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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0선](14)
황순원 '목넘이마을의 개'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mhdn/36674와 경향신문’에 동시에 연재되는 작가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0선을 전재합니다. 명단편 선정은 황석영 작가와 문학평론가 신수정 교수(명지대 문예창작과_문학동네 편집위원)가 공동으로 작업했습니다. 황석영 작가는 단편을 읽음으로써 역사서나 경제·사회학 전문서적보다 훨씬 우리의 삶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흔(傷痕)의 인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확인해보려고 지금 여기까지 걸어왔다. 한데 아직도 막막하기만 하다.’(황순원, <말과 삶과 자유>에서)
해방으로 식민지시대가 끝났지만 곧 이어 전쟁이 벌어졌고 한국 현대문학은 휴전협정이 종결된 1953년에 재출발했다는 설은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이는 아마도 분단 고착화 이후 ‘남한 현대문학’의 출발점으로서 타당하게 보인다. 아니 정확하게는 식민지시대를 벗어나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분단시대의 한국문학’인 것이다. 나는 그 시작을 황순원으로 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가 있어서 채워야 할 여백과 새로 나아갈 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하얀 한지에 짙은 묵으로 찍혀진 난의 잎새처럼 그의 세계는 섬세하고 부드럽지만 비바람에 시달린 기개가 엿보인다.
황순원은 1915년 평남 대동군에서 황찬영의 장자로 태어났다. 그는 평양의 전설적인 ‘황고집’으로 알려진 효자 집암(執庵) 황순승(黃順承)의 후손이다. 부친은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서 3ㆍ1운동 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배포 책임자로 검거되어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황순원은 오산중학을 거쳐 숭실중학교를 나왔다. 그는 이 무렵부터 시를 썼으며 열일곱에 잡지 <동광>에 ‘나의 꿈’ ‘아들아 무서워 말라’를 발표하면서 시인이 되었고, 1934년 일본 와세다 고등학원에서 수학하며 이해랑, 김동원과 더불어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했다. 이듬해 중앙일보에 다달이 시를 발표하고 이를 엮은 시집 <방가(放歌)>를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서 간행하고 여름방학 때 귀가했다가 평양경찰서에 한 달간 구류당했다. 1937년 단편 ‘거리의 부사’를 시작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0년 첫 단편집 <늪>을 간행한다. 이 무렵에 알게 되어 평생 친구가 된 원응서의 회고에 의하면 황순원은 일제의 한글 말살정책으로 작품을 발표할 지면 자체가 사라지자 그냥 혼자 집필하여 간직했으며 술자리에서 원고를 낭독하여 들려주곤 했다고 한다. ‘기러기’ ‘황노인’ ‘독짓는 늙은이’ 외에 십여 편의 단편소설을 이 기간에 썼다.
그의 집안은 고향인 대동군 빙장리에 대를 이어온 선산과 논밭이 있었고, 평양 숭덕학교 교사이던 부친은 민족적 개화주의자로 진작부터 도시 중산층으로 살고 있었다. 나의 가족사가 그러했듯이 북한의 급진적인 개혁은 그들 집안에도 생존의 위협을 줄 만했던 것이다. 이때의 체험이 그가 휴전 뒤에 간행하게 되는 북의 토지개혁 과정과 사회 변화를 다룬 장편소설 <카인의 후예>의 배경이 된다. 1946년 온 가족이 월남했고 황순원은 서울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해방 전 빙장리 고향에 은거하며 남몰래 써두었던 작품들이 ‘독짓는 늙은이’로 대표되는 세계였다면, 이남으로 내려온 뒤 해방에서 전쟁에 이르는 기간까지 그가 쓴 작품들은 ‘목넘이마을의 개’ 또는 ‘학’에서 엿볼 수가 있다. 읽히지도 발표하지도 못할 글들을 쓰면서 그는 일제 말의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모국어를 지키려는 각오로 소설가로서의 첫출발을 하게 된다. 그는, 소설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라면서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고, 독자와는 작품을 통해서 만나야 한다며 일체의 강연에도 나서지 않았으며, 소설 이외의 잡문을 쓰지 않았고 박사학위라든가 문단정치라든가 하는 세속적 욕망에 휘둘리지 않았다. 평생 학교라는 직장을 통하여 안정된 일상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이 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한편에서는 그의 이러한 결벽증 이외에도 소설에서의 탈역사성에 대해 현실과의 ‘거리두기’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의 이러한 작가적 태도는 현실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능동적인 의지로 지켜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순수문학의 작가였다. 그의 작가적 태도가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선택된 것이듯이 그의 문학적 내용도 시대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순수문학은 자기의 문제를 선택하여 떠맡고 그 문제를 치열하게 극복하면서 한 시대를 산 작가의 문학임을 주목해야 한다.”(오생근, <황순원 연구-전반적 검토>)
그의 첫출발이 은사(隱士)로서 한과 토속적인 것을 포함한 한국인의 근원적인 정신 상황에 관련된 것이었다면, 해방 기간에는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시대와 관련된 문제의식에 접근한다. 그리고 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역사가 자기 시대 사람들의 정신에 끼친 영향과 상처를 내면으로부터 드러내는 일에 몰입하게 된다. 해방 기간에 서울로 남하해 온 황순원은 대개의 북을 등진 지식인들이 반공적 진영 의식을 보이면서 자본주의 체제 찬양에 나선 데 비해 오히려 남쪽 사회현실을 비판하고 삶의 위기에 몰린 민초들을 그리는 좌파적 시각의 작품들을 일관되게 발표한다. 1948년 12월 간행된 단편집 <목넘이마을의 개>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소설들은 해방에서 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 남한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같은 기간에 썼던 장편소설 <별과 같이 살다>는 노동자, 위안부 등 하층민의 인생역정을 중심으로 민중의 수난사를 소설로 기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것은 북의 토지개혁과 농촌의 변화 과정을 다룬 <카인의 후예>와 함께 해방 전후 남과 북의 현실을 ‘그답지 않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쓴 장편소설들이다.
1948년 12월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1949년 6월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했다. 김구를 암살한 시점에 시작한 ‘사상 전향자 조직’이 그 출발점이었다. 보도연맹은 처음에 좌파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실제로는 실적주의 때문에 지방마다 가입을 강요당한 경우가 많았고 지역별 할당제여서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될 정도였다. 좌익뿐만 아니라 남북협상에 참여한 김구 계열, 여운형 계열, 중도파나 미군철수를 주장했던 소장파 국회의원들까지 가입시켰을 정도였다. 문화계 인사들도 다수 가입시켰는데 그중 알려진 사람들은 소설가 황순원, 평론가 백철, 시인 정지용·김기림·양주동 등이었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보도연맹’ 조직원에 대한 광범위한 처형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황순원은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지만, 이후 그의 문학에는 늘 어떤 강박관념에 짓눌린 흔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의식한 자기검열’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4·19 혁명의 반성과 전환의 시대가 올 때까지 남한의 유일한 주류 문학은 ‘순수문학’이었고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출구였다. 때로는 민족적 토속성으로, 때로는 일본을 거쳐 그 편린이 날아온 근원적 존재의 탐구라는 전제가 붙은 실존주의로, 또는 탈역사적 허무주의로 정치적 위험을 비켜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혹자가 황순원의 문학과 삶을 ‘식물성’이라고 하여도 ‘독짓는 늙은이’처럼 모두 놓아버리고 장인적 세계로 침잠하던 전후 그의 작품 세계를 일면적인 도피로 규정할 수는 없다. 다음 연재에서 다루게 될 또 하나의 남한문학의 얼굴인 김동리와 달리 황순원은 자신의 문학세계에서 때로는 역사적 현실과의 적극적인 대결을 통해서, 다른 한편에서는 속악한 현실과의 거리 두기를 통해서 끊임없이 개인적 자유의 공간을 모색해 왔다. 어떤 이는 이를 서정적 상징주의로, 또는 시가 산문으로 연장된 ‘시적 소설’로, 개인적 책임에 몰두한 이상적 자유주의로 보기도 한다.
나는 ‘해방과 전쟁’이라는 테마에 맞는 단편소설을 찾으면서 해방공간의 대표적 단편 중 하나인 ‘목넘이마을의 개’와 전쟁의 왖우에 나온 ‘학’을 놓고 고심했다. 그리고 전후 복구 기간인 1950년대 말에 나온 ‘모든 영광은’을 재발견하고서 다시 고민에 빠졌다. 우선 ‘학’은 1953년 5월 ‘소나기’와 함께 다른 잡지에 각각 발표되었다. 그는 전쟁을 겪으면서 불가근불가원의 거리를 유지하게 된 현실을 우리의 전래민담이아 설화적 세계로 윤색하여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황순원은 그의 모든 작품을 판이 개정될 때마다 말년에 이르기까지 귀금속 공예가처럼 끊임없이 갈고 닦았는데,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개작했다. 치안대원인 성삼이가 빨갱이 농민동맹 부위원장짜리인 어릴 적 친구 덕재를 처형장으로 호송하다가 놓아준다는 이야기인데, 성삼이도 잘 아는 소꿉친구 꼬맹이와 덕재가 결혼하여 아이까지 뱄다는 대화를 넣어서 그들이 학 사냥 다니던 어린 시절의 추ㅡ억을 떠올리고는 그의 포승을 풀어준다. “어서 학이나 몰아오너라!” 하면서 성삼이는 풀밭을 기어가는 덕재에게서 총부리를 돌린다는 결말이다. 상처받은 작가 황순원의 회한이 깃든 작품이며 이맘때의 ‘소나기’처럼 동화적 가상세계가 참혹한 현실과 분리되면서 아프게 투영된다.
‘목넘이마을의 개’는 이북 그의 고향마을에서 들었다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1948년 3월 <개벽>지에 발표한 작품이다. 10월 항쟁과 여운형의 암살, 미소공위의 결렬, 지방의 야산대 활동, 단정반대 투쟁이 전국적으로 벌어져 이미 학살이 시작되었던 무렵이다. 연이어 정부 수립과 함께 여순 사건, 제주도 4·3 사건이 숨 가쁘게 이어지던 때였다. 이 소설은 그러한 현실의식에 대한 작가의 반응이 알레고리적으로 묘사된 작품이다.
어디선가 유랑민이 남기고 간 떠돌이 개 흰둥이가 살아남으려 마을을 배회하고 개들은 개들대로 사람은 사람들대로 동요한다. 개들끼리는 잘 어울리는데 동네 유지들은 그게 미친개라면서 먼저 미친병이 옮았다는 동네 개들부터 때려잡아 먹고 흰둥이를 사냥하러 몰려다닌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부화뇌동하지만 간난이 할아버지는 흰둥이가 보통의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시골 개라면서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한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와 달리 여러 차례 개작을 통하여 결말 부분이 삭제되었는데 간난이 할아버지를 통하여 해방이 되었어도 민초들의 삶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는 직접적인 표현들이 잘려나갔다. ‘목넘이마을의 개’는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양민들의 삶과 빨갱이(미친개)라는 막연한 죄목으로 살상이 자행되는 이남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황순원의 ‘모든 영광은’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나중에 대학생이 되어서 다시 같은 작품을 읽은 뒤 불문학을 하던 친구를 불러 소설 줄거리를 이야기해주면서 만취하도록 밤새 마셨던 기억이 새롭다. 소설집 <너와 나만의 시간>에 실린 작품들은 잡문 결벽증이 있는 황순원이 비록 소설이라고 붙였지만, 일종의 ‘작가일기’ 같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산문투여서 ‘모든 영광은’은 ‘목넘이마을의 개’와 연이어 실어도 무방하겠다고 보았다. 이 산문이야말로 ‘목넘이마을의 개’와 ‘학’에서 뵈는 역사와 시대의 상처가 ‘인생파’답게 어우러져 잘 치유되는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준다.
어쨌든 황순원의 소설은 사람과 사물의 어떤 ‘인상’을 스치고 지나면서 감춰진 현실을 ‘숨은그림찾기’처럼 언뜻 보여준다. 이렇듯 억제된 실감은 현실에 덴 듯한 상흔이 분명하고, 바로 그 점이 그의 소설 속 세계와 등장인물에 대한 애틋한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다.
[다음은 황순원의 단편소설 ‘목넘이마을의 개’와 ‘모든 영광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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