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길 위에서 책읽기] 김연수 산문집 <여행할 권리>

라라와복래 2011. 2. 14. 23:43
 

 

 

[길 위에서 책읽기]

문학의 ‘월경할 권리’를 옹호하다

김연수 산문집 '여행할 권리'

 

글쓴이 ㅣ 이권우 | 도서평론가

 

첫 구절만 보면 알 수 있다. 그 책이 나를 사로잡고 오랫동안 곱씹어볼 내용으로 그득한지 아닌지를. 김연수의 여행기 <여행할 권리>는 특별히 뽑아낸 것이 분명한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겨우 이것뿐인가”라고 질문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여행할 권리. 이 한 구절로 이 책의 진가는 드러난다. 당연히, 이 여행기의 고갱이는 이 한 문장에 오롯이 담겨 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보내는 삶에 동의하고 있다면, 박차고 일어나 마치 탈출하듯 여행을 떠날 리 없다.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말은 너무 낡았다. 현실이, 체제가 나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함부로 무시할 때, 이를 거부할 줄 알아야 비로소 존재하는 법이다. 그러니, 여행은 권리가 되어야 마땅하다.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 더 나은 것을 꿈꾸는 것, 고여 썩지 않고 흐르는 것은 우리의 천부적인 권리이므로.


권리로서 여행이란, 달리 말하면 월경(越境)하기다. 경계를 넘어선다는 말처럼 매력적이면서 위험한 것이 어디 있던가. 한발만 넘어서면 꿈에도 그린 곳이기는 하나 낯설어 두려운 곳이 펼쳐진다. 그 역설에서 호기심과 탐험심이 발동하는 법이고 여행이 시작된다. 새로운 곳으로 발 디디기는 존재의 전환 가능성을 상징한다. 물리지만, 애벌레가 나비 되는 전환의 시점과 긴장감 도는 국경선은 같은 의미다. 그것을 넘어서야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그러나 김연수가 보기에 우리는 국경을 제대로 넘어선 경험이 없다. 망국과 식민지, 그리고 분단은 월경을 다른 의미로 바꿔치기 해버렸다. 국경을 넘는 자들에게 우리는 “조국과 민족의 배반자”라 성토했다. 그래서 다들 돌아왔다. 넘어설 수 있는 국경이 없는, 고립무원의 섬에 갇혀 있는 삶을 살아왔을 뿐이다. “우리에겐 국경을 넘어 다른 민족 속으로 들어가, 이윽고 사라지는 유전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거친 파도를 바라보며 대양을 가로질러 대륙으로 떠나고 싶은 도전욕을 자극받기보다는 거기가 끝인 줄 알고 말뚝처럼 박혀 한 장의 사진이나 박고 돌아왔으니 말이다. 우리의 근현대사가 비극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이광수의 ‘가짜 월경’과 이상의 좌절, 그리고 온몸으로 조금씩 국경을 밀어낸 김사량과 김수영. 자고로 문학이란 그 어떤 경계에도 갇히지 않는 정신의 소산. 진정한 여행도 마찬가지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버클리에서 만난 후사코 할머니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남편의 근무지인 인도로 갔다 네팔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마리화나를 피웠는데, 가라사대 “그리고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어버렸지”란다. 그녀는 분명히 황홀경에 이르렀던 모양이다. 옛적 샤먼들이 신비한 약초의 힘을 빌려 우주와 인간의 내밀한 비밀 세계를 엿보았듯 말이다. 기존의 세계는 표면에 불과하다고 느끼게 되자 남편과 헤어져 멕시코로, 캐나다로 떠돌아다녔다. 거기서 베트남전 파병을 피하려고 도망 온 남자를 만났다. 멕시코에 머물 적에 이름도 바꾸었다. 인생이 또 한번 바뀌는 순간이다. 발음은 여전히 같으나 뜻은 달랐다. 房子에서 風沙子로. 이 눈부신 삶 앞에 무슨 수사가 필요하겠는가.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 김연수는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소설가가 되고 나서부터였겠지만, 나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뭔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절대적으로 좋아하게 됐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말은 내게 되레 자기 자신이 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한번만이라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내 인생도 완전히 바뀌어 버릴 것이다. 아아, 나도 후사코 할머니처럼 말할 수 있다면.”


<여행할 권리>가 여행의 당의정을 입힌 문학론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 다 말한 셈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다’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왜 글을 쓰느냐면 바로 그 때문”인 법이니까. 여행을 촉발한 동기가 바로 문학이 탄생하는 자리다. 그러니, 문학하는 자는 당연히 월경을 꿈꾸는 자다. 선을 그어놓고 그 안에서 이야기하고 노래하라는 현실법칙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그 선을 전선(戰線)으로 바꾸고, 그리하여 국경을 막 넘어서려는 자의 절창이 문학인 법이다. 김수영이 과격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38선을 뚫는 길이라고. 또 김수영이 격렬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문학은 불온하다고.


김연수가 어디에 있든, 그러니까 옌볜에 있든 도쿄를 거닐든 버클리를 돌아다니든 그를 사로잡고 있는 열쇳말은, 월경이다. 문학하는 이의 월경이 어떤 의미인가를 곱씹어 보며 자신의 문학이 놓여 있어야 할 자리를 고민한다. 근대 문인들의 월경에 대해 장황한 말을 늘어놓는 것도 같은 이유다.


먼저, 이광수. 그의 문학에 나타난 지리적 지평은 날로 확대되어 갔다. 처음에는 조선에서 일본 본토로, 나중에는 만주를 거쳐 동아시아와 태평양으로. 김연수의 산문을 읽다보면 비평가 기질이 다분하다는, 그것도 김윤식 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느낌이 든 적이 왕왕 있다. 이광수에 대한 그의 분석도 상당히 날카롭다. 문학적 배경과 일본제국주의의 확장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적 감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한낱 국내적인 감각이다. 그것도 친일로서 말이다. 그러니 이 월경은, 가짜다.


다음은 이상. 김연수의 이상에 대한 비상한 관심은 이미 출세작 <꾿빠이, 이상>에서 확인된 바 있다. 이 책에서도 그는 적은 지면에 나름대로 치밀한 고증을 거쳐 이상이 넘어서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말한다. 그런데 나는 이 책에서 유일하게 이 대목만큼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이상이 “오들오들 떨면서 암흑 속에서 조금 더 앞으로 나아” 갔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이상이 경계선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했다고 본다. 그는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는 도쿄에 가면 근대의 원본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서울의 근대는 한낱 모방일 뿐이었다. 그러나 가서 본 것은 그것도 모방일 뿐이라는 것. 그러면 우리는 모방의 모방이 되고, 모방이 모방한 것을 찾아가면, 그것이 모방한 것을 또 찾아야 하는 미로에 갇힐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이상은 정직했다. 넘어서려 했으나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이상이 자살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절망의 자리에서 파열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사량과 김수영. 김연수가 보기에 이들이야말로 온몸으로, 조금씩, 국경을 밀어낸 작가들이다. 일본어로 작품을 쓰던 김사량이 태항산의 조선의용군을 찾아나선 것은 우리말로 작품활동을 하기 위해서다. 봉쇄선 저쪽에서는 한글로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은 아직은 미래의 언어다. 그런데 김사량은 바로 그것을 선취하기 위해 선을 넘어섰다. 김수영이야 새삼스러운 설명이 필요 없다. 그야말로 가장 예민한 월경의식이 있는 작가였으므로.


이쯤에서 우리는 김연수의 문학관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여행할 권리가 월경을 꿈꾸는 문학과 같다는 그의 말에 동의하는 이라면 더 그러리라. 너무 조급해하지 말기를. 금문교를 바라보며 쓴 단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버클리 쪽에서 금문교를 바라보면 감회가 다르단다. “동양인이라면 누구라도 금문교 너머의 태평양과 그 너머의 땅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가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그 금문교 너머에 있을 테니까.” 그러니 금문교에는 수많은 이민자들의 목소리가 새겨져 있을 터다. 김연수가 보기에 문학은 “그런 목소리를 외부로 드러내는 작업이다”. 억압된 것들의 귀환을 촉구하는 것이 문학이라는 말이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존재가 그 목소리로 증명된다. 반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들, 즉 입술이 없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대신해서 말한다는 점에서 문학은 본디부터 정치적이다.”


월경하는 문학은 대신 말해주는 문학과 동의어이다. 샤먼은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 우주여행을 한다. 그는 억울한 이의 말을 대신하는 공수를 내린다. 문학과 여행은 어찌보면 범인에서 샤먼 되기인지도 모르겠다.


자고로 문학이란 그 어떤 경계에도 갇히지 않은 정신의 소산이다. 그것이 국민문학이든 민족문학이든 근대문학이든 경계를 긋는 것이라면 거부하고 넘어서야 마땅하다. 진정한 여행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존재의 한계든 국경이든 대기권을 돌파하는 로켓의 폭발력으로 돌파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그랬다. 여행을 꿈꾸었을 때 우리는 늘 긴장했고 불온했고 기대했다. 이제 다시, 김연수의 말에 귀 기울이자. 그것이 우리의 권리라고 귀띔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경향신문 2011-02-11]

 

▲이권우는

196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은 주로 성남시에서 보냈다. 내세울 것 없는 삶의 이력에서 볼 수 있듯, 책만을 벗으로 삼아 살고 있다. 경희대 국문과를 나왔고 서평전문잡지 ‘출판저널’의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이때의 이력을 근거 삼아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칭하며 세상에 책을 알리는 일을 해왔다. 그동안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죽도록 책만 읽는>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