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고은과의 대화](25) 1학년 담임이 일본군 대위와 사귀었어. 그때 ‘연애’란 단어를 알았지

라라와복래 2012. 3. 10. 18:20

[고은과의 대화](25) 양 세기의 달빛

1학년 담임이 일본군 대위와 사귀었어. 그때 ‘연애’란 단어를 알았지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선생님이 처음 입 맞춘 시대가 음울했던 건 사실입니다. 뒤이어 오는 시대에도 자가 발전할 나이가 못 되는데 구원의 출구가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세상의 흐름이란 앞 사람이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뒤에서 떠밀고 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강물처럼요.


고은 역사의 액체를 말하는군. 그렇다면 역사 속의 순간들은 물방울인가.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도 눈을 똑바로 뜨고 만나기도 하지만 눈 감은 채로 손으로 더듬어서 만나기도 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자신의 시대를 만나는 것도 그럴 수 있겠다 싶지 않나. 흔히 해방을 맞이한 것을 도둑처럼 맞이했다는 것도 전혀 뜻밖이라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지. 변화라는 것도 변(變)의 의미로는 그 의외성과 충동성으로 친다면 혁명의 의미인데 화(化)의 의미는 비혁명적이며 무척 단계적인 것이지. 일종의 자연순환으로서의 화현(化現)인데 가령 더운 습기에 의해서 이렇다 할 근거도 없이 돋아나는 버섯을 증성균(蒸成菌)이라 하지. 오랜 가뭄 끝의 맨땅에 빗물이 고이면 거기에 수많은 버러지들이 우글거리는 것하고도 마찬가지지.


김형수 그 시절의 삶은 선생님의 것이라도 선생님의 의지 이전의 것입니다. 식민지 벽촌의 어린 영혼에게 해방 전과 해방 후라는 것이 얼마나 다를까 싶습니다만.


고은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 것도 이런 시시껄렁한 변화의 일상, 매우 미신적이기까지 한 그 일상이 삶의 동태 대부분을 차지해버리고 말지. 이런 일상을 삶의 극치로 깨달은 것이 고대에는 선종의 마조(馬祖)가 평상심이 도라고 한 그 일상의 경지, 당대에는 알제리의 어린 시절 카뮈의 은사이던 장 그르니에이지. 그 사람의 산문이야 얄밉게도 미문 아닌가.


김형수 장 그르니에에 대한 이해가 한결 쉬워집니다. ‘산문’이 서사의 도구가 아니라 서정적 장르의 수단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준 점 말입니다. 그의 <섬>은 사소한 일상의 기념비 같아요.


고은 그런데 시대의 진폭 역시 거대담론의 대상도 있고, 그에 못지않게 이름 없는 일상사로서의 역사 진행도 있지. 그것을 좋게 말하면 역사의 세목세목이지. 18세기 이래 서구 소설의 장점으로 사물의 자상한 이름들이 명기되는, 그 박물지적 전개가 부럽기도 하지. 이에 견주기 초라한 근대 아시아 소설들의 결함이라 할 명사 빈곤이 있지. 새도 이름 모를 새요, 꽃도 이름 모를 꽃으로 그려내지.


김형수 그러고 보니 ‘이름 모를 꽃’에 거대담론의 무지막지한 완력이 들어 있네요.


고은 그런데 나는 이런 치부이기도 할 결함에서 도리어 또 다른 통찰을 얻어내도 되리라는 예감이 없지 않네. 말하자면 이런 가난이야말로 도리어 본연성의 안빈(安貧)이고 청정한 부(富)가 된다 그 말이네. 역설일지 모르지만 사물에는 본질적으로 이름이 불가능한 것 아닌가. 노자의 비도론(非道論)은 바로 도라는 이름에 갇혀버린 도를 말하지 않나.


김형수 노자의 ‘비도론’ 영향일까요? 선생님은 시의 육체를 구성하는 뼈대도 없이 무상무념의 상태를 드러낸 시가 꽤 많은데요.


고은 사실 세상의 보통명사나 고유명사란 한갓 인간의 장난 아닌가. 이런 장난도 인간 생존의 한계 안에서 허여되는 것이지. 그 인간의 무덤 앞에 세운 불망비의 비명(碑銘) 따위를 그 무덤 안의 해골이야 알 턱이 없는 무효이고 무의미 그것 아니겠는가.


김형수 ‘천은사운’이 그것을 노래하는 시 아닙니까? 명사화되지 말아야 될 세계를 보여준 작품이요.


고은 그래서일까. 지난 1970~1980년대 그리고 20세기 끝 무렵 그렇게도 가열 찬 거대담론 앞에서 차라리 인간 개체는 전체의 파도자락에 묻혀버리지 않았는가. 그것은 우익 전체주의 이쪽의 좌파 전체주의의 대칭이 될 혐의도 없지 않았지. 물론 그 공동체 논리의 자발성을 오해한다면 말이네.


김형수 저는 ‘큰 이야기’는 허황되고 ‘작은 이야기’만 의미 있어 하는, 1980년대 정신을 전복하는 풍조에 상당히 저항적인 편입니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소위 역사의 길이 끊겨 있는 걸 목격해서인지 집단적 신념 체계 자체를 회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고은 나도 자네의 논리 안에서 서성거린다네. 장자 제물편에 나오는 ‘모든 구멍들이 화난 듯이 부르짖는 바람소리’가 그런 실감이기도 했어. 그런데 그 바람소리는 결코 길지 못하지. 끝내 가라앉으면 뭇 구멍들이 텅 비어 모든 소리가 간데없지.

     그림 임상옥 화백


김형수 일제의 욕망이 ‘바람소리’ 같다 하신 거죠?


고은 바로 그런 것이 여름날 폭염이 땅을 태우는 8월 말의 국치일이지만 그 망국의 날을 애통할 수도 없었고 3·1운동이나 6·10만세운동이나 광주학생운동 따위를 기억할 수 없는 일상이 어쩔 수 없이 식민지의 일상을 채우고 있었지. 그러니까 그 뒤의 20세기 후반의 한국현대사 기표들인 8·15, 6·25, 5·18 등은 그날 이외의 수많은 날들의 평시를 사는 일이 삶의 대부분 아니겠나.


김형수 기표란 논에서 우렁을 잡던 황새가 이동하느라 나래를 치는 순간 같다는 건가요?


고은 가혹한 지적이군. 아무튼 식민지의 이면을 지키는 ‘국학’이나 ‘민족’ 그리고 ‘자아’라는 관념들은 관념주의밖에는 미치지 못했지. 민중이나 인간이라는 개념도 그저 사물 속의 사물분자들이 되는 것 아닌가. 그야말로 이름 모를 삶이지. 익명의 일상 말이네.


김형수 현실에서 문학적 요소를 거르고 학술적 요소만 추리는 건 마치 도시들로 세계를 구성하는 인식처럼 허황돼 보입니다. 무의미해 보이는 광대한 벌판이 도시를 낳은 건데 그 어머니를 잊은 고아가 존재적 거점의 전부인 것처럼 하는 것은 우매한 일이라 봅니다.


고은 어쩌면 거대담론으로서의 역사가 지배자나 피지배자의 대국으로 표제화가 되는데 지나쳤다면 그것의 반동으로 미시사가 엄습한 것도 자연스러워. 이를테면 랑케 사관으로 보면 미슐레는 역사가 아니라 이야기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날 학파의 새로운 역사 시각에서는 이제까지의 역사가 거들떠보지 않은 삶과 사물의 시시콜콜을 통해서 ‘역사는 불활이다’고 나설 때의 그 이름 없고 이름 모를 민중의 비정치적 삶과 문화야말로 정치적인 의미를 새롭게 한 셈이지. 역사가 생활의 세부를 배제하는 사건서술이다가 반대로 사건 중심을 해체하는 일은 문학사 풍경에서도 보여지지.


김형수 예를 들면요?


고은 당시(唐詩)가 신명이라면 송시(宋詩)는 해석이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지. 영국 시에서도 옛날 형식이나 운율에 묵숨 건 소네트 이후 존 던의 구어시의 대담성이 나오지. 그게 나중의 주지주의 엘리엇의 고전 구사의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가.


김형수 지금 말씀들은 선생님의 어린 시절과 연관이 되는 겁니까?


고은 뭐랄까 내 어린 시절의 날들은 식민지 체제의 말단이므로 그 당시의 농촌 자연부락 심성들은 하늘이 갠다거나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거나 하는 농사에의 직결사항만큼 정치적일 수는 없었지. 상해임정이 중경임정으로 되는 일 따위는 전혀 몰랐어. 그럴 뿐 아니라 가령 박은식이 말하는 국혼, 국교, 국학, 국어, 국사에의 적극의지 같은 것이 불가능한 의식의 미개 상태이기도 했으니까.


김형수 아, 네.


고은 도시단위나 규모가 큰 지역단위의 공공기관이 아니면 마을들은 경찰 지서의 일본인 경찰이나 초등학교의 일본인 교장과 교사 그리고 어쩌다 왕림하는, 자전거 타고 오는 부내(府內) 일본인 기관장의 위엄을 두려워하는 것이 마을 어른들의 손님맞이였어. 일본인은 하나같이 살결이 희고 조선 농민들이야 하나같이 햇빛을 먹은 구릿빛이었지. 서양의 흑백이 따로 없는 셈이지. 그래서 조선시대 귀천의 사회계급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시대라 하지만 오랜 양반 의식은 결코 사라질 줄 몰랐어.


김형수 물리학에서는 관성도 ‘운동’입니다.


고은 사실 상해임정의 여러 계층도 늘 막판에 가면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고 삿대질을 해대고 임진왜란 이후의 노론, 남인 등의 당파 계보를 드러냄으로써 독립이라는 궁극 목표가 잘 보이지 않는 분열상으로 이따금 시끄러웠어. 이런 고착된 반상병(班常病)은 엄연해서 그 양반 위에 일본인이 있건만 제1의 위치에서 제2의 위치로 내려앉은 대신 그 아래의 상천에의 하대는 더욱 뚜렷했지. 그러니까 일본인 다음 양반 다음 중인 다음 상민 다음 천속의 신분은 근대 표면에 대한 전근대 내면인 셈이지. 실제로 누구나 상대방을 욕질할 때 상놈의 자식이라고 했고 자신은 늘 ‘나야 양반이지’ 그랬으니까.


김형수 지난번에 외세 침탈 중에 봉건 관계가 와해되고 있다고 말한 것을 고쳐야겠습니다.


고은 와해라기보다 변형일지 모르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면마다 하나씩 있던 것이 취학 아동이 늘어나고 전시 교육의 기능 강화를 기함으로써 적당한 곳에 새 학교를 세우기도 했어. 그래서 신풍리 소재의 신풍국민학교에서 일부 마을 아이들을 따로 떼어내 미룡국민학교가 세워졌는데 나는 그 학교 출신 4회에 해당했어. 학교 교사도 4개 교실이고 교장과 교사 그리고 서무직원 등이 하나의 교실에 있었지. 교실들은 벽으로 막지 않고 필요할 때는 두 교실을 하나로 쓸 수 있는 칸막이로 막고 있어서 옆 교실의 큰 소리들이 들렸어.


김형수 널빤지로 칸막이를 했다가 유사시에 트는 마루 교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고은 내 1학년 담임은 규슈 태생의 처녀인 나카무라 요네라는 미녀였어. 그녀의 투피스는 두메마을 아이들의 눈에는 선녀로 보이게 하고 그녀의 일거일동은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선망의 대상이었지. 일본 동화 ‘모모타로(桃太郞)’를 학예회 연극으로 만들 때 소년으로서의 모모타로와 개와 원숭이 그리고 꿩이 나오는데 나는 원숭이 역을 맡게 되었어. 내가 직접 크레용으로 그린 원숭이탈을 걸고 연극을 했어.


김형수 세계는 늘 새로운 사태로 만원이라 하시더니.


고은 전 과목이 다 일본어였지. 일본어를 내리 국어라고 했지. 수업 성적은 그런대로 잘한 셈이어서 음악만이 양(良)이고 다 우(優)였어.


김형수 최고의 성적은 아니셨네요, 히.


고은 전쟁 말기 만주의 관동군 일부가 미국의 오키나와 상륙 다음의 조선 상륙에 대비하기 위해서 내 고향에 주둔하는데 그때의 기무라라는 일본인 대위와 내 담임의 연애가 알려져서 처음으로 ‘렝아이(연애)’라는 단어 하나를 내 단어로 삼았어. 그때 그 대위가 말을 타고 일본도를 차고 학교 언저리에 나타나면 여선생이 그 말 콧등을 쓰다듬어 주었지. 그 말이 주인의 애인을 알아보는 것처럼 제법 머리를 주억거리며 뒷발을 구르기도 했어. 연애라는 것이 동물에게까지 전파되는 것을 알게 되었지.


김형수 ‘키스’를 발명한 사람이 이광수라고 들었습니다. 성적 행위로서의 입맞춤을 <무정>에서 처음 그렸다고 하대요.


고은 그런데 ‘연애’는 중국 송나라에서는 그저 인간 관계의 뜻이었는데 그게 일본 명치 시대 근대어 관념어 만들 때 남녀 관계의 의미로 되었어.


김형수 ‘연애’도 비슷한 시기의 발명품 같습니다.


고은 여선생은 학교 정원 끝에 있는 기숙사를 거처로 삼고 있었는데 방 하나는 일본에서 건너온 부모가 쓰고 한 방은 무남독녀인 그 여선생이 쓰고 가운데가 조촐한 부엌 겸 출입구였어.


김형수 소학교 시절을 어떻게 다 기억할 수 있는지, 참!


고은 교장은 아베 쓰도무라는 일본 육군 재향군인회 소속의 제대자였어. 철저한 천황 숭배로 뭉쳐진 심신의 남자였어. 2학년 담임은 가네무라라는 조선인 교사인데 언제나 일본인 시늉을 모범적으로 했어. 3학년 담임은 역시 규슈 출신의 모리 히데코인데 이 처녀 교사는 군산 개복정에 정미소를 경영하는 집 딸인데 나를 무척이나 사랑했어. 그래서 나하고 씨름도 했어. 내가 지면 “바보야, 너는 무솔리니야” 하고 그때 미국에 항복한 이태리를 두고 나를 비아냥거렸지.


김형수 거칠고 황량한 시대에도 한없이 여린 새싹들의 서사가 없지 않네요.


고은 이에 앞서 내가 1학년 신인 아동으로 4월 1일 봄 학기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일본해군연합함대 사령관이며 해군원수 야마모토(山本五十六)가 필리핀 레이테 섬 상공에서 전선 시찰 중 미 공군의 공중전으로 전사했어. 바로 이 사람이 1년 전인 1941년 12월 8일 미 하와이 선제 공격을 총지휘했어. 태평양전쟁 초기는 일본군의 호주 상륙도 목전에 둘 만큼 오세아니아 바다와 남태평양 뉴기니 솔로몬 군도 등까지 미군이 위축되어 있다가 맥아더 작전의 끈질긴 추구 끝에 필리핀까지 육박하게 되었어. 야마모토는 러-일 해전 총지휘의 도고(東鄕平八郞) 이래 명장이지. 도고는 내심으로 조선의 충무공 이순신을 가장 숭배하는 명치 시대의 ‘군신’이었지.


김형수 다들 국가에, 집단에, 집단 정서에 예속되어 있는지라 일본 군인이 이순신을 숭배했다는 사실이 좀 뜻밖입니다.


고은 나는 일본어 신문으로 소국민신문과 황민신보를 학교에서 받아보고 있었어. 그 1면에 남태평양의 부겐빌 섬, 라바울 섬 그리고 과달카날 섬의 약도가 그려져 있는 전선 소식이 실려 있었지. 그때부터 나는 남태평양과 남십자성에의 이국적인 상상력이 발동하기 시작했어. 또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 등보다 훨씬 뒤늦어서야 아시아 쪽을 넘보아 중국의 청도에 대한 일시적인 점령 조차(租借) 말고는 태평양 중앙의 ‘비스마르크 군도’를 자신의 영토 수역으로 삼은 독일에 대한 관심도 생겨났어.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일본과 한패라는 것도 알게 되어 베를린이나 로마라는 도시 이름도 내 두메아이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지.


김형수 오늘은 구구절절이 걸작입니다.


고은 학교는 정규수업보다 전나무·측백나무 열매 따기와 아주까리 열매 따기로 비행기 대용유 채집에 동원되었고 공습에 대비한 방공호 파기에도 동원되었어. 집에 가면 놋요강, 놋수저 그리고 쇠붙이와 금비녀, 은비녀, 가락지까지 강제로 헌납했고 시멘트 다리의 접속장치인 쇠붙이도 뜯어갔어.


김형수 전 인민 전시동원 체제 환경에서 성숙해가는 아이들을 그린 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고은 내가 2학년 때인 1944년은 오키나와 공격과 일본 본토 공격이 있었는데, 이 무렵 사이판 옥쇄라는 일본군 전멸에 의해서 후방사회는 한층 비장한 상태로 되었지. 모두 다 죽음을 각오하게 되었고 그 죽음이 한없이 미화되었어. 이때부터 일본의 해군 전함이 하나하나 침몰 당하자 일본 대본영은 드디어 예과련(豫科練)이라는 소년병들을 전투기 한 대에 태워 적의 군함에 자살 공격시키는 그 가미카제(神風)의 신화를 만들어내지. 서정주가 그런 가미카제에 탄 소년병의 출정(出征) 송시를 발표할 때였지. 그런데 그 청소년은 경기도 개성 출신인데 그때 자살 공격으로 산화된 것이 아니라 해방 뒤 살아 돌아왔지.


김형수 부족 방언의 마술사라 불리던 거장의 치부가 끔찍합니다.


고은 마을에서도 부녀자들까지 야간훈련을 해야 했어. 어머니가 ‘몸빼바지’를 입고 군사교련을 보리밭에서 받는 풍경은 드문 일이 아니었네. 아버지는 대숲 아래에 방공호를 깊이 팠지. 나는 그 굴 안에 들어가 선사시대의 조상들의 혈거(穴居)를 맛본 셈이었지.


김형수 맹수의 기억처럼 먼 야생의 기슭까지 다녀오셨네요.


고은 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군산의 명치신궁으로 가서 참배하고 매월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엔 전쟁 시작한 8일마다 칙어(勅語) 봉독과 ‘황궁서사’ 등을 열창했어. 찰진 조선 쌀이 아닌 안남미라는 풀풀 날리는 쌀도, 만주의 콩깻묵과 옥수수도 실로 귀한 곡식이었어. 상황의 악화는 그 상황의 하층에서 가장 무거운 것 아닌가.

천은사운(泉隱寺韻)

그이들끼리

살데

골짜구니 아래도 그 우에도

그이들의 얼얼이 떠서

바람으로 들리데.

이제 그이들은

밤 솔바람 소리

차라리 바위 보아

비인 산허리.

가을이 오데.

바위 보아

나앉아 우는 추녀 끝

뜰에 떨어지는 풍경 소리에

그이들끼리

살데.

돌아가 한번 잊은 뒤

도로 가고 싶은

그이들의 얼바람진 산허리

그이들은

살데.

그이들은

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