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홍사성 시집 <내년에 사는 법>에서

라라와복래 2011. 8. 15. 10:35

홍사성 시집

내년에 사는 법


책만드는집

2011-06-27

 

 

 

홍사성 시인(60)이 등단 4년 만에 낸 첫 시집이다. 젊은 날 출가를 결심할 만큼 독실한 불교 신자이자 불교방송 PD와 간부로 오랫동안 방송계에 몸담았던 그는 현재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펴내는 문학계간지 <유심>의 주간이다. 그의 시들은 불교적 사유와 깨달음, 일상에서의 소박한 실천을 담백하고 진솔하게 담아낸다.

 

목어(木魚)


속창 다 빼고

빈 몸 허공에 내걸었다

원망 따위는 없다

지독한 목마름은 먼 나라 얘기

먼지 뒤집어써도 그만

바람에 흔들려도 알 바 아니다

바짝 마르면 마를수록

맑은 울음 울 뿐


화신(花信)


무금선원 뜰 앞 늙은 느티나무가

올해도 새순 피워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인즉 별것은 없고

세월 밖에서는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말만 다를 뿐 같은 것이라는 말씀

그러니 가슴에 맺힌

결석(結石) 같은 것은 다 버리고

꽃도 보고 바람 소리도 들으며

쉬엄쉬엄 쉬면서 살아가란다


응석


부처님 나이쯤 되면

머리카락은 파뿌리처럼 하얗고

얼굴에는 검버섯이 잔뜩 피어야 할 텐데

해인사 부처님은 천 살이 넘었다면서

머리는 여전히 새까맣고

피부도 아직 팽팽한 그대로시다

매일 싱싱한 과일이며 꽃 공양 받으셔서 그런가

밤마다 염색하고 보톡스라도 맞으셨나

그런 좋은 방법 있으면 좀 가르쳐주시지

귀엣말로라도 슬쩍 일러주시지

그 비방을 이미 팔만대장경에 새겨놓으셨다고?

아이쿠, 그걸 언제 다 읽나!

평생 해인사에 살던 이름난 큰스님들도

다 못 읽고 입적했다는데…

그러지 마시고, 오늘 밤 꿈속에서 찾아뵈오면

물었던 사탕 빼 손자 입에 물려주듯이

자상하게 일러주시지

제발 좀 그렇게 해주시지

염치없지만 응석 부리듯

오체투지로 삼 배, 오체투지로 백팔 배.


내년에 사는 법


불황으로 회사에서 목이 잘린 사내가 방구석에 처박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가 그것도 지겨워지자 책꽂이에서 <벽암록>이라는 어려운 책을 꺼내 보았는데 거기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나

옛날 마조 선사라는 분이 나이 들어 골골하는 신세가 됐는데 그 절 원주가 찾아와 “요즘 법체 청안하신지요”라고 문안하자 선사는 웃으면서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야”라고 대답했다나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알 수 없어 늙은 호박처럼 쭈그러진 암자 노스님에게 물어보았더니 스님은 무심한 듯 눈을 감고 “오늘 죽어도 좋고 내일까지 살면 더 좋고”라고 말해주었다나

그는 섣달그믐 밤 문밖으로 나서다가 찬바람 불어와 호롱불마저 꺼져버린 듯 되레 답답한 생각이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마침 그 때 비로드보다 검은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 새로 돋아나고 있었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