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사랑은 사랑의 부족입니다 - 고은

라라와복래 2011. 7. 13. 12:58
 

 

 

사랑은 사랑의 부족입니다

_ 고은


5월이었습니다 그 다음 6월이었습니다

석곡대 석곡 꽃송이 피어왔습니다

더 가노라면

잔 어수리 흰 꽃들 피어왔다 피어갔습니다


이런 날인데요

해설피

바람 을스산스럽습니다


이제야 가만가만 알아버렸습니다


세상은 

세상의 부족(不足)입니다

사랑은 자못

사랑의 부족입니다


나 어쩌지요


수십년 전 그날로

오늘도 나는 감히 사랑의 떨려오는 처음입니다

다리미질 못한 옷 입고

벌써 이만큼이나 섣불리 나선

S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허나 나 아직도 이 세상 끝 사랑을 잘 모르고 가기만 하며 갑니다  

 

상화 시편

행성의 사랑   

 

고은 지음

창비 펴냄

2011-07-11


고은 시인이 작품활동 53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연시집 <상화 시편 - 행성의 사랑>을 발표했다. 사랑에 행복해하고 애달파하는, 사랑을 그리워하고 사랑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한 남자’로서의 시인의 모습이 진솔하게 담겨 있는 시집이다. 시인의 소소한 일상은 물론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시인이 되기까지의 세월과 사유의 과정을 담은 시편들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나아가 인간의 사랑 속에서 시간의 무한성과 우주의 약동으로 확장되어나가는 깊이 있는 주제의식에서는 대시인의 풍모를 한껏 느낄 수 있다. 고은 문학의 또 하나의 기념비적 성과라 할 만하다.


고은, 시 인생 50년 만에 사랑을 고백하다

아내와의 30년 애정 녹인 연시집 ‘상화시편’ 펴내


“가만히 돌아다본다. 그와의 삶은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이상이다. 어떤 현실의 작용도 그 이상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했다.”


누가 결혼생활에 대해 이런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을까. 사랑과 결혼을 둘러싼 이상은 결국 권태와 실망의 현실로 수직 낙하하는 법. 한데 그런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 사랑이 있다. 고은 시인(78)이 아내 이상화씨(64·중앙대 영문과 교수)와 나눈 30여 년의 사랑이다. 고은 시인이 시력 50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에게 보내는 연시집 <상화시편>(창비)을 발표했다.


“아내가 없었으면, 아마 지금까지 나는 살아 있지도 못할 거예요. 십수년 전에 벌써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돌아갔을 걸. 상화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닙니다.”

 

연시집 <상화시편>을 내고 6일 기자간담회를 연 고은 시인은 “예정에는 들어 있지 않던 특이한 시집”이라고 쑥스러워하면서도 “사랑에 추억은 없다. 사랑은 늘 현재진행형이다”라고 말했다.


“정신의 삶을 만들어주고 영감을 이끌어주는 영감의 화신, 시의 분화를 조절하는 분화구, 항상의 옹호자이자 냉엄한 비판자”인 아내를 향한 노시인의 애정은 곡진하다.


‘해가 진다/ 사랑해야겠다/ 해가 뜬다/ 사랑해야겠다 사랑해야겠다// 너를 사랑해야겠다/ 세상의 낮과 밤 배고프며 너를 사랑해야겠다’ (‘서시’ 전문)


‘상화는 명사가 아니다/ 동사이다/ 펄펄 살아/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나/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나// 아니 어디에 있나// 나에게 상화는 명사도 동사도 아니다// 어디에 있나/ 어디에 있나// 아, 나에게/ 상화는 허사(虛辭)이다/ 불러도/ 불러도/ 그가 없다’(‘허사’ 일부)


여든을 앞둔 나이에 연시집을 쓴 이유는 “선무당처럼 뭐가 내려서”다. 1974년 아내와 처음 만나고 1983년 결혼한 시인은 1980년대 후반쯤 연시집을 내려고 했다. 사랑의 흥분과 열기, 결혼이란 일상이 주는 새로운 기쁨이 생생한 시기였다. 아내는 시국이 어지럽다면서 만류했다. 그 후 가끔 쓴 연시는 책상 서랍 여기저기에 들어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봄 30권의 장시 <만인보>를 완간한 뒤 사랑시가 막 쏟아졌다.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긴 아내가 이번에는 ‘묵인’했다. 묵인했을 뿐 아니라 불을 질렀다.


이 시집의 첫 장에는 올해 결혼기념일(5월 5일)에 아내가 보내온 연시가 실려 있다.


‘어느 별에서 왔느냐고/ 불쑥 묻지 말아요/ 어느 별에서 왔기에/ 우리의 사랑 이리도 끝없고 바닥도 없는 것이냐고/ 다그치며 묻지 말아요// 이 행성의 한 점에서/ 내가 당신에게로 갈 때/ 이 행성의 한 점에서/ 당신은 내게로 온 것이에요// 동시행동이었어요’(‘어느 별에서 왔을까’ 일부)


자신의 시가 연시집에 실린 걸 안 아내는 “왜 허락도 받지 않고 맘대로 실었느냐?”고 했단다. 남편의 대답은 “뭘~”


“아마 20년 전에 연시집을 썼다면 훨씬 정열적이고 몽환적이었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일상이 많이 담긴 생활시가 됐어요.”


시집에는 두 사람의 ‘역사’가 실려 있다.


‘1974년 겨울/ 그녀의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 1979년 긴 편지를 몇통째 받았습니다 (… ) 기어코 1983년 결혼 이래/ 아내의 긴 편지와 좀 덜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아내의 편지’ 일부)


시인은 “이상화가 먼저 나를 결정해 버렸다. 고아처럼 떠돌던 나를 ‘저게 나다’라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유신 말기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시인은 출옥 이후 신학자 안병무 박사의 자택 정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83년 5월5일 이래/ 해마다 5월의 신부를 본다/ 아니다/ 미리미리/ 2189년 5월의 신부를 본다/ 어떤 저승도 필요없다/ 기어이 해골의 결혼식에 이르기까지/ 5월의 신부를 본다’(‘5월의 신부’ 일부)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늦깎이 결혼을 한 시인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진짜 사랑에 빠진다.


‘스무살의 사랑 내 것이 아니었다/ 소월이나 네루다의 것이었다/ 스무살도/ 서른살도/ 사랑보다/ 허무가/ 허무에 앞서/ 죽음이 내 것이었다 (… ) 쉰살 지나/ 네가 사랑하는/ 내가 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참을 수 없이/ 내가 너를 더 먼저/ 사랑하기 시작한다는 착각의 내일이 바로 닥쳐왔다’(‘지각’ 일부)


“나는 세상사의 모든 부분에 갈등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상해. 나와 아내 사이에는 갈등이 없어요. 싸울 일도 생기는데 한쪽이 슬쩍 비켜서버리면 싸움이 안 되거든.”


사적 인간으로 돌아간 ‘이상화의 남편’ 고은 시인은 어느 때보다 강하고 근사해 보였다. 한 인간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어야 국가와 민족, 인류를 사랑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집 표지의 꽃무늬는 몇 해 전 아내의 생일에 직접 그려서 선물한 유화다. 분홍과 주황이 흰색 및 회색과 어우러진,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꽃밭”의 이미지가 그의 마음이다.


고은 시인은 이번에 연시집과 함께 그의 오랜 시적 맥을 잇고 있는 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창비)를 동시에 냈다. [경향신문 한윤정 기자  2011-07-07]

 

일흔여덟의 고은 시인이 열네 살 연하의 아내인 이상화 중앙대 교수에게 바치는 시집 <상화시편>을 냈다. 결혼 29년차인 고은 시인은 “매일 일상이 여전히 감동이다”라고 말했다. 1983년 결혼식 당시의 고은 시인과 이상화 교수 부부.

 

내 변방은 어디 갔나

고은 지음

창비시선 332   

2011-07-11

 

시인은 바람 같고 폭포 같은 목소리로 우리시대의 한복판에 서서 시대와 맞서고 시대를 넘어서는 ‘큰’ 시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끊임없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 시 쓰기를 꿈꾸는 시인의 모습이 중단 없는 갱신과 변화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도저한 시정신을 확인하게 한다.


 

내 변방은 어디 갔나

_ 고은


어쭙잖구나


삼천리강산이 모조리 서울이 되어 간다

오 휘황한 이벤트의 나라

너도나도

모조리 모조리

뉴욕이 되어 간다

그놈의 허브 내지 허브 짝퉁이 되어 간다


말하겠다

가장 흉측망측하고 뻔뻔한 중심이라는 것 이것이 되어 간다


서러웠던 곳

내 마음의 개털 바닥

해걸이 명자꽃이 똑똑하던 곳

무식한 아버지

묵은 밭 어둑어둑 갈던 곳

소작료 37제로 뼈 빠져 버린 곳

썩은 한숨의 곳

커다란 달밤

누군가가 그 달밤에

식칼 갈아 허공 포 뜨며 번뜩이던 곳


두고 온 그곳

 

내 변방은 어디 갔나

 

시인 고은, 두 편의 시집 출간기념 기자간담회 현장

 

 

지난 6일 오후 12시 청계광장 옆 한미리에서 열린 세계적인 시인 고은의 <상화시편 : 행성의 사랑> <내 변방은 어디로 갔나> 출간기념 기자간담회가 있었다.


고은(78) 시인은 날렵한 흰색 맥고(麥藁)모자 차림이었다. 겸연쩍은 듯 꺼낸 첫마디는 "막걸리부터 한 잔 주소."

 

 

이날 시인은 두 권의 시집 <상화시편 - 행성의 사랑>과 <내 변방은 어디 갔나>를 동시에 펴냈다. 자신도 정확한 숫자를 모를 만큼 평생 160권 넘는 시집을 낸 그에게 두 권 동시 출간이 무슨 대수랴마는, 이번 시집은 좀 각별하다.


<상화시편>은 그의 53년 문학 인생 첫 연시집이다. 1983년 이래 28년간 결혼 생활을 함께 지켜온 아내 이상화(64·중앙대 영문과 교수)에게 바치는 118편의 사랑 시편. 표지 그림도 직접 그린 '꽃밭'이다.


팔순을 코앞에 둔 나이에 연시집을 펴내는 것이 조금은 민망한 듯, 시인은 미리 적어온 글을 읽었다.


"우주에서는 사사로운 것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고 있는 인류에게는 보편적 가치인 것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사랑이다. 이 만용을 용기로 삼아, 한 인간이 또 한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받는 감동을 억제할 수 없어 이렇게 됐다."


그러고는 예의 격정적인 어조로 시 한 편을 읽었다.


  거기 간다

  아내의 잠 속 어느 곳


  지금의 소쩍새가 아닌

  태초의 소쩍새가 운다

  지금의 소쩍새가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마저

  태초인 소쩍새가 운다


  사랑은 시원을 애도한다


  _'아내의 잠' 전문

 

시인은 '지속적 감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티끌 같은 시간들의 집적"이라 답했고, 왜 가령 10년 전이 아니라 지금 썼느냐는 질문에는 "그때는 아내가 말렸다"며 웃었다.


극장에서 좋은 영화를 보고 받는 감동은 일종의 사건이지만 사랑은 사건이 아니라는 것. 한 30년 가까이 살면서 일상의 사소한 티끌 같은 시간이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시인에게는 '지속적 감동'이라는 것이다.


또 아내와 결혼했던 1980년대는 (군사정권 치하의) 엄혹했던 시절이라 사랑시를 쓸 생각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썼어야 더 좋은 연시가 나왔을 것 같다는 농담도 했다. "지극히 사적(私的) 고백 아니냐"는 농담성 힐난에는 "모든 행위는 다 사적이며, 인류의 모든 예술은 모두 사사로운 행위에서 나왔다"고 일갈한 뒤 "아름다움(美), 진(眞), 지(智)의 출발은 모두 사(私)!"라고 힘줘 말했다.


시인은 몇 년째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됐지만, 그때마다 민망한 소동만 일고 말았다. 시인 입장에서는 '집착'으로 보이는 것이 가장 큰 부담. 관련 질문만 나오면 손을 휘휘 젓기 일쑤다. (상이 발표되는) 올해 10월에는 어디에 있겠느냐는 질문에는 "정선 명예시민이니 강원도에나 가 있을까나"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