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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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해바라기’
해를 등진 해바라기
이주향 | 수원대 교수ㆍ철학
‘두 송이 해바라기’
1887년, 캔버스에 유채, 43×61㎝,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진정으로 사랑을 나누는 존재를 솔메이트(Soulmate)라고 하지요. 솔메이트는 나를 나 되게 하는 존재입니다. 해바라기의 솔메이트는 태양, 태양입니다. 박두진의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는 해바라기가 사랑한 해일 겁니다.
‘해바라기’라는 말, 참 예쁘지요? 해를 바라 해바라기, 아닙니까? 그 말은 영어의 선플라워(Sunflower)보다 훨씬 은유적입니다. 해바라기의 노란 잎은 해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환희의 흔적일 겁니다. 그 노란 음에 도달하기 위해 고흐는 그렇게 많은 해바라기를 그렸나봅니다.
저 해바라기는 노란 음으로의 여행의 첫발이랄 수 있는 해바라기입니다. 두 송이의 노란 해바라기가 별밤 같은 배경의 터키블루로 인해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해를 닮은 둥근 얼굴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바람에 쓸리고 쓸려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었다고, 태양에 도달하기 위해 나는 바람을 맞고 또 맞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흐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외톨박이 화가야. 누구도 내게는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이글거리는 태양마저도 나를 보고는 외면한다. 내 심장은 항상 사랑과 열정으로 고동치는데, 그야말로 고독한 외침일 뿐이구나.”
그래서 저 해바라기, 보고만 있어도 바람의 냄새가 나나 봅니다. 저만큼 피어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을까요? 그 고독과 상처의 시간을 햇빛을 빨며 흡수하며 그저 해 바라기로 견디며 쓸쓸하게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왔을 해바라기가 어쩐지 고흐 같고 또 ‘나’ 같지 않으십니까?
저 해바라기의 매혹에 빠져 있자니 생은 어쩌면 굴곡 없이 그저 환하고 매끈하게 피어나는 것만이 좋은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이야기는 상처 없이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자기 이야기가 없는 생은 화려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가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해바라기가 언제까지 해 바라기를 하는지? 해바라기는 만개할 때까지만 해바라기를 합니다. 뜨거운 해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만개한 이후부터는 해를 등집니다. 저 해바라기는 해 바라기를 끝내고 해를 등지기 시작한 해바라기 같습니다. 버림받은 해바라기보다 고통과 고독을 삶으로 받아들이며 긍정하며 오롯하게 자기만의 시간으로 침잠한 해바라기 말입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진정한 사랑 후에 남는 것은 고독이고, 고독을 견디는 힘이라고. 그 힘으로 열매를 영글게 하는 거라고.
고흐의 해바라기는 희망의 상징이라면서요? 그렇겠지요. 그러나 그 희망은 꿈은 이루어진다는 그런 유의 희망은 아닐 겁니다. 해바라기가 희망이라면 그 희망은 깊은 절망의 심연에서 살기 위해 붓을 든 자의 비통한 생존의지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불 같은 거! 해바라기라는 이름에 현혹되어 해바라기를 희망의 상징이라고 외워버리는 유의 희망은 희망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름의 이면이 있습니다. 이름은 해바라기인데 해를 등진 해바라기 같은 것! 이름이 빛이라면 그 이면은 어둠입니다. 사람들은 이름을 믿고 이름에 기대하기 때문에 이름에 부응하지 못하면 비난하거나 동정하지만, 사실 성숙은 거기, 빛나는 시간이 끝나고 난 뒤의 시간에서 일어납니다. 빛나고 난 뒤의 시간, 해를 등진 해바라기의 시간이 없다면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영성가 안셀름 그륀은 성공하고 있는 동안엔 삶이 중단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름에서 힘이 빠져야 성찰이 일어납니다.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행세하고 있습니까? 그 이름에서 힘을 좀 빼셨습니까?
그나저나 해를 등진 해바라기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토록 간절하게 해바라기를 했던 시절이 진짜 존재했던 걸까, 하는 생각! 어쩌면 햇빛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었기에 바람을 견디고 견딘 그 간곡했던 바라기의 시간 때문에 기꺼이 해를 등지고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물고기 속에 바다가 있듯 해바라기 속에는 해가 있습니다. 뜨거운 사랑 후에 해를 등지고는 어느새, 해를 닮아버린 자신의 에너지로 고독하게 열매를 영그는 해바라기가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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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송이 해바라기’
아를, 1888년 8월, 캔버스에 유채, 93x73cm, 런던 국립미술관
[이하 라라와복래] 많은 사람들이 고흐 하면 가장 먼저 해바라기 그림을 연상합니다.
고흐의 장례식 때 그의 주치의였던 친구 가세 박사는 고흐의 관 위에 해바라기 다발을 올려놓았다죠. 고흐의 친구 베르나르도 해바라기야말로 고흐가 마음으로부터 꿈꾼 빛을 상징한다고 말했답니다.
고흐의 해바라기는 여러 작품이 있습니다(총 11작품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바라기 송이 수에 따라 ‘두 송이 해바라기’ ‘세 송이 해바라기’ ‘네 송이 해바라기’ ‘다섯 송이 해바라기’ ‘열두 송이 해바라기’ ‘열네 송이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 등으로 구분하여 부릅니다.
고갱은 고흐의 그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아를에 머물렀을 때 그의 방에 장식해 놓은 해바라기 그림을 보고 내심 경탄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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