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아프리카’, 아프리카의 어머니 미리암 마케바(1932-2008). 아프리카의 대지와 창공은 그녀의 목소리로 잠에서 깨어난다고 하죠. 자, 그럼 굴곡 많았던 마케바의 삶을 따라가 볼까요. 글이 길어 여러 노래를 올렸으니 하나하나 들으시면서~~ 노래마다 매력이 넘치니 다 들어보시기를^^
미리암 마케바는 193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도 요하네스버그의 빈민가에서 호사족 원주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작곡가였고 어머니는 가수였죠. 그러나 백인이 지배하는 남아공 사회에서 그녀는 어차피 가난한 검둥이가 걷는 밑바닥 삶을 헤쳐 나가야 했습니다. 열일곱 살에 임신을 해서 결혼하지만 남편은 폭력을 일삼았고 언니와 불륜까지 저질러 갓 태어난 딸을 안고 무당이 된 어머니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음악이 그녀의 인생 항로를 바꿉니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와 교회의 합창단에서 두드러졌던 마케바는 1952년 당시 남아공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재즈 그룹의 보컬리스트로 스카우트되면서 프로 가수가 됩니다. 그 무렵 엘리자베스 여왕이 남아공을 방문했을 때 코러스에서 솔로를 맡는 영예를 차지하고 이후 솔로 가수로서 성공을 거둡니다.
1955년 마케바의 삶에 전환기가 옵니다. 청년 무장조직을 결성해서 아파르트헤이트(흑인차별정책)를 무시하는 운동을 벌이던 넬슨 만델라와 만나 절친한 사이가 된 것이죠. 마케바는 만델라를 통해 그 후 그녀 삶의 빛깔과 모습을 갖추어 나갑니다. 그러던 마케바는 1959년 26살 때 미국으로 순회공연을 떠납니다. 영화 <돌아오라 아프리카로>에 출연하여 토속적인 서정이 깃든 노래들을 불렀는데 영화와 함께 노래가 큰 반향을 일으킨 덕분이었죠. 그런데 미국 체류 중인 이듬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 장례식 참석차 귀국 요청을 하자 남아공 정부는 여권을 정지시켜 미국 땅에 발이 묶입니다. 노래가 불온하다는 것 때문이었죠.
타의에 의해 망명생활을 하게 된 마케바는 1963년 넬슨 만델라가 투옥되자 유엔의 아파르트헤이트 특위의 증언대에 서서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국제적 관심과 지원을 호소합니다. 서방 각국의 반응은 이해관계 때문에 냉담했지만 이때부터 그녀의 주변에는 그녀를 ‘마마 아프리카’라 부르면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마케바는 해리 벨라폰테, 밥 딜런, 조안 바에즈를 비롯한 평화애호가 그룹과 함께 국제 공동체로부터 남아공을 고립시키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투쟁에 주력하는 한편, 자신의 노래에 담긴 아프리카의 전통과 서정을 통해 ‘역사가 없는 대륙’ ‘미개한 대륙’이라는 편견과 선입관을 깨뜨려나갑니다.
마케바는 1965년 노래 ‘말라이카’((Malaika)로 그래미상을 수상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생활은 인권운동을 하느라 엉망이 되고 맙니다. 1964년의 두 번째 결혼은 2년 만에 파탄이 났습니다. 1968년은 미국의 인권운동과 반전운동이 절정에 다다랐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세 번째 남편 스토콜리 카마이클을 만났는데, 그는 급진파 흑인해방 운동가인 말콤X의 추종자로서 말콤X가 암살당한 뒤 민권운동을 과격화시키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카마이클과의 결혼 생활도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마케바는 남편의 정치 이념이나 활동과는 무관함을 변명했지만 그녀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FBI의 미행도 따랐습니다. 견디다 못한 마케바는 투레 기니 대통령의 초청에 응해 기니로 건너가 정착합니다. 카마이클과의 결혼생활은 10년 뒤 종지부를 찍습니다.
마케바는 기니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의 철폐와 함께 만델라의 석방에 온힘을 쏟습니다. 그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비난 여론이 국제적으로 비등해지고, 1970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남아공을 축출한 데 이어 1974년에는 유엔이 제명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로부터 16년 뒤인 1990년 2월 11일 투옥 27년 만에 만델라가 석방되었습니다. 누구보다도 기뻐한 사람은 마케바였습니다. 그녀는 이탈리아 순회공연 중 만델라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후에 마케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델라는 나에게 당신은 노래를 통해 우리 민족의 반인종차별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외교관이라고 말했어요. 나는 그 말이 너무 좋아 밤잠을 이루지 못했죠.”
마케바가 32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그리운 조국 땅을 밟은 것은 1990년 12월. 20대에 조국을 떠나 환갑을 바라보는 59세에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구름처럼 몰려든 동포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곳, 고향을 다시 찾은 것이 행복할 뿐”이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귀국 소감을 말했습니다.
마케바는 일흔이 넘은 고령에도 해외공연을 자주 갖는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하였습니다. 1988년 5월 서울 프레올림픽 쇼에 초청을 받고 우리나라를 찾았는데, 이 위대한 가수를 매스컴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등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긴 인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당시 한국사회였으니 홀대를 받은 게 당연했는지도...
마케바는 2008년 11월 9일 이탈리아 캄파니아의 카스텔 보트루노에서의 공연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이튿날 사망했습니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죽듯 나는 무대 위에서 생을 마치기를 바란다”고 평소 말하던 대로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녀가 심장마비를 일으키기 바로 전에 부른 노래가 ‘파타 파타’(Pata Pata)입니다.
‘말라이카’(Malaika), 해리 벨라폰테와 함께. 그림이 넘 좋아서 다시 올렸습니다~
‘아프리카의 하늘 아래’(Under African Skies), 폴 사이먼과 함께. 노래 마무리가 정말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