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현역작가’ 박완서 선생님
시를 읽는다. 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또는 슬쩍 베끼기 위해. 시집은 이렇듯 나에게 좋은 말의 보고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 유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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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고통 문학으로 승화… 눈감는 순간까지 ‘현역’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지난 22일 타계한 한국문학의 거목인 소설가 박완서씨는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원고를 읽었다. 고인의 마지막 책이 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지난해 8월 출간)에서 말한 다짐을 지킨 것이다. 고인은 타계 직전까지 병석에서 계간 <문학동네>가 주최하는 ‘젊은작가상’ 심사를 위해 원고를 검토하고 의견을 메모로 남겼다. 고인은 가까운 지인들 외에는 투병 소식을 알리지 않았고, 문학동네 측에서도 급작스러운 병세 악화는 알지 못했다. 고인이 타계한 22일은 마침 최종심을 하는 날이었고, 선생의 뜻은 전화를 통해 심사위원들에게 전해졌다. 선생은 마지막까지 ‘영원한 현역’의 모습이었다.
박완서 선생이 2009년 9월 경기 구리시 아치울마을의 자택 서재에서 책을 보며 웃고 있다. “죽을 때까지 현역이면 행복하겠다”는 말대로 고인은 팽팽한 긴장감을 잃지 않는 소설과 산문을 발표하며 마지막까지 ‘영원한 현역’으로 자리를 지켰다.
고인의 문학은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솟아올랐다. 한국전쟁 통에 오빠와 숙부 등 친족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그에게 문학은 삶을 견디고, 잔인한 세상에 복수하는 방식이었다. 생전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그 시대를 견디게 했던 것은 ‘언젠가는 이것을 글로 쓰리라’는 생각, 그 시대를 증언하고 싶은 욕구였다”며 “내가 사랑하는 식구의 죽음을 하나하나 개별화해 살아있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인은 1931년 경기 개풍군 박적골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입학식을 치른 지 닷새 만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대학 문턱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오빠가 죽고 식구들의 생계를 챙겨야 했던 그는 미8군 초상화부에 취직한다. 그는 그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만나고, 그 체험을 되살려 훗날 등단작 <나목>을 쓴다. 전쟁으로 가족과 꿈을 잃고 상실감과 고통에 빠져 있던 그는 “거기에서 나만 가장 불행하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박 화백을 통해 다른 사람도 보게 됐다”고 회고했다.
휴전 직후 결혼해 네 딸과 외아들을 키우며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던 그는 마흔 살의 나이인 1970년 <나목>으로 뒤늦게 등단한다. 주부로서의 바쁜 삶과 참혹한 전쟁 속에서 묵혀놓았던 문학에 대한 열정을 한번에 쏟아내려는 듯 그는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벌였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비롯해 <엄마의 말뚝>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등 전쟁과 분단 체험을 살린 작품을 잇달아 펴내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81년 <엄마의 말뚝>이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심사위원들은 “개인과 민족의 관계가 오직 가족사 속에서 깊이 파악됨으로써 추상적이기 쉬운 분단문제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에게 분단체험은 문학의 깊은 뿌리로, 2009년 발표한 단편 ‘빨갱이 바이러스’에서도 전쟁의 상처가 드러난다.
고인은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고루 사랑을 받은 ‘복 받은 작가’였으나 개인사는 고통스러웠다. 전쟁 통에 오빠를 보낸 데 이어 88년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직후 외아들마저 잃고 말았다. 그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으로 써냈다. 개인적 고통을 이를 악물고 문학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고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간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신랄하게 까발리기도 했다. 특히 도시 중산층의 속물성과 악덕을 파헤쳤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팽팽한 긴장감과 예술성은 세월에도 전혀 무뎌지지 않아 2007년 펴낸 마지막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박완서에 의해 ‘노년 문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며 “인간의 숨은 악덕과 주름살처럼 낀 삶의 부정적 양상에 대한 박완서의 따끔한 관찰력과 수다스러운 입심으로 드러내는 문학적 형상력은 뛰어난 자산”이라고 평했다.
고인은 독재정권 시절부터 최근까지 진보적 문인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나 민족작가회의에 인세를 쪼개 거금을 후원하기도 했다. 이시영 시인은 “뒤에서 어려운 일을 하는 후배들을 도와주는 데 아낌이 없으셨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마지막까지 “가난한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마라”는 유언으로 후배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인이 문단 후배들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늘 이전보다 진전된 작품을 펴내며 ‘영원한 현역’으로서 작가의 모범을 보였다는 점이다. 박경리ㆍ이청준에 이어 문학계의 ‘큰어른’을 잃은 문인들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한국작가회의와 한국문인협회, 한국펜클럽은 이문구ㆍ박경리에 이어 문학인장으로 장례를 치를 것을 가족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박하게 장례를 치르고 싶다는 가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경향신문 이영경 기자]
주인을 잃은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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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가 말하는 ‘박완서’
지난해 봄이었다. 22일 타계한 박완서씨가 이해인(66) 수녀에게 전화를 했다. “난 다른 이유 없이 오직 수녀님을 보러 갈 거야.” 그 길로 고인은 기차를 탔다. 지난해 봄에도, 가을에도 고인은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2008년부터 암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해인 수녀는 “그때는 선생님(2010년 9월 담낭암 진단)이 편찮으시기 전이었어요. 마치 저의 위로자가 되기로 결심을 하신 듯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고인은 “암에는 흰 살 생선이 좋다”며 이 수녀의 손목을 잡고 일식집에 가서 도미머리 정식을 주문했다. 또 부산 광안리 성베네딕도 수녀원의 모든 사람을 위해 ‘자장면 100그릇’을 사기도 했다. 두 사람은 수녀원 근처의 바닷가도 거닐고, 경남 밀양의 가르멜 수녀원에 있는 이해인 수녀의 언니 수녀를 방문하기도 했다. 서울로 떠날 때 고인은 이해인 수녀에게 카드를 한 장 건넸다. 거기에 자필로 이렇게 적었다.
‘고향에 다녀가는 것처럼 마음의 평화를 얻어 갑니다. 내년 이맘 때도 이곳 식구들과 자장면을 같이 먹을 수 있기를, 눈에 밟히던 꽃과 나무들이 다 그 자리에 있어 눈 맞출 수 있기를 기도하며 살겠습니다. (…) 당신은 고향의 당산나무입니다. 내 생전에 당산나무가 시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꼭 당신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보다는 오래 살아주십시오. 주여, 제 욕심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2010. 4. 16. 박완서’
카드의 글귀처럼 고인은 먼저 갔다. 올봄에 다시 눈 맞추길 바랐던 꽃과 나무, 또 한번의 자장면 식사는 뒤에 남겨둔 채 말이다.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난 외아들의 생일이 봄날에 끼어 있다며 약속했던 ‘봄날의 부산행’을 뒤로한 채 말이다.
이제 그 자리에는 ‘당산나무’만 덩그러니 남았다. 22일 고인의 당산나무였던 이해인 수녀에게 추모 인터뷰를 청했다. 이날 전화 통화를 할 때 이해인 수녀는 빈소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23일에는 고인의 입관식을 보고 있었다.
“연배는 저보다 14년 위세요. 그래도 마음의 갈등이 있을 적에는 고해성사를 보시기도 했어요. 저 역시 그렇게 했습니다. 선생님은 1988년에 남편과 외아들을 잃으셨습니다. 정말 비통한 슬픔에 잠겨 계셨어요. 그때 저와 친분을 쌓게 돼 더 가깝게 지냈습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들은 가끔 수도원에 가서 쉬면 좋고, 제복(수녀복)을 입은 사람들은 가끔 종교적인 분위기를 떠나 사가(私家)에 가서 지내야만 쉼이 된다’고 하시면서, 그런 집이 필요할 적엔 당신 집에 오라고 초대하시기도 했어요.”
박완서 작가와 이해인 수녀가 지난해 봄 경기도 의왕시 성 라자로 마을 수녀원 돌계단에 정겹게 앉아 있다. 두 사람은 작가로서 신앙인으로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 마지막 만남은 언제였나요.
“지난해 11월 초였습니다. 선생님 댁에 가서 저녁도 먹고, 기도도 해 드렸어요.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도 이리 힘든데 수녀님은 더 힘들지 않으냐?’고 걱정을 하셨어요. 따님이 차려준 저녁을 맛있게 먹는 제 모습을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 만나면 이별의 아픔, 언젠가는 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의견을 나누곤 했습니다. 잘 죽는 것이 과제라고, 어떻게 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안 끼치고 죽을 수 있을까 도움을 청하며 기도해야겠다고.”
- 가장 좋아하는 고인의 작품은요.
“저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좋아해요. 제목에 약자를 배려하는 겸손한 따뜻함이 배어 있어서요.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숲입니다. 인간의 다양함을 두루 경험할 수 있는 큰 숲 같은 거요. 시든, 수필이든 선생님의 작품은 굳이 교훈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고도, 많은 것을 간접적으로 배우게 되는 매력이 있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소재를 갖고도 반짝이는 재미를 더해주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습니다.”
- 빈소에서 고인의 사진을 봤을 때는 어떠셨어요.
“사진 속의 웃으시는 모습이 어찌나 정겹던지, 막 울다가도 그 모습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따님들이 저를 붙들고 막 울고 있는데, 시종일관 의연하게 처신하긴 좀 힘들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혼났습니다.”
- ‘작가 박완서의 죽음’은 수녀님에게 어떤 것입니까.
“정신적으로 크게 의지했던 멘토 한 분을 잃은 상실감입니다. 이 상실감은 오래갈 것 같습니다. 저를 아껴주시던 시인 김광균ㆍ박두진ㆍ구상, 수필가 피천득,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 스님을 떠나보냈을 적에도 그랬듯이 말이에요.”
-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주세요.
“선생님. 선생님이 떠나신 날 눈이 펑펑 내렸어요. 지난해 봄 우리가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던 성 라자로 마을 수녀원 돌층계 위에 눈사람으로 서서 선생님을 배웅했습니다. 선생님 목소리처럼 눈은 조용조용 내리는데, 선생님도 흰 눈처럼 곱게 가볍게 가신 거지요? 아름다운 그 나라에서 언젠가 다시 만나요. 편히 쉬세요. 사랑하는 선생님. 안녕, 안녕히!” (글=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 열여섯 살 소녀의 그 해맑은 웃음, 저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세요?
소설가 - 임철우
故 박완서 선생님 영전에
선생님.
오늘 새벽 꿈속에서 구두 한 켤레를 그만 잃어버렸습니다. 누군가 잘못 알고 신고 간 모양이라며, 잔칫집 주인은 대신 엉뚱한 헌 구두를 제게 내주었습니다. 잠 깨고 누운 채 그 괴이한 꿈을 더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아아, 이런 청천벽력이라니요!
선생님. 불과 엊그제 전화를 드렸을 때, 평소처럼 또렷하고 맑은 음성으로 말씀하셨지요. 곧 다시 건강해질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그래서 예전처럼 햇살 따스한 날, 아끼는 후배들 불러내 함께 북한강에도 가고 동해 갯바람도 실컷 쐬고 오자고. 아름다운 산천도 실컷 보고, 맛난 것도 많이 먹자고. 그렇듯 철석같이 약속하시더니, 어찌 이리 홀로 황망히 떠나버리셨습니까!
오늘, 한국 문학은 크고 영롱한 별 하나를 잃었습니다. 문단의 어머니를 잃은 후배 문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온 나라 독자들이 이 급작스러운 이별 앞에서 절절한 애도와 그리움을 영전에 바치고 있습니다. 선생님만큼 독자들의 사랑과 존경을 오래도록 한 몸에 받아오신 분이 또 있을까요. 모두들 선생님을 능란한 이야기꾼, 생활문체의 마술사, 시대의 거울 역할을 해 온 뛰어난 풍속화가, 삶의 비의를 탐색해온 구도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국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산맥’ ‘영원한 현역작가’라는 특별한 찬사야말로 오로지 선생님만의 몫이 아닙니까.
“내게 글을 쓴다는 건 내 고통의 일부를 독자에게 나누는 거예요. 내 고통을 글로 옮기면서 내가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지지요.”
언젠가 하신 말씀처럼, 실제로 선생님의 삶과 문학은 엄청난 고통과 아픔의 영토에서 피어난, 실로 기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격동의 시대, 전쟁과 분단의 상처, 가족사의 아픔, 말로 못 다할 참척의 시련까지, 그 모든 고통과 슬픔 앞에서도 선생님은 결코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혼과 육신으로 그것들을 끌어안은 채, 놀라운 치유와 위안과 평화의 언어로 꽃 피워내셨지요. 그런 선생님이 계셔서, 우리들은 참 행복했습니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 하시던 선생님. 행여 나이 들어 흐트러진 모습 보일까, 그게 가장 걱정이라던 선생님. 갈수록 더 싱싱해지는 선생님의 필력과 감수성을 저희가 얼마나 내심 부러워했는지 아십니까. 열여섯 살 소녀의 그 수줍고 해맑은 웃음을 저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세요?
아치울 선생님 댁 마당에 서 있는 살구나무. 해마다 봄이 되면 저희에게 곱게 익은 살구알을 따주시며 좋아하시더니, 올봄 그 살구는 이제 어찌하실 건가요. 틈만 나면 손수 나가서 뽑아주시던 그 안마당 잔디밭 풀들은 또 어떻게 하시고요.
사랑하는 선생님. 지난 시절 더 자주자주 찾아뵐 걸. 더 많은 시간을 갖고 귀한 말씀을 더 많이많이 들어볼 것을. 못난 저희들은 이렇게 눈물 글썽이며 뒤늦게 가슴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을 보내 드려야 할 때입니다. <잃어버린 여행가방>에 그렇게 쓰셨지요. 훗날 하늘나라 그분 앞에 서게 되면, 그분이 이렇게 위로해 주시지 않을까. “오냐, 그래도 잘 살아냈다. 이제 편히 쉬어라”라고요.
그래요, 선생님. 틀림없이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그곳에서도 부디 행복하시고, 우리들 가슴에 오래도록 함께 계셔 주세요.
박완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현대문학
2010-08-02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작가로서의 나의 새로운 다짐이 있다면 남의 책에 밑줄을 절대로 안 치는 버릇부터 고쳐볼 생각이다. 내 정신상태 내지는 지적 수준을 남이 넘겨짚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도 일종의 잘난 척, 치사한 허영심,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폐증이라고 생각되자, 그런 내가 정떨어진다. 자신이 싫어하는 나를 누가 좋아해주겠는가. 나를 스쳐 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그나저나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지. 고통의 기억뿐 아니라 기쁨의 기억까지 신속하게 지우면서. 나 좀 살려줘,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리고 싶게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 ‘내 생애의 밑줄’에서
그 많은 사건과 인생들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면서 비천한 것들이 존엄해지기도 하고 잘난 것들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비천해지고 하는 게, 마치 지류의 맑고 탁함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큰 강이 도도히 흐르면서 그 안에 온갖 생명들을 생육하는 것과 같은 장관입니다. 이 작은 나라에서 그런 큰 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문학이니까 가능한 축복이요 기적입니다. - ‘신원의 문학’에서
박완서 산문집
호미
열림원
2007-01-29
작년에 그 씨를 받을 때는 씨가 종말이더니 금년에 그것들을 뿌릴 때가 되니 종말이 시작이 되었다. 그 작고 가벼운 것들 속에 시작과 종말이 함께 있다는 그 완전성과 영원성이 가슴 짠하게 경이롭다. ―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에서
내가 경험한 기도의 묘미는 잗다란 기도는 잘 들어주시는데 더 큰 기도는 잘 안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큰 기도는 과욕이나 허욕 아니면 신의 영역을 넘보는 기도였으니 안 들어주시는 게 당연하고, 잗다란 기도는 잔근심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런 잗다란 근심은 기도하는 과정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게 되니까 들어주실 수밖에. - ‘그가 나를 돌아보았네’에서
박완서 기행산문집
잃어버린 여행가방
실천문학사
2005-12-24
발이 넓은 친구가 그 암자를 지키는 여연 스님과 연줄연줄로 아는 사이여서 그날 밤의 숙소는 그 암자로 우리 마음대로 정해놓고 있었다. 그 전날 밤 광주에서는 사제관에 묵은 생각을 하면 괜히 웃음이 났다. 사제관이라곤 하지만 서울의 큰 성장 사제관처럼 부잣집을 닮은 집이 아니라 방 두칸짜리 작은 아파트였다. 신부님이 마침 시골 공소로 미사를 봉헌하러 출타 중이시라 하룻밤 비어 있는 동안을 역시 친구의 친구 주선으로 하룻밤 묵게 된 것이었다. 잠만 잔 게 아니라 아침엔 쌀독과 냉장고를 뒤져 밥까지 해먹고 떠났으니 무전취식에 이골이 난 무전여행이었다. 물론 일지암에서도 거저 얻어먹고 거저 잘 작정이었다. - ‘자연은 위대한 영혼을 낳고 - 남도 기행’에서
박완서 산문집
두부
창비(창작과비평사)
2002-10-30
나는 어느 틈에 엄마한테 옛날얘기를 조르지 않게 되었다. 학교에서 도서관 견학을 간 게 계기가 되어 동화책과 소년소녀소설이라는 걸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 교과서 외에 그런 재미있는 책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나의 문화적 환경은 척박했다. 또한 시대적으로도 극도로 궁색한 전시였다. 양질의 소년소녀용 책들은 거의가 서양 어린이용 읽을거리의 번역물이었다. 일본은 서양 여러 나라와 전쟁 중이어서 미국이나 영국을 짐승이나 도깨비 나라처럼 가르칠 때였지만, 아름다운 삽화와 이국적인 이름과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있는 서구의 동화책은 그와는 별도로 건재했고 매혹적이었다. 나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한테 먹혀버린 것처럼 무아지경의 황홀감을 맛보았다. 나는 아무런 갈등 없이 일본의 원수인 미국, 영국과,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서양을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 P.182
언젠가는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에 시달릴 때나, 정말로 글을 쓰게 되고 나서나,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버릇은 여전했다. 살아 있는 동안 글을 못 쓰게 되는 게 더 괴로울까, 남의 글을 못 읽게 되는 게 더 괴로울까, 자문해본 적이 있는데 대답은 늘 후자 쪽이다. 몸을 비스듬히 될 수 있는 대로 편안하게 하고, 재미있는 책에 푹 빠져들기도 하고 왜 썼는지 모르겠는 재미없는 책은 휙 내던져 버리기도 하는 맛이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지루할까. 지금은 순전히 재미있으려고 하는 독서지만 처음에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을 전후에서는 내 글도 과연 활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도 남의 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은 어떻게 쓰나 또 나라 밖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나를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공부삼아 한 독서였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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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릴 적에
<나 어릴 적에>는 내 유년기 이야기니까
아마 옛날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때는 세상이 온통 남루하고 부족한 것 천지였지만
나름대로 행복했다고 으스대고 싶어서 썼습니다.
마치 신나게 롤러코스터를 타는 아이한테
감옥소 앞 홈통에서 미끄럼 타는 게
훨씬 더 재미있다고 말하는 식이니까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의 옛날 그리움이 결핍과 궁상이 아니라
어떡하든지 그걸 덮어주려는 가족 간의 사랑과
아이들 스스로의 창조적인 상상력이라면
좀 말이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시절이 생각할수록 행복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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