먼 곳에 닿으려는 의지와 함께 양친을 잃은 인간적 슬픔이 어른거린다.


예순 살 무렵의 포레. 파리 말세르브 거리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생각에 빠져 있다. 포레는 당시 청력을 거의 잃어가고 있었다.

모두 7곡으로 이뤄진 간결하고 명상적인 포레의 <레퀴엠>에는 최후의 심판을 노래하는 ‘진노의 날(Dies irae)’이 아예 빠져 있다. 그 대신 천국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천국에서(Paradisum)’가 일곱 번째 곡으로 추가돼 있다. 누가 보더라도 공포의 심판보다 평안한 안식을 추구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특히 소프라노 독창으로 이뤄지는 네 번째 곡 ‘자비로운 예수(Pie Jesu)’는 천상의 음률처럼 아름답다. 스승인 생상스도 이 곡에 담긴 포레의 리리시즘을 극찬했다. 바리톤이 노래하는 여섯 번째 곡 ‘리베라 메(Libera me, 저를 구원하소서)’의 선율도 서정의 극치를 보여주며, 이어지는 마지막 곡 ‘천국에서’는 꿈꾸는 듯한 오르간 연주로 아름다운 천국을 묘사한다. 소박하고 고졸한 오케스트레이션이 연출하는 실내악적 분위기, 또 현악 파트에서 바이올린보다 비올라를 많이 사용해 차분한 질감을 그려내는 것도 이 곡의 특징이다.

음악 속에 칩거했던 내향적 인간, 포레

포레의 음악은 그렇게 시끌벅적한 저자를 벗어나 조용히 홀로 앉아 있는 자태를 보여준다. 그는 음악사적으로도 별다른 얘깃거리를 남기지 않았다. 음악적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온건하고 보수적인 작곡가였다고 볼 수 있다. 동시대의 프랑스 작곡가인 드뷔시나 라벨처럼 음악적 모험을 감행하지도 않았으며 정치적 행보가 도마에 오른 적도 없었다. 스승 생상스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신흥 부르주아와 공화파의 입장에 섰지만, 포레는 정치에 하등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생상스가 정치적 선동성이 다분한 곡들을 숱하게 썼던 것과 달리 포레는 그것을 결코 자신의 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평생에 걸친 생상스와의 친교와는 별도로, 음악적 지향에서는 스승이 보여줬던 입장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있었던 셈이다.

포레는 음악 속에 칩거했던 내향적인 인간이었다. 물론 그것도 좋은 삶이다. 스스로의 내면에 침잠해 보편을 길어 올리는 것도 예술가의 길인 것이다. 포레는 정치와 담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음악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51세에 파리 음악원의 작곡과 교수로 부임해 모리스 라벨이나 나디아 불랑제(Nadia Boulanger, 1887-1979) 같은 걸출한 제자들을 키워냈고, 60세가 되던 1905년에는 마침내 음악원장 자리에 올라 프랑스 음악계의 수장으로 군림한다. 파리 음악원 출신이 아닌 포레가 원장으로 취임했다는 것은 당시 프랑스에서는 ‘놀라운 뉴스’였거니와, 아울러 그것은 포레의 은근과 끈기, 혹은 또 다른 측면에서의 정치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레퀴엠>을 완성할 무렵 포레는 40대 중반이었다. 이른바 창작의 중기에 해당하는, 음악적으로 무르익어 가던 시기였다. 이 시절의 그는 초기에 보여줬던 살롱 풍의 낭만주의, 초기 피아노 곡들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등에서 보여줬던 달콤한 리리시즘에서 훌쩍 벗어난다. 포레는 그렇게 작곡가로서의 초반부를 벗어나면서 특유의 화성과 색채감, 모호한 듯하면서도 은근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독특한 음악세계를 서서히 구축해 가기 시작한다. 베토벤을 비롯한 많은 음악가들이 그랬듯이 포레에게도 중기는 ‘걸작의 숲’이었으며, <레퀴엠>을 비롯해 관현악곡 <파반>과 <멜리아스와 멜리장드 모음곡>, <피아노 4중주 2번>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한다.


포레의 장례식. 프랑스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그가 오랫동안 봉직했던 파리의 마들렌 성당에서 엄수되었다. 이날 장례식에는 그의 <레퀴엠>이 연주되었으며, 거리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말년의 그는 청력을 잃는다. 점점 희미해 가던 청력은 타인과의 대화가 아예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고 만다. 결국 포레는 1920년에 파리 음악원장을 사임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 그것은 당연히 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젊은 시절에 여전히 빛났던 그 감각적 아름다움은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그의 음악은 한층 정신적이며 내향적인 세계로 침잠하면서 이른바 ‘침묵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그렇게 완전히 청력을 잃은 포레는 유난히 단조의 실내악곡을 많이 썼다. <첼로 소나타 2번 g단조>와 <피아노 3중주 d단조>, <현악 4중주 e단조> 등이 말년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세상을 떠난 해는 1924년, 사인은 폐렴이었다. 장례는 프랑스 국장으로 치러졌다.

Fauré, Requiem in D minor, Op.48

Victoria de Los Angeles, soprano

Dietrich Fischer-Dieskau, baritone

Choeurs Elisabeth Brasseur

Orchestre de la Societe des Concerts du Conservatoire

Conductor: André Cluytens

L'Eglise Saint-Roch, Paris

1962.02.02

추천음반

1. 앙드레 클뤼탕스(André Cluytens)가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1963년도 녹음(EMI)은 포레의 <레퀴엠>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음반이다. 소프라노로는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바리톤으로는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포진했다. 이 녹음은 다소 낭만적인 경향의 연주다. 여타의 연주들과 비교하자면 질감도 꽤 두툼하다. 고졸함이나 단아함과는 좀 거리가 있는 드라마틱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2. 만약 위 음반의 세속적 분위기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미셸 코르보가 성 피에를 오리앙 성가대와 베른 심포니를 지휘한 1972년 녹음(Erato)를 선택할 수 있겠다. 간결하고 기품 있는 연주라고 할 수 있다.

3. 비교적 근래의 명연으로는 존 엘리어트 가디너가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와 몬테베르디 합창단을 지휘한 1992년 녹음(philips)이 꼽힌다. 앞서 언급한 두 연주보다 템포가 좀 더 빠르다.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경향신문사에서 문화부장을 두 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 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저서에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돌베개, 2013), <더 클래식 1: 바흐에서 베토벤까지>(돌베개, 2014), <더 클래식 2: 슈베르트에서 브람스까지>(돌베개, 2015), <더 클래식 3: 말러에서 쇼스타코비치까지>(돌베개 2016) 등이 있다.

출처 : 문학수 지음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돌베개, 2013), pp. 193~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