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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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드 라 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
무상의 표상, 백골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이주향 | 수원대 교수ㆍ철학
조르주 드 라 투르,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레나’
1640~45년경, 캔버스에 유채, 128×94㎝, 루브르 박물관, 파리
왜 악한 사람들이 잘살죠? 잘사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지? 주변에서 보면 악착같이 돈만 아는 집요한 사람들이 잘사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런 사람이 돈도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겠니? 그건 잘사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기를 쓰고 이악스럽게 사는 거잖아. 각박해지기 위해서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다쳐야 해. 그게 좋니?
문화철학 시간에 한 학생과의 대화입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어도 악착같이 살지 않으면 악착 같은 세상 견디기 힘들 거라는 마음에 힘이 붙을 때는 어떡할까요? 그런 마음이 찾아들 때 들여다보고 싶은 그림이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등불 아래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저 그림을 처음 보면 촛불이 가르는 명암 때문에 왼손을 턱에 괸 채 작은 촛불을 응시하는 마리아의 시선이 먼저 들어옵니다.
그러나 저 그림에 사로잡히면 곧 저 그림의 정신적 힘은 해골에 대한 마리아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저 그림의 매력은 마리아의 오른손에서 옵니다. 해골을 만지고 있는 오른손에 한 치의 두려움도 없지요? 해골이 끔찍하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처럼 그녀의 손은 자연스럽게 해골로 흐르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해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촛불에 씻긴 눈으로 내면을 응시하면서 홀연한 지혜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해골로 상징되는 무상(無常)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아십니까? 무상의 표상인 해골이 무섭지 않은 마음을, 해골 위에 손을 얹고 촛불로 정화의 의식을 올리는 영혼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을!
막달라 마리아는 열정적으로 예수를 사랑한 여인입니다. 값비싼 향유로 예수의 발을 씻긴 여자이고,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보고 처음으로 경험한 여자이기도 합니다. 부활한 예수가 마리아야, 하고 불렀던 그때 그 순간을 경험한 여자지요.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충분한, 충만한 사랑의 힘을 알 것 같지 않으십니까? 그 교감의 경험이 마리아에게 해골 위에 손을 얹고 촛불을 응시할 수 있는 내공을 길러준 게 아닐까요? 그나저나 그녀는 무엇을 참회하고 있지요?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으나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해 또 진정한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늘 열정이 빗나가기만 했던 시간들일 겁니다. 예수를 만나 깊은 사랑에 감동받은 그녀는 이제 열정이 고통이 되고 있는 그녀 같았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깊은 사랑에 이르는 지혜의 향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사실 그녀의 사랑은 하릴없이 짧았습니다. 부활한 예수가 어디에도 없으니 무상한 사랑이랄 수도 있겠습니다. 무상을 인지하고는 있으나 무상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고통이 생기지요? 젊음은 왜 이리 짧고 사랑은 왜 그렇게 빠르게 가냐고 탄식하게 되는 겁니다. 마리아는 다릅니다. 짧은 순간에 평생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한 마리아는 무상을 받아들이고 있어 무상에 시달리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지혜라고 하지요. 책상 위에 십자가가 있고, 예수를 사랑한 여자 막달라 마리아가 나와도 저 그림은 불교적입니다. 내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실제로 남방불교에서는 해골을 앞에 두고 관(觀)을 합니다. 관(觀)이란 보는 것입니다. 보긴 보는 건데,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 마음으로 깊이 이해하는 것을 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무시무시한 백골을 앞에 두고 관을 하지요? 백골이 무서운 것은 백골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백골은 나의 미래이고, 나는 백골의 전생입니다. 살아보면 산 게 없는 백골 같은 인생, 백골 위에 손을 얹고 기원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최고의 학벌일까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경제력일까요? 혹 무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와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지혜인 것은 아닐까요?
슬픔이 밀려들 때는 해골을 만지고 있는 저 그림을 보십시오. 그러면 영혼의 촛불이 지금 내가 고민하는 문제가 얼마나 시시한 것인지를 밝혀주면서 문제를 객관화시켜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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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라라와복래] 마리아 막달레나는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는 ‘전교의 성녀’로 묘사되었는데, 10세기경부터는 ‘속죄의 성녀’로 그려지면서 주로 해골이나 십자가, 펼쳐진 책과 함께 등장합니다. 라 투르가 그린 ‘마리아 막달레나’는 모두 네 작품이 있습니다. 각 작품이 그려진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아서 루브르 측은 자기네가 소장한 작품이 가장 나중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주장합니다만, 1630-35년 사이에 그려졌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인 듯합니다. 구글에서 ‘georges de la tour the penitent magdalen'로 검색하시면 자세한 내용이 담긴 웹문서들이 뜹니다.
The Repentant Magdalen
1635,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 |
Magdalen of Night Light
1630-35, 파리 루브르 박물관 | |
Magdalen with the Smoking Flame
1640,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 |
The Penitent Magdalen
1638-1643,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
마리아 막달레나(라틴어_ Maria Magdalena)는 갈릴래아 출신이며 고향이 막달라(Magdala)이므로 ‘마리아 막달레나'(막달라 여자 마리아) 또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불려집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를 따르던 여성들 가운데 항상 첫 번째로 언급되죠. 4세기경 영지주의 문서에 <마리아 막달레나 복음서>도 있으며, 이외에도 마리아 막달레나를 둘러싼 전설은 매우 다양하고 흥미로워서 소설 <다빈치 코드>의 모티프로도 등장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모두 지켜 본 증인인 동시에, ‘참회의 성녀’로 수많은 전설로 덧씌워졌습니다. 591년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창녀였다고 강론했는데요, 이 이미지는 베드로를 받드는 사도권의 남성 우월주의를 내세운 로마 가톨릭 추종자들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하며,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의 사도’로 격상시켰습다.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는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화가입니다. 그에게는 국왕 루이 13세를 비롯하여 많은 유력가 후견인들이 있어 부와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이런 그가 1915년 그 가치가 재발견되기까지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던 것은 그의 악행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난한 제빵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 라 투르는 그의 재주를 알아본 로렌 공의 후원과 신교도와 구교도 종교전쟁의 혼란을 틈타 여기저기 땅을 빼앗아 큰 부자가 되었는데, 거기에 그친 게 아니라 자기 재산을 지키려고 끊임없이 주위 사람들과 분쟁을 일삼았으며 빈번히 농민들에게 린치를 가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1652년 그의 행위에 분노한 농민들의 손에 가족 모두와 함께 몰살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라 투르의 작품이 그의 삶의 행적과는 달리 고양된 종교적 경지에 이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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