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길 위에서 책읽기 - 서명숙의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걷기여행>

라라와복래 2011. 3. 14. 01:21
 

 

 

길 위에서 책읽기

제주 올레길, 그것은 하나의 혁명이다  

서명숙의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걷기여행'


글쓴이 l 이권우 | 도서평론가


이것은 혁명이다. 뭇 사람들이 익숙한 것들을 스스로 버렸다. 오랫동안 몸에 익어 결코 털어 내버릴 수 없으리라 여겼던 것들을 훌훌 벗어버렸다. 과거 같으면 불편하고 궁상맞다 여겼을 터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만약 누가 강제로 그러라 했다면 ‘민란’이라도 일어났을지 모른다. 이 혁명은 진보가 아니라 진화이리라. 새로운 것이 더 나은 것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극대화한 것이 가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렸으니. 잃어버린 것, 잊어버린 것, 그러나 오랫동안 영혼 깊은 곳에서 들끓고 있던 것을, 그러니까 퇴화한 것의 가치를 다시 살려 놓았으니 말이다.


본디 혁명이란 이런 것이어야 했다. 일상에서 시작해야 하고, 스스로 동의해야 하고, 변화의 가치를 몸소 체험해야 하고, 다시 동참하고 싶어 해야 하고, 자발로 다른 이들에게 권해야 하는 법이다. 몸으로 하는 것이로되 정신을 황홀경에 이르게 해야 하며, 당장 성과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효용이 없어도 하는 것이어야 하며, 누구를 앞질러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 것이어야 하며, 목표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껴야 하는 법이다. 이 가치를 두루 실현하고 있으니, 어찌 혁명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주 올레길에서 일어난 갖가지 풍경을 말하느라 이리 수선을 떨고 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걸어본 이는 안다. 걷는 것이 얼마나 에로틱한 것인가를. 한발 한발 내디디며 걸어 나가는 것은 대지의 여신을 애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두르면 안 된다. 뛰어서도 안 된다. 타박타박, 걷고 걷는 이에게 대지의 여신은 비로소 자신을 열어 보여준다. 눈에 띄지 않았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걸으며 비로소 발견한 적이 있는 이는 무슨 뜻인지 알리라. 오로지 대지의 여신과 관계 맺고 있을 적에 우리는 일상의 덫에서 벗어난다. 나를 좀먹었던 그것에서 빠져나온다. 처음에야 용서해야 할 사람들이 떠오르겠지만, 끝내 자신을 용서하고 격려한다. 걷다가 불현듯 눈물 흘린 이들은 무슨 뜻인지 알리라.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이 그런 경험을 했다.


참 묘한 일이었다. 걷다보면 그 모든 증오, 미움, 한탄, 연민이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송곳 하나 꽂을 틈 없던 가난한 마음밭이 어느덧 넉넉해지는 듯했다. 흙탕물로 뿌옇던 마음의 호수는 앙금이 가라앉아 어느새 말갛게 되었다.


적어도 걷는 순간만큼은 ‘강 같은 평화’가 찾아들었다. 걷기는 마음의 상처를 싸매는 붕대, 가슴에 흐르는 피를 멈추는 지혈대 노릇을 했다. 자연이 주는 위로와 평화는 훨씬 따뜻하고 깊었다. 보이지 않던 꽃들이, 눈에 띄지 않던 풀들이, 들리지 않던 새소리가 천천히 걷는 동안 어느 순간 마음에 와 닿았다. 개화산 산책은 육체를 단련하는 시간일뿐더러, 정신을 샤워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걷기는 온 몸으로 하는 기도요, 두 발로 추구하는 선이었다.

 

서명숙의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걷기여행>은 한마디로 그것은 혁명, 이라 호들갑떨 수밖에 없는 올레길이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만들어갔는가를 기록한 책이다.


숱한 철학자와 문필가들이 걷기를 찬양하는 글을 썼건만, 이보다 더 공감 가는 걷기 예찬론은 없을 듯싶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산티아고를 다녀와 여행기를 썼지만, 이만큼 벅찬 감동을 주는 순례기는 없을 성싶다. 누구나 긴 여행을, 그것도 도보여행을 다녀오면 영혼의 키가 한 뼘쯤 커져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다른 이를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이 잘못된 것도, 탓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 그이는 달랐다. 우리 모두 영혼의 키가 훌쩍 커지길 꿈꾸었다. 올레길을 걸은 이들은 헤니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듯. 그녀가 던진 한마디 말이 우리에게 안긴 선물이 너무 크니까.


헤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참 행복했고 많은 것을 얻었어. 그러니 그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줘야 한다고 생각해. 누구나 우리처럼 산티아고에 오는 행운을 누릴 순 없잖아. 우리,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각자의 까미노를 만드는 게 어때? 너는 너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머리에 번개를 맞은 기분이었다. 만들어져 있는 길만 길이라고 생각하던 나. 우리나라엔 왜 아름다운 걷는 길이 없나, 불평만 일삼던 내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찾아왔다. 아, 내가 직접 길을 만들 수도 있구나.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어릴 적 걷던 내 고향 제주의 길을 내내 떠올렸는데…그곳에 길을 내면 되겠구나. 제주 올레의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우리는 늘 늦는다. 너덜너덜해져 더는 버틸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이도 그러했던 모양이다. 지치고 힘들고 쓰러질 때가 되었을 적에 “세상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도보여행길”이라는 말에 만사 제치고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 도대체 800㎞를 걷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리고 거기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더불어 거기서 보는 풍광은, 거기서 온 몸으로 부딪치는 자연은 또 무엇일까. 그런 생각으로 그이의 산티아고 기행을 보면 흥미로울 터다.


평소 등산이라는 말보다는 입산이라는 말이 좋았다. 오른다는 말은 다분히 정복의 혐의가 있다. 산을 대상으로 삼고 이용만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입산은 어딘가 겸허해 보이며 내향적이다. 들어간다는 것은, 버린다는 것과 유사하며 만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먼 길을 걷는 기분이 이와 유사할 듯하다. 그이는 걸으면서 깨달았단다. 이 순례길을 걷는 것은 브레이크 타임을 보내는 것임을. 길을 걸으며 삶의 새로운 길을 고민하니 “우리는 길 위에서 길을 묻는 순례자들”이라는 점을. 걸으며 이 정도는 깨달아야 “길을 걷는 것이 행선(行禪)이요, 묵상이요, 기도였다”고 말할 수 있는 법이다.


산티아고에서 돌아와 오랫동안 걸으며 풍광을 즐기고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을 만나는 길을 만들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 길 만들기가 감동을 자아내는 것은 화해라는 열쇠말로 아우를 수 있는 두 가지 일 때문이다. 먼저 것은 그이의 가족사에 얽힌 앙금이 풀려나가는 대목이다. 길을 만들기 위해 나섰는데 생각지도 않게 남동생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유명한 조폭 출신이라 집안의 화근이었다. 어릴 적처럼 서로 아끼는 남매 사이일 수 없었다. 워낙 제주도에 대한 지식이 많은지라 길을 찾아내고 새로 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길을 만들며 닫혀 있던 마음의 길이 열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랜 세월 반목해온 동생과 한길을 바라보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올레길은 열리기도 전에 우리 가족의 깊은 상처를 아물게 했다”. 그래야지, 만약 그러하지 않았다면 길 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다음 것은 첫 번째 올레길을 내며 두 마을 사이의 오래된 갈등을 씻어낸 일이다. 한 오름을 두고 시흥리 쪽에서 오르면 말미오름, 종달리 쪽에서 오르면 알오름이라 했다. 이유가 있었다. 해녀싸움이 마을싸움으로 변해 두 마을이 오랫동안 대립해 왔다. 말미오름과 알오름을 이어서 첫 올레길로 만들었다.


올레라는 말은 본디 화해와 소통의 뜻을 품고 있었다. 제주에 걷는 길을 만든다 했더니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건축가 김진애가 올레라는 말을 추천했다고 한다. “제주 올래”라는 말장난도 부릴 수 있고, 길이 영어로 표기되면 질이 되는 것도 고려해서였다. 그런데 올레라는 말이 제주에 있었다. 집 마당에서 마을의 거리로 들고나는 곳이 올레였다.


“밀실에서 광장으로 확장되는 변곡점, 소우주인 자기 집에서 우주로 나아가는 최초의 통로가 올레다. 자기네 집 올레를 나서야만 이웃집으로, 마을로, 옆마을로 나아갈 수 있다. 올레를 죽 이으면 제주뿐만 아니라 지구를 다 돌 수도 있다. 제주를 걷는 길에 딱 들어맞는 이름이었다.”


바리데기 이야기는 버림받은 이가 세상을 구한다고 말한다. 서명숙의 올레길 이야기는 떠나 방황한 이가 고향을 새롭게 발견한다고 말해준다. 대부분 사람에게 고향은 떠나야 할 곳이었다. 다른 삶을 살고 싶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숱한 사람들은 그것이 어리석은 판단이었다며 후회하게 마련이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먹여주고 재워준 곳이 얼마나 아늑하고 안락한지 뒤늦게 깨닫게 마련이다. 올레길을 만들며 그이는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다운 제주를 재발견하며 일반적인 어법과 다른 말을 내뱉는다. 흔히 우리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를 운운한다. 그런데 그이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전생에 무슨 복을 지었기에 이런 곳에서 나고 자란 걸까”라고 하니, 고향 예찬으로 이만한 말을 찾지 못하리라. 그이의 말대로 “어쩌면 이곳에 부재했기에, 다른 세상을 떠돌았기에, 이곳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고향을 떠나 부대끼고 휩쓸리며 살았기에 놀멍, 쉬멍, 걸으멍 가는 길, 그러니까 “지친 영혼에게 세상의 짐을 잠시 부려놓도록 위안과 안식을 주는 길”을 닦았는지 모른다.


우리의 삶은 늘 혁명을 꿈꾼다. 이미 낡았고 해어졌고 부러져 있다. 그저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을 뿐이다. 거죽은 축 늘어지고 눈은 퀭해진 자화상. 어찌 이대로 계속 살아야만 하겠는가. 다시 곧추세워야 한다. 다시 충만하게 해야 한다. 다시 활기 넘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속도에 대한 미련을, 성과에 대한 집착을, 물질에 대한 애착을. 길 위에 서야 삶의 혁명이 시작된다. 걸으면 보인다, 자연과 내가. 걸으면 용서된다, 미운 이들과 내가. 걸으면 화해한다, 가족과 나와. 걷는 것은 낡은 허물을 벗고 새 살을 입는 것과 같다.


제주 올레길에 서면, 혁명의 가치를 안다. 내가 바뀌지 않는 사회혁명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나를 바꾸었는데 어찌 사회를 바꿀 수 없겠는가. 나부터 비롯하는 혁명을 꿈꾸는 이라면, 제주 올레길 걷기부터 시작할 일이다. [경향신문 2011-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