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 전민식 장편소설

라라와복래 2012. 3. 17. 16:19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전민식 장편소설

은행나무

2012.03.22

1억원 고료 2012년 세계문학상 수상작입니다. 컨설팅 회사의 전도유망한 일등사원이었다 잘린 주인공이 불판닦이, 역할대행 등 갖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고급 애완견을 산책시키는 일을 하게 되면서 인생 역전을 꿈꾸는 내용입니다. 이 작품은, 시니컬한 농담이나 파격적인 묘사로 일종의 충격요법을 주는 요즘 트렌드와는 거리가 멉니다. 도시의 산책자처럼 느릿하지만 군더더기가 없고, 잔잔하면서도 진솔하며 기품 있는 묘사가 도드라집니다. 수상자인 전민식 작가는 일용직 노동자와 대필 작가 생활을 하며 틈틈이 소설을 썼으며, 각종 문학상 최종심에서만 아홉 번을 떨어진 끝에 이번에 당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사람 냄새가 나는 소설

이 작품의 미덕은 무엇보다 도시의 마천루의 그늘에 가려진 밑바닥 삶의 풍경을 좌절만이 아닌 치유의 진경까지 훈훈하게 그려낸 데 있습니다. 최근 사회적 패자, 이른바 ‘루저’를 주인공으로 하여 삶과 일상의 지리멸렬함을 다룬 소설이 흔합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이 작품이 도드라지는 이유는 단순히 각박한 세태 반영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나락으로 떨어진 한 남자의 가슴 따뜻한 저항이 인간적 공감과 훈훈한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죠. 출구 없는 날들. 어디까지 추락할지 모를 그런 나날들 속에서도 사랑과 우정은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작품은 그러한 상처 입은 존재들이 만들어 내는 치유의 풍경을 호들갑스럽지 않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람 냄새가 나는 소설입니다.


“우리 사회에 진정한 루저가 있을까요? 1%를 제외한 99%의 사람들이 사회 구조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루저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않아도, 대다수 인간이 존엄과 품위를 지키고 살아갈 수 있는 통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소설을 썼습니다.” _작가 인터뷰


작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다섯 마리의 개에게 끌려가는 남자의 모습을 담은 <뉴욕 타임스>에 실린 사진을 보고 이 작품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4대 보험 등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이 전혀 보장되지 않은 사회 경험들이 밑거름이 되어, 현실에 발붙인 상상으로 가슴 찡한 울림을 주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탄생시켰습니다.


책장을 덮고서도 잔상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줄거리

산업스파이로 해고당한 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신원조회를 하지 않는 아르바이트밖에 없었어. 불판도 정성스럽게 닦고, 개들도 컨설턴트의 실력을 발휘해 꼼꼼하게 산책을 시켰지. 언젠가 내 삶의 본궤도로 돌아갈 수 있기를 꿈꾸면서 말이야. 그런데 개들이 산책 나온 다른 애완견을 물어 죽여버리고 만 거야. 설상가상으로 고시원에서도 쫓겨나고, 식당에서 어렵게 얻은 잠자리도 여자 때문에 잃고 말았지. 삶은 어디까지 곤두박질칠까?


그래도 나는 고꾸라지지 않아.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찾았거든. 역할대행 사무실인데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면 죽은 사람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웃기는 소장이 있는 곳이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당장 일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 역할대행자 노릇을 시작했어. 어떤 여자의 오빠가 되기도 했고, 어떤 녀석의 아빠가 되어주기도 했어. 애인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고 결혼식 하객으로도 참석했지. 과연 이런 생활로 내 인생의 새로운 돌파구가 생길까?


그런데 기회가 왔어.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는 개 ‘라마’를 산책시키게 된 거지. 나 아니면 아무도 그 개를 다룰 수 없었어. 게다가 그 개의 여주인은 돌싱이었거든. 그건 분명 기회였어. 나도 그에 걸맞은 남자가 되기 위해 개를 산책시키면서 명품 구두에 양복을 입기 시작했지. 그리고 비록 월세지만 오피스텔도 다시 얻고 최신 스마트폰도 장만했지. 그런데 그 개마저 결국 내 뒤통수를 치더군. ……


“안 타? 비 맞고 집에 갈 거야?”

“미향이도 당분간 우리 사무실 나오기로 했어. 전단지 효과가 있는지 전화가 제법 오네. 좀 바빠질 거 같아. 전에 말했던 개 산책시키는 회사도 차려 볼까 구상 중이야. 빨리 타. 비가 많이 와서 길 막힌단 말이야.”

나는 조수석 쪽으로 걸어갔다. 미향이 뒤로 넘어갔다. 내가 조수석에 타자마자 삼손은 차를 돌렸다. 나는 미향의 손을 찾아 쥐었다.

심사평 안정적인 ‘웰 메이드’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언어나 플롯의 낭비 없이 이야기를 경제적으로 형상화했다. 단단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집중력 있게 끌고 나가며 사이사이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어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인물들의 잔상이 남아 있는 등 ‘양감(量感)’이 있는 작품이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사전에 독자들에게 ‘미끼’를 충분히 던져 가독성도 살렸다. 사회적 패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삶과 일상의 지리멸렬함을 다루고 있으며, 상처 입은 존재들이 어우러지며 만들어 내는 치유의 풍경이 ‘사람 냄새가 나는 소설을 읽고 싶다’는 바람을 충족시켰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정서를 지닌 소설로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끊임없이 패배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파토스로 작용해 감동을 준다. 고단한 시대를 반영하듯 날로 사납고 강퍅해지는 소설과 등장인물들 속에서 당선작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는 따뜻한 저항으로 가만히 도드라진다. ― 제8회 세계문학상 심사위원 박범신, 김형경, 은희경, 서영채, 방현석, 김미현, 김별아

 

2012년 세계문학상 수상작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출간 기자간담회가 3월 13일 종로구 계동 한정식당 ‘산내리’에서 있었다.


소감 한마디

지난 2월 29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수상 소식 들으시고 아버님가 “옛날로 치면 장원급제”라며 기뻐하셨다. 글 쓴답시고 평생 걱정을 안겨드렸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기쁜 소식을 안겨드려 다행이었다. 감사하다. 당선 소식 듣고 나서는 와이프하고 울었다. 그동안 고생했던 일이 스쳐 지나가서... 이번 수상으로 “한 우물을 파면 결국 이룬다”는 평범한 진리를 믿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언제부터 글쓰기에 뜻을 품었는지

고등학교 때 친구들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곤 했는데 그때부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추계예대 재학 중에 신춘문예와 문예지 등에 응모해 몇 차례 떨어졌고, 본격적으로 문학상에 도전한 것은 97년도부터다. 문학동네작품상, 작가세계문학상, 중앙장편문학상, 세계문학상 등에도 9번 떨어졌다. 덕분에 나는 축적된 작품이 많다. 문학상에 떨어질 때마다 ‘이것이 나중에는 나의 문학 자산이 된다’고 위안 삼았다. 그래서 20여 년을 버텨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걸어온 길에 대한 후회는

매일 아침 의심했었다. ‘이게 과연 내 길이 맞는가’ ‘나는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왜 안 그랬겠나. 특히 2003년 동생이 죽었을 때 가장 심했다. 그 당시 나나 아내나 둘 다 일을 하고 있지 않아서 수입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3개월간 전화 발신 금지가 된 상태였다. 그러니까 수신은 가능하지만 발신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동생이 죽었다고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 소식을 알릴 도리가 없었다. 집안의 농 등을 들춰서 동전 몇 개를 찾아 겨우 공중전화로 연락을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정말 내가 고집스럽게 이 길을 가야 하나 많이 힘들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써왔다. 매일 아침 의심은 해도 후회는 안 했다.


글 쓰는 후배들에게 조언 한마디

얼마 전에 모교인 추계예대에서 강연 신청이 왔었다. 추계예대가 부실대학으로 선정되었는데, 후배들 격려 차원에서 신입생 대상 강연이었다. 그 학생들에게 “예술대에 온 것만으로도 1%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거다. 그 끼를 따라 가라. 한 우물을 파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단 열심히 삽질을 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전에 어떤 한의사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재능이 없다 말고 조금이라도 있는 재능을 키워서 넓혀라. 그러면 없던 재능이 따라온다.” 그 말씀이 정말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재능이 점점 커져 가는 게 아닐까 싶다.


문학의 꿈 이룬 후 좋은 점은

사실 내 주변 지인들이 대부분 소설가이다. 그들이 영감을 찾아 여행을 가기도 하고, 문학관에서 지원받으며 글을 쓰고, 절에 가서 쓰기도 하는 모습들이 너무 부러웠었다. 나는 먹고사느라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 초상 날에도 부고 탁자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대필 마감 원고를 써야 했다. 문우들이 나더러 ‘야전’ 스타일이라고 그런다. 아무리 시끄럽고 힘든 상황에서도 써낸다. 그런데 이렇게 생활하면서도 뜻 이뤄내 통쾌했다. 사실 주변에서 “너는 문턱인생으로 끝날 것이다” “대필인생으로 끝날 것이다” “평생 유령작가밖에 못할 것이다” 하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다. 심지어 관상쟁이나 사주팔자 보는 사람들까지도 “그것은 너의 길이 아니다”라고 했었다. 나는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한번 그것을 뒤집어보고 싶었다. 운명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휘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냈다. 나는 사람들에게도 “운명을 한번 휘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대필한 책의 종류와 양은

거의 60여 편 정도 된다. 종류는 가리지 않았다. 연예인들 자서전, 한의학 서적, 제약 서적, 풍수 서적, 전문 서적, 논문을 대필한 적도 있다. 전문 서적을 집필할 때는 적어도 관련서적 30~40권을 독파한 후 써야만 한다. 한번은 조폭 대부의 자서전을 집필하는데 그 조건이 6개월간 그의 별장에서 칩거하는 거였다. 그렇게 칩거하면서 그 조폭 자서전을 시리즈로 낸 적도 있다. 결국 조폭 대부가 죽어서 돈도 절반밖에 못 받았다.(웃음) 한의학 소설은 kbs에서 드라마화되기도 하고, 대필 서적 중에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들도 솔찬히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대필작가가 버는 돈은 정말 조금밖에 안 된다. 한 권당 500~800만 원 정도다. 더구나 그 책에는 내 이름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글쓴이의 자존감을 꺾고 문체를 잃게 만들기 때문에 작가는 대필을 하면 안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생계 문제도 있었지만 대필에 대해서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전혀 다른 분야를 공부할 수 있기도 하고, 몇 개월 동안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을 쫓아볼 수 있어 오히려 문학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


부인과는 언제 만났나

학교 졸업 후 박영한 소설가에게 사사 받을 때 같은 인터넷 소설반이었다. 그때 만나서 결혼했다. 아내(최민경)가 먼저 진주일보와 세계청소년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아내지만 솔직히 배가 아팠다.(웃음) 지금까지 내가 글을 버리지 않고 버텨온 것은 그러한 아내의 도움이 컸다. 실은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를 아내에게 보여주었었는데, 그때가 하필 아내가 명절 증후군을 겪을 때였다. 가뜩이나 심사가 어그러져 있어서 더 그랬는지 아내가 그 작품에 대해 “왜 전보다 더 못 썼어” 하고 타박했다. 다행히 세계문학상을 수상해서 아내에게 면목이 섰다. 결혼하고 나서도 생계 때문에 아기를 못 가졌었다. 아내가 등단 한 후에 아기를 가졌고, 지금 그 아이가 여섯 살이다. 아내와 여섯 살 난 아들과 함께 문학을 위해서 매일매일 기적처럼 산다.


소설 속 이야기 실제 경험인가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의 큰 얼개는 상상이지만, 그 세세한 이야기들은 실제 경험에서 나온 것이 많다. 또 그 등장인물들도 대부분 실제 인물들이다. 뭐, 불판 닦는 아르바이트도 해봤고, 역할 대행까지는 아니지만 심부름센터에서 그 비슷한 일은 해봤다. 주인공 ‘도랑’은 실제로 내가 아는 컨설팅 업체 ‘네모’에서 추락한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이다. 소설 속에 ‘삼손’이라는 캐릭터가 나오는데 그 사람도 내가 이삿짐센터 일하면서 만난 손가락 세 개를 가진 인물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는 비록 이삿짐 나르는 일을 했지만 버린 책들을 많이 주워 봐서 그런지 정말 박학다식했다. 아까 말했던 조폭 대부도 서재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그 서재를 보면서 이렇게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거대한 조직을 끌어갈 수 있는 카리스마를 키웠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처럼 평범해 보이지만 의외의 구석들이 있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


문학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생활을 위한 일에 자존심을 세울 수는 없다. 대필만 해도 글 갖다 주면 내용이 맞니 틀리니, 왜 이 따위로 썼니 하는 말들을 늘상 듣는다. 소설은 내가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비록 세상은 나를 몰라도 내가 나를 알아주고 내 길을 갈 수 있었다. 그거 하나 지켜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아 여기까지 온 듯싶다. 아예 예심도 통과 못했으면 포기했을지도 모르는데, 꼭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시니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하는 오기가 생겼다. 한번은 하도 당선이 안 되서 그냥 모 출판사(꽤 큰 문학출판사)에 작품을 투고해봤다. 그리고 그곳 기획위원 분(교수)들에게서 출간하자는 연락을 받았고 축하한다며 술자리까지 마련해주었었다. 그런데 한 달 후에 없었던 일로 하자고 연락이 왔다. 그런 싹수들이 내가 문학을 놓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나는 문학이 특별히 재능 있는 사람만 하는 고귀한 직업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냥 문학 또한 살아가는 한 가지 방편일 뿐이고, 여러 가지 노동 중에 한 방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문학이 선택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아마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tv에서 한 여자가 “나는 99%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면서 나도 99%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대다수 서민들의 삶의 여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서민들의 삶이 더 각박해지는데 그것을 개선시키지는 못하더라도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소설의 결말 부분이 똑 떨어지지 않고 진행형이어서 좋은 말로는 프랑스 소설 같고, 나쁜 말로는 좀 심심하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작품을 쓸 때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보통의 인간 삶이 꼭 그렇게 드라마틱하지는 않기 때문에…. 물론 내 소설이 다 이렇게 잔잔한 스타일은 아니다. 내 소설 중에도 기발하고, 반전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이 있다. 아무튼 이야기 형식을 떠나 앞으로도 1%가 아닌 99%를 위한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은 바람이다.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삶은 시작된다는 것.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모든 우주 존재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절대 절명의 단절이란 없다는 생각을 통해 삶의 희망을 그려내고 싶었다.

 

전민식 1965년 겨울에 태어났다. 부산서 났지만 어려서 평택에 있는 캠프 험프리라는 미군 기지촌에서 자랐다. 그래서 고향은 미국과 한국 문화가 범벅이 되어 있던 캠프 험프리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그 후 추계예대를 입학할 때까지 유랑의 세월을 보냈다. 별별 아르바이트를 다하며 살았다. 서른을 앞둔 마지막 해에 추계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고 생활고로 다니다 쉬기를 반복하며 6년 만에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오로지 글만 쓰기 위해 취직은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아야겠기에 온갖 종류의 대필을 했다. 우연한 기회에 두 군데 스포츠신문에 3년 정도 연재소설을 썼다. 기획된 연재물을 쓸 때에도 대필을 할 때에도 자투리로 남는 시간엔 소설을 썼다. 많이도 썼다. 세계문학상에 당선되기까지 장편소설로 아홉 번쯤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셨다. 단편에서도 수차례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했다. 유령작가이자 통속작가였고,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지아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