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신경림 시집
창비시선
2008-02-22
삶의 사막에 떨어지는 눈물처럼 우리 내면을 따스하게 적셔주는 신경림 시인의 시집. 길 떠남을 통해 삶과 죽음을 애잔하고 감동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자연스러운 어법과 비유로 독자를 시 속으로 빨려들게 하는 힘이 놀랍다.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인생의 아름다움과 슬픔으로 이어지는 길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필요한 삶의 태도를 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펼쳐보아야 하는 시집. 갈수록 메말라가는 시대에 낙타를 타고 떠나는 시인의 목소리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죽어 낙타가 되겠다니요. 낙타가 되어 어리석은 사람의 죽음 길 동행자가 되겠다니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아, 그리하려면 가엾은 사람 모두를 살펴보아야할 텐데…. 낙타가 되어서도 시인 정신은 놓지 않겠다는 말 같군요. 길과 짐과 물맛을 아는 낙타로 환생하는 순간 다시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닌지요. _ 함민복(시인)
인생은 사막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사막을 통과해야 한다. 그 사막에 낙타 한 마리 없다면 얼마나 쓸쓸하고 황폐하겠는가. 시인에게 있어 낙타는 곧 시다. 이 시는 낙타를 타고 영혼의 사막 위를 걸어가면서 고통의 얼굴보다 긍정의 얼굴을 보여준다. 인생의 바닥을 대면하면서 참다운 자신과 만나고 있는 마음이 무위에 이르렀다. 이제 버릴 것은 다 버리고 초연하다. 언젠가 몽골의 고비 사막을 지나다가 야생낙타 한 마리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낙타가 바로 저승길을 오가는 시인이었구나. _정호승(시인)
길 떠나는 자의 운명이 슬프고도 아름답게 녹아든 명편들
<낙타>는 한국 시단의 거목 신경림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은 제목이 암시하듯, 떠남에 대한 시인의 연륜과 시적 사유가 얼마나 깊어지고 확장될 수 있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겪은 시인의 눈은 이제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을 초월하는 풍경을 엿보게 되고, 그것을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_‘낙타’ 전문
생을 다한 뒤 저승길을 갈 때나 다시 이승으로 돌아올 때 ‘낙타’를 타고 돌아오겠다는 표제작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감동적이다. 생의 온갖 영욕과 욕망을 다 경험한 자가 생을 마감하고 다시 시작할 때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적이 없는 낙타를 타고 가고, 그 길의 동행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거나 가엾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서원은 그 자체로 너무 맑고 깨끗한 정신을 보여준다. 마치 윤회의 고리처럼 순환적 구조를 가지는 이 시는 마지막 행에서 자연스럽게 다시 첫 행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반복해서 여러 번 읽을수록 점점 더 그 감동의 깊이가 더해져서 자연스럽게 읽는 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하는 명편이다.
이제 시인에게 삶과 죽음은 일종의 길 떠남이다. 그러나 그 길 떠남은 모든 것을 버리고 벗어나겠다는 초월의지와는 거리가 멀다. 손택수 시인의 말처럼 그의 의지는 “잠시 바람만 불어도 지상을 훌쩍 날아오를 기세”이나 “지상과의 접촉을 잊지 않게 위한 고집스러움”(손택수 ‘추천사’)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세상과 삶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하고 살아낸 시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계이자 삶의 태도이다. 이러한 지상과 삶에 대한 애착은 닳고 닳아 버려진 ‘신발’과 그 신발들과 “뒤섞여 나뒹굴고 있을” 화자를 동일시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늘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아온 생을 어느 순간 “늘 그리워”하고 “마침내 되찾아 나서면서 살았다”(‘나의 신발이’)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한시도 자신을 둘러싼 일상을 잊지 않는다. 심지어 시인은 이미 고인이 된 가족들(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이 자신과 동거해서 행복하다는 상상력을 보여줄 만큼(‘즐거운 나의 집’) 삶에 대한 애착을 보여준다. 게다가 “살면서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과 악취가/ 꿈과 달빛에 섞여 때로 만개한 매화보다도/ 더 짙은 향내가”(‘매화를 찾아서’) 된다는 통찰은 삶과 사람에 대한 강렬한 애정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에 대한 깊은 의지를 통해서만 모든 욕심을 버리고 생을 벗어나는 꿈을 꿀 수 있다는 점을 시인은 알려준다. 그런 뒤에야 “시원스럽게 낡은 몸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새벽이슬에 떠는 그 꽃들’), “내 몸으로부터,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전속력으로 달려나갈”(‘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생을 벗어난 다음 생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면서 순정한 무욕의 정신을 펼쳐놓는다. 저세상도 “이세상에서처럼 터덜터덜 걸어가는” 길이고 이세상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슬프고 또 조금은 즐겁고 조금은 지치기”(‘먹다 남은 배낭 속 반병의 술까지도’)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시인은 삶이 반복될지라도, 이승의 기억이나 꿈을 망각했다 할지라도 “서러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이 잔잔하고 맑은 다짐은 묘하게도 서럽고 뭉클하게 울린다.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 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었다 해도 _‘눈’ 부분
“세상은 즐겁고 서러워 살 만하다”(‘귀로에’)거나 “이룬 것이 없어 아름답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아름답고”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어 아름답고” “내 젊은 날의 꿈처럼 허망해서 아름답다”(‘그 집이 아름답다’)는 시인에 고백에 이르면 이 서러움과 애잔함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먹먹하게 다가온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이러한 길 떠남은 자연스레 여행으로 이어지는데 4부와 5부의 여행시들은 또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터키―평양―네팔(히말라야)―콜롬비아(메데진)―미국(샌프란시스코, 미시건)―프랑스(보르도)―몽골로 이어지는 시인의 여정은 세계 각지에서 느낀 여수(旅愁)를 완성도 높게 시에 담아낸다. 흔히 여행시가 가지는, ‘지나가는 자의 관찰’에서 오는 섣부른 묘사를 뛰어넘어서 생생한 삶의 현장과, 거기서 오는 깊은 깨달음과 해학은 이 시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별미를 선사한다. 이승과 저승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시인의 인식처럼 이 여행시들 또한 ‘이곳’과 ‘그곳’ 역시 쓸쓸하고 아름다운 삶의 현장임을 절절하게 들려준다. 이국의 문물과 삶을 담아낸 여행시에서 이토록 깊은 여운과 시적 깨달음의 순간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시인의 날카롭고도 깊은 시안(詩眼)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3부에 묶인 시들은 인간의 오만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세계화와 문명에 대한 비판(‘공룡, 호모사피엔스, 그리고…’ ‘이슬에 대하여’ ‘Cogito ergo sum’), 인간의 재난과 비극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면서 이를 방치하는 신(神)을 향한 대결의지와 좌절감(‘아, 막달라 마리아조차!’ ‘용서’ ‘하느님은 알지만 빨리 말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저 높은 데서’), 그리고 이와는 정반대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동시 칠수童詩七首’) 등을 보여주고 있어 시 읽기의 고통스러움과 함께 다채로운 재미를 느끼게 한다.
시집 말미에 덧붙인 시인의 산문(‘나는 왜 시를 쓰는가’) 역시 시인의 숨겨진 인생 역정과 시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글이다. 특히 시에 대한 솔직하고 담담한 시인의 고백은 후학과 시단, 그리고 독자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시 작업이야말로 세계화,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고 쾌속으로 질주하는 속에서 시는 어쩔 수 없이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는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빠른 흐름 속에서, 또 세계의 말이 온통 하나로 통일되어가는 세계화 속에서 느린 걸음, 방언은 비단 무의미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 느림과 방언에서 오늘의 우리 삶이 안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줄 빛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과 죽음을 몰아낼 생명수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근래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중얼거리면서.(127면)
시인은 시집 전반에 걸쳐 정주와 떠남,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이곳과 저곳에 대한 사유와 삶의 희로애락을 담아낸다. 한편 한편에서 깊어진 시인의 연륜과 깨달음을 쉽고 편안한 시어와 어법을 통해 전해주고 있다. 여느 젊은 시인들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길을 떠나는 시인에게 시는 인생의 절경과 아름다움, 쓸쓸함과 슬픔으로 이어지는 길과도 같다. 그 길을 따라가다보면 독자들은 삶과 죽음의 의미와 인생의 불가해한 이면에 대해 다시금 되새길 수 있다. 시인은 이제 “꽃이나 열매보다 뒤틀린 가지와 몸통이 더 향기롭고 아름답다”(‘고목을 보며’)는 경지에 이르렀고, “허공의 그림자나 얼룩”(‘허공’)으로 남고자 소망한다. <낙타>는 우리가 ‘지금 이곳’에 살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을 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펼쳐서 숙독해야 하는 시집이다. 점점 더 각박해지고 메말라가는 시대에 낙타와 나귀를 몰고 길을 떠나는 시인의 목소리는 황폐화된 삶의 사막에 떨어지는 눈물처럼 우리 내면을 따스하게 적셔줄 것이다.
추천사
뽀얗게 먼지가 앉은 한 켤레의 신발이 있다. 먼 길에서 돌아온 이 신발은 유난히 지쳐 보인다. 그러고 보니 "너덜너덜 해지고/ 비바람과 흙먼지와 매연으로/ 누렇게 퇴색"(‘나의 신발이’)된 상처투성이 신발이다. 길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듯 세계의 극지와 마음의 극지를 두루 편력한 신발 위의 먼지들은 소멸을 이야기한다. 잠시 바람만 불어도 지상을 훌쩍 날아오를 기세다. 그러나 이 신발의 닳을 대로 닳은 밑창과 주름은 지상과의 접촉을 잊지 않기 위한 고집스러움을 보여준다. 아마도 타박이는 먼지들이 땀에 젖은 신발 가죽 속으로 스며들어 까맣게 뭉친 빛을 내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적멸을 노래할 때조차 시인은 "퀴퀴하게 썩은 냄새"가 밴 지상의 남루한 신발을 버리지 못한다. 티베트에선 사람을 '걸어가면서 방랑하는 자'라고 한다던가. 신경림의 시는 사람을 향해 뻗어간 길이다.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낙타’)) 시인은 이제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한다. 그의 낡은 신발이 바람이 될 때까지, 먼지가 되어버린 지상의 꿈이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_손택수(시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내가 시 쓰는 일에 처음 회의를 느낀 것은 문단에 나온 직후였다. 추천을 받은 작품은 ‘낮달’ ‘석탑’ ‘갈대’ 등 이른바 순수 서정시였는데, 그 무렵 서울은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곳곳에 폭격이나 포격으로 허물어진 집들이 즐비하고 거리에는 팔다리를 잃은 상이군인이며 먹고살 길을 찾아 거리에 나선 부녀자들로 넘쳤다.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로,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절망감이었지만, 내 시는 내 절망감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내 서정시는 내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못 되었다. 내 시가 우리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회의 속에서 서서히 시와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 무렵 내가 즐겨 다니던 곳이 청계천과 동대문 일대의 헌책방이었다. 복개되기 전 청계천은 속칭 ‘나이아가라’라는 술집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동대문이 가까워지면서 술집들은 헌책방으로 바뀌었고, 책방마다 깊은 서재에 숨어 있다가 먹을 것과 바뀌어 쏟아져 나온 책들로 넘쳤다. 학교는 가는 둥 마는 둥 종일 이들 헌책방을 빈둥대는 것이 내 일과였다. 나는 여기서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보아왔던 백석, 임화, 이용악 같은 시인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며, 카와까미 하지메(河上肇), 백남운, 전석담 같은 사회과학자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나처럼 무엇인가를 찾아 방황하는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책을 뒤지고 차와 술을 마시고 밤늦도록 떠들어댔다. 외국 사람들을 흉내 내 독서회 비슷한 것도 만들었으며, 금방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라도 할 듯 설쳐댔다. 나는 세상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가 시시해지고 문학이 우스워졌다. 시 따위 쓰지 않으면 어떠냐 하는 건방진 생각조차 하게 되면서 시에는 더욱 게을러졌다. 이때 어울려 다니던 한 선배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가는 일이 벌어지고, 이를 계기로 겁이 많은 나는 일단 시골로 귀향하게 되는데, 이것이 십여 년 시골살이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이미 자식들 학비와 사업의 실패로 농토를 거의 팔아 없애 농삿거리도 제대로 없을 때였다. 봄이면 안마당에서 작약 뿌리를 캐어 팔아 양도(糧道)를 마련할 정도였다. 게다가 월급쟁이로 평생을 보낸 아버지는 갑자기 닥친 이런 가난에 당차게 맞설 위인이 되지 못했다. 시골집도 내가 마음 편히 지낼 곳이 못되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하는 일 없이 부자가 마주앉아 밥만 한 사발씩 축내는 것에 짜증을 냈으며, 아버지는 할머니의 괄시를 내 탓으로 돌렸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내가 무언가 큰일을 하고 말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어머니의 믿음과 기대였다. 나는 어머니의 믿음과 기대에 부응하려면 진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여러 시도도 해보았으나 단 하나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자연 나는 밖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댐 공사장으로 건달 친구를 따라가 보름씩 신세를 지기도 하고 광산에서 일하는 선배를 찾아가 한 달씩 공밥을 얻어먹기도 했으며, 행상을 하는 친구를 좇아 여러 날 장을 떠돌기도 했다. 실제로 공사장에서 며칠 동안 짐을 져보기도 하고 광산에서 서기 노릇도 했으며 장사를 해보겠다고 신발 따위 물건을 떼어 돌아다녀보기도 했다. 그러나 번번이 일이 너무 힘들어 내 밥벌이는 단명으로 끝났고, 이 무렵 내가 한 일 중 그래도 제법 일다운 일은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거나 개인교습을 해서 잔돈푼을 버는 것 정도였다. 십년 가까운 세월을 거의 하는 일 없이 건달로 살았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쓸데없는 말과 행동으로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어 ‘또라이’ 소리도 예사로 들었다. 이때 나는 밥벌이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어려운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꼈으며, 이 땅이 참으로 살기 힘든 곳이라는 사실도 비로소 절감했다.
하지만 이때 나는 세상을 다시 공부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까지만 해도 농촌에 산다고는 하나 농촌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가령 봄이면 굶고 여름에도 점심은 건너뛰고 아침저녁을 죽으로 견디는 이웃들의 사정이 바로 내 사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역사가 할퀴고 간 자리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바로 이웃 동네에는 같은 날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여남은은 되었으니, 그 동네는 온통 과부 천지였다. 보도연맹이다 부역자다 해서 같은 날 학살당한 사람이 여럿이고 또 그 보복으로 똑같이 죽임을 당하기도 한 것이다. 한동네 살면서 평생 서로 얼굴도 안 보고 사는 사람들도 허다했다.
그 무렵 내게 다시 글을 쓸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글 쓸 기회가 다시 온다면 남이 아닌 이웃들의 정서나 설움, 얘기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다. 그래도 그 십여 년 동안 시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단 한 편도 발표하지 못하면서도 어쩌다 노트 같은 데 몇 편의 시를 끼적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쓴 시들이 ‘눈길’ ‘그날’ 등이다. 친구와 막 영어학원을 벌이고 있을 때, 길에서 우연히 만난 고(故) 김관식 시인한테서 함께 서울 올라가 다시 시를 써보자는 제의를 받고 뛸 듯이 기뻐했던 것도 내가 시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좌다. 그의 말에 별로 무게가 실려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그를 따라 무작정 상경했다. 갑자기 시를 쓰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경하여 십여 년 만에 시를 썼으니 그것이 ‘겨울밤’이다. 이 시가 신문에 나오자 친구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 초기 시에 호감을 가졌던 한 친구는 너무 오랫동안 시를 접하지 않아 감각이 이상해진 것 아닌가라는 투로 말을 했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고 몇 해 동안 ‘시골 큰집’ ‘원격지’ 같은, 시골에 있으면서 언젠가 꼭 쓰겠다고 생각한 시들을 써나갔으니, 시는 그 시대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요 대답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시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데 일정한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도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대화인 만큼 소통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농무(農舞)>(1973)의 시들이 이때 쓴 것들이다. 이 무렵 나는 순수 우리말이라는 개념에로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지 않았나 싶다. 시에서 제목만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본문에서 한자는 철저하게 배제했으며 외래어도 가능한 한 쓰지 않았다. 기회가 있으면 한글 전용이나 순수 우리말을 지키자는 논지의 잡문도 마다하지 않았다.
엄홍길 대장과 함께 북한산에서.
시는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해답이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는 명제에 나는 한동안 충실했다. 또 시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작으나마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도 바뀌지 않았다. 결국 내 시는 반유신, 반군사독재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시는 그 무기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과격한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아름다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시를 쓰고 싶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고, 이것이 드러나면 후배나 동료 들은 나를 문학주의자로 비판하고 매도했다. 나는 이 비판과 매도에 항시 약했다. 결국 내 시는 경직될 수밖에 없었고, 언제부턴가 나는 시를 쓰는 일이 지루하고 싫어졌다. 적어도 신명이 나지 않고는 시를 쓸 수 없었는데, 시 쓰는 일에 나는 전혀 신명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민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민요적 정서를 시 속에 도입해서 내 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평소 민요를 좋아하던 나는 열심히 민요를 찾아다녔고 민요와 관계되는 일도 했으며, 민요적 성격의 시를 시도했다. 그러나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민요는 역시 한 시대 이전의 정서요, 그 말들은 오늘 살아 있는 말로 되살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이 아니었는가 싶다.
<길>(1990)의 시들을 쓰면서 나는 서서히 민요의 중압에서 헤어났다. ‘민요는 우리 것’이라는 고지식한 논리에서 벗어나 배울 것은 배우되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자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배운 또 한 가지는 시 쓰기 역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행위라는 점이었다. 남이 알지 못하는 것,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남이 만지지 못하는 것을 알고 보고 만지기 위해 찾아다니는 일, 그것이 바로 시 쓰기란 점을 민요를 찾아다니는 마지막 단계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한 것을 분명하고 힘 있게 얘기할 때 남도 다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고 나만의 목소리를 내게 되며, 그것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시는 그 시대의 질문이요 대답이란 명제도 그랬다.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해답은 있을 수 없었고,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 이렇게 마음을 정하면서 나는 시 쓰는 일이 조금씩 편하고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통일이나 노동 문제를 다루지 않은 시가 어찌 오늘의 좋은 시가 될 수 있는가라는, 강풍처럼 몰아치던 일부 과격한 질타를 차단하니 시 쓰는 일에 비로소 신명이 났고, 시에 활기도 생겼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뿔>(2002)의 시들을 쓰면서 나는 명확하게 나의 길을 잡게 되었다. 결국 남이 못하는 것을 보고 듣고 만지기 위해, 생각 속에서 현실 속에서 힘껏 내달려, 그것을 남들이 가지지 못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내 시의 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시가 오늘 우리들의 아름다운 삶을 제약하는 여러 조건과 맞서는 일에도 등한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버리지 않았다. 민족이니 민중이니 민요니 하는 것들이 더 이상은 내 시의 족쇄가 되지 않고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바람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생겼다.
그러나 이번 시집 <낙타>의 시들을 쓰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가장 중요한 생각은 시 작업이야말로 세계화,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고 쾌속으로 질주하는 속에서 시는 어쩔 수 없이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는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빠른 흐름 속에서, 또 세계의 말이 온통 하나로 통일되어가는 세계화 속에서 느린 걸음, 방언은 비단 무의미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 느림과 방언에서 오늘의 우리 삶이 안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줄 빛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과 죽음을 몰아낼 생명수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근래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중얼거리면서.
2008년 2월 신경림
*이 글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공저, 열화당 2004)에 실린 산문을 수정한 것이다.
신경림(申庚林)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동국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첫 시집 <농무> 이래 민중의 생활에 밀착한 현실인식과 빼어난 서정성, 친숙한 가락을 결합한 시세계로 한국시의 물줄기를 바꾸며 새 경지를 열었다. 70년대 이후 문단의 자유실천운동·민주화운동에 부단히 참여하여 당대적 현실 속에 살아 숨 쉬는 시편들로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시집으로 <농무><새재><달 넘세><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장시집 <남한강>, 산문집 <민요기행 1·2>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1·2> <바람의 풍경>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공초문학상, 만해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