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밥값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짐
내 짐 속에는 다른 사람의 짐이 절반이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가지 않으면
결코 내 짐마저 지고 갈 수 없다
길을 떠날 때마다
다른 사람의 짐을 멀리 던져버려도
어느새 다른 사람이 짐이
내가 짊어지고 가는 짐의 절반 이상이다
풀잎이 이슬을 무거워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내 짐이 아침이슬이길 간절히 바랐으나
이슬에도 햇살의 무게가 절반 이상이다
이제 짐을 내려놓고 별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지고 온 짐덩이 속에
내 짐이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비틀거리며 기어이 짊어지고 온
다른 사람의 짐만 남아 있다
신작시집으로 열번째 시집을 낸다. 세상에는 가도 되는 길이 있고 안 가도 되는 길이 있지만 꼭 가야 하는 길이 있다. 나는 이제야 그 길이 시와 시인의 길임을 확신한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남기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대부분 짧다. 침묵의 절벽 끝에 한 채 서 있는 작은 수도원처럼 시는 묵언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그 무엇임을 새삼 깨닫는다. 지금까지 써온 시보다 앞으로 쓸 시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부신 오늘 아침을 맞이한다. - 2010년 11월 정호승
창비시선 322
정호승 “시련은 파도처럼 왔다 가는 겁니다”
열번째 시집 <밥값> 펴낸 정호승씨
마른 멸치처럼 구부러진/ 구순의 아버지/ 팔순의 어머니하고/ 멸치를 다듬는다/ 떨리는 손으로/ 파도에 넘어지면서 / 멸치 대가리는 떼라는데/ 왜 자꾸 안 떼느냐며/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느냐고/ 구박을 받으면서/ 파도에 자꾸 넘어지면서"(‘파도’ 전문)
시인 정호승(60)이 최근 펴낸 열 번째 시집 <밥값>(창비 펴냄)에는 이런 시가 실려 있다. 부모님의 집에 작업실을 두고 있는 시인은 마른 멸치를 다듬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어쩔 수 없이 초라해져만 가는 인간의 마지막을 읽었다. 말을 듣지 않는 손, 떼내기 힘든 멸치 대가리, 구박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와 시인의 아버지를 거듭 넘어뜨렸다.
그러나 살면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시련을 ‘파도’로 표현한 것은 우리 삶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4일 매경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시인은 “파도라는 건 왔다가도 결국은 물러가는 것”이라며 “그래서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는 인간을 이해하게 합니다. 그 이해를 통해 우리는 위안을 얻을 수 있지요. 이해와 위안, 저는 시의 덕목 중에서도 이 두 가지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호승의 시는 늘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수선화에게’ 부분)며 우리의 등을 토닥였던 시인은 이번에는 “자살하지 마라/ 천사도 가끔 자살하는 이의 손을/ 놓쳐버릴 때가 있다”(‘별들은 울지 않는다’ 부분)며 슬며시 손을 잡는다.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 /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밥값’ 부분)
표제작 ‘밥값’에는 올해로 환갑을 맞은 시인의 삶에 대한 성찰이 녹아 있다. 그는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니 ‘밥값’도 못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남은 삶의 시간 속에서라도 밥값 좀 하고 살아야겠더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밥값’이란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
지금껏 삶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자연에 은혜를 갚거나 종교적 삶을 사는 것 역시 밥값하는 삶이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생의 밑바닥이나 고통의 정점, 즉 ‘지옥’도 경험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성 프란체스코 성인의 옷도, 성철 스님의 옷도 모두 누더기였습니다. 만일 시에도 옷이 있다면 딱 그런 옷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누더기 속에서도 성인(聖人)은 빛이 나듯이, 간결한 언어 속에서도 진심을 담은 그의 시는 빛난다.
[매일경제 정아영 기자 201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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