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 김기택 시집 <소>에서
‘소의 눈물’
워낭소리가 스러진다
자신의 운명을 아는 듯 커다란 눈에 한 줄기 이슬이 맺혔다. 소를 친구처럼, 자식처럼 여기며 살았던 농민은 가는 자식을 위해 여물을 준비했다. “잘 가라”
- 사진: 프리랜서 김상태
아, 구제역...
소와 돼지의 비명과 함께
인간의 비통도 함께 묻습니다...
시인 김기택은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꼽추’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문학과지성사, 1992), <바늘구멍 속의 폭풍>(문학과지성사, 1994), <사무원>(창작과비평사, 1999), <소>(문학과지성사, 2005), <껌>(창작과비평사, 2009)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1995), 현대문학상(2001), 이수문학상(2004), 미당문학상(2004), 지훈문학상(2006), 상화시인상(2009)을 수상하였다.
시집 <사무원>에서부터 도시적 삶의 생태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던 시인은, 도시화로 인해 전반적으로 변화된 삶의 양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기조로 하고 있다. 전면적인 도시화는 자연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우리의 삶도 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시인의 시선은 도시화되어 번다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자연의 모습으로 향한다.
상계동 비둘기
비둘기들은 상계역 전철 교각 위에 살고 있다
콘크리트 교각을 닮아 암회색이다
전동차가 쿵, 쿵, 쿵, 울리며 지나갈 때마다
비둘기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교각처럼 쿵, 쿵, 쿵, 자연스럽게 흔들린다
비둘기들은 교각 위에 나란히 앉아
자기들 집과 닮은 고층 아파트들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듯
비둘기들도 상계역 주변 거리를 내려다본다
도로변 곳곳에 음식물 쓰레기와 물웅덩이가 있다
사람들이 노점에서 주전부리를 즐기는 동안
비둘기들도 거리에서 푸짐한 먹거리를 즐긴다
자동차들이 쉬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지만
비둘기들은 가볍게 경적과 속도를 피하며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듯 느긋하게 모이를 고른다
가랑이 사이로 비둘기가 활보하는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막연히 남의 구두가 지나갔겠거니 생각한다
비둘기들은 검은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쓰고
언제나 아스팔트를 보호색으로 입고 다녀서
상계역에 비둘기들이 사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방금 딴 사과가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고층빌딩 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빌딩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라는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안 보는 척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걸음을
출렁거리며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 외로운 추수꾼 :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The Solitary Reaper’에서 인용.
시 ‘어떻게 기억해냈을까’는 제4회 미당문학상(2004) 수상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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