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고은과의 대화](26) 일제 말기 산은 죄다 민둥산, 봄이 와도 진달래 없는 텅 빈 봄이었어

라라와복래 2012. 3. 17. 11:14

[고은과의 대화](26) 양 세기의 달빛

일제 말기 산은 죄다 민둥산, 봄이 와도 진달래 없는 텅 빈 봄이었어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저번에는 아까운 말씀이 많아서 마무리할 틈도 없었습니다. 일제는 전쟁에 들어가고 학교는 죽음을 가르치는데, 시인은 가미카제를 찬송하던 상황에서 멎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의 의미를 말해주는 언어가 어디엔가 살아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고은 조선 사람으로서 일본인 뺨치게 일본에의 귀의로 일관한 다치하라(立原正秋), 즉 본명 김윤규의 굴절과는 달리 일본인으로서 식민지 조선을 연민한 시인이 쉽사리 대비되기도 하네. 바로 일본 현대 시인 중의 중요한 위상을 가진 마루야마 가오루(丸山薰)가 있어. 그는 식민지 경성(서울)의 경성중학교를 다녔지. 오늘의 서울중·고교지. 그의 시 ‘조선’이 미·일전쟁이 발발하던 해인 1941년에 일본 진보지 <개조>에 과감하게 발표되지.


김형수 어떤 시였기에 과감히 발표했다고 하시는 겁니까?


고은 쇠고랑을 각오한 것이지. 한국의 설화를 소재로 삼아 식민지인의 고난을 긴 산문시로 쓴 것인데 그의 시는 회화적 이미지에 물상에의 추구를 일삼는다는 평가를 받았어. 내용을 요약하자면 아씨의 옷이나 장신구 하나씩을 내주면서 쫓아오는 괴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 그려지지. 끝내 격류에 휘말려 바다로 떠내려가는 것으로 마치는 종말인데 여기에서 괴물이 일제이고 아씨는 조선이지.


김형수 꽤 통렬하네요. 생각해보면, 이기적인 인간조차도 타인의 아픔을 슬퍼하는 천성을 가질 만큼 각별하고 거룩한 생명 현상이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그림 김옥상 화백


고은 이런 조선에의 동정은 사회주의 시인인 나카노(中野重治)의 프롤레타리아 시에도 선명히 그려지고 이에 앞선 이시카와(石川啄木)의 조선인 연민도 있었지. 그리고 경성제대 학생이던 일본인 대학생 이치카와(市川朝彦), 히라노(平野而吉), 사쿠라이(櫻井三良) 등은 반제동맹 사건으로 조선인 학생 신현중, 고정옥 등 20여 명과 함께 전쟁 반대와 조선 독립을 선포하는 사건에 적극 동참한 일도 있었지. 동경 2·8독립선언 사건 변론을 맡은 일본인 변호사나 식민지 조선에서의 독립운동 변론의 가시밭길을 간 일본인 재야 법조인들도 없지 않았어.


김형수 지상의 양식을 잃은 영혼들에게 그런 어른의 존재는 얼마나 큰 선물이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일본은 도덕적인 명령, 양심의 명령을 따랐던 큰 이름들을 이웃나라에 많이 전하지 못했습니다. 과거사 극복이 잘 안 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은 조선 문화와 전통예술의 높은 경지를 선양하며 총독부의 광화문 위치 변경에 크게 항의하는 야나기(柳宗悅)와 같은 문화인도 없지 않았어.


김형수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본의 산업자본주의가 점령한 식민지 조선의 민예품을 사랑하고 칭송했지만 폭력을 수반한 독립운동을 비판했습니다. 왕골돗자리를 짜는 사람은 필요해도 안중근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당시 조선은 설사 그것이 미학적이지 않다고 할지라도 폭력적이고 공업 지향적이 되는 걸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신파의 애조를 비판할 때 야나기 같은 심미안도 비판하는 것이라고 보았는데요.


고은 그 사람보다 못한 사람도 수두룩했어. 근대 일본문학의 으뜸이라 할 소설가 나쓰메(夏目漱石) 등은 일본의 조선 통치가 당연한 것처럼 여겼어. 그의 조선 경성 방문의 일기를 읽어보면 일본의 한 지방에 온 것처럼 아무런 가책도 한 가닥 염치도 안 보이더군. 아무런 낯선 의식도 없는 지극히 국내적인 일상만이 그려져 있었어. 게다가 앞서 말한 평론가 고바야시(小林秀雄)는 그 당시 서울에 와 자신의 일본어를 거대한 모태라고 말하며 일본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이광수 등을 제 수족처럼 대했어. 이런 환경에서 친일 문인의 작태는 항구적인 체제 충성에 광분한 것이지.


김형수 자아의식이 투철한 자가 타자의 불행에 무관심했던 것은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에 개인의 시대가 도래할 때 자아에 대한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고 해서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도 주목하는데 말입니다.


고은 이런 시대 만주사변, 중일전쟁 그리고 미·일의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나의 어린 시절은 태생적으로 전쟁의 연대기로 된 후방의 벽지에서 전시교육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었어. 이 같은 전시사회의 내력은 해방 5년 뒤의 한국 남북전쟁으로 이어짐으로써 그 무기한적 연장으로 준(準)전시체제인 분단시대 몇 십 년의 오늘에 이르고 있다네. 요컨대 내 일생은 이런 현대사 환경 한구석으로만 처박히도록 점지 받은 셈이네 그려.


김형수 그래도 식민지에서 태어나 주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얼마나 눈물겹습니까? 해방 후에도 국토의 절반만을 세상의 전부로 삼았다가 반국(半國)적 관점이 일국(一國)적 관점으로, 또 그것이 지구적 관점으로 확장되는 민족문학의 전개 과정은 상당히 뿌듯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하여튼 그래서요?


고은 1940년대 전시체제의 후방을 ‘총후(銃後)’라는 전시용어로 불렀어. 총의 후방이라는 뜻이었어. 벌써 관동군 병력 대부분이 대륙의 중국이나 소련 쪽에의 대비보다 태평양 작전판도를 잃어가면서 미국에의 대응으로 긴박해져서 그 병력이 내 고향마을 일대에도 배치되었어. 할미산 뒤쪽에 콘크리트 토치카를 몇 개 만들고 그 산허리에 사갱(斜坑)의 방공호들을 만들어 거기에 무기를 쟁여 넣기도 했어.


김형수 소년 고은태의 내면에 투사된 일제의 밑바닥 풍경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고은 그런데 그 할미산은 내가 어릴 때 자주 오르던 ‘큰 산’이었는데 사실은 해발 100m 미만의 구릉일 뿐이지. 할미산이라는 이름을 내가 잘못 알기로는 할미꽃이 많이 피어서 생긴 이름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냥 마고할미 전설이 조선 팔도, 특히 삼남 일대 산악지대에 널려져서 그 할미가 주재하는 산이라는 뜻이지. 지리산 천왕봉도 그렇고 어디도 그렇지. 제주도 설문대할망이나 중국 곤륜산의 서왕모에 해당하는 모녀신이지.


김형수 그런 땅 이름이 사라져가는 것도 몹시 아까워요. 아무런 내력도 없이 그저 예쁜 낱말을 끌어다가 별빛마을이다 달빛마을이다 부르는 게 얼마나 어색한지 몰라요. 저는 마을 이름이 자라는 아이들과 과거 세대를 연결하는 문화적 전통의 운반자라고 봅니다.


고은 이 산에는 할미꽃뿐 아니라 진달래도 흐드러져서 진달래산이기도 했어. 철쭉꽃도 많았지. 날것으로도 먹고 화전을 부쳐 먹는 진달래와는 달리 철쭉은 독이 있어서 영양실조인 아이가 그 꽃을 따먹고 죽기도 했지. 그런데 일제 후반기는 우리 마을 소나무 숲들이 다 벌목에 의해서 민둥산이 되어버리지. 일제가 전쟁물자로 모자란 화목(火木)이나 시설재목으로 써서 산이란 산은 다 황토산이 되고 말았어.


김형수 아, ‘사치’라는 시에서 흰 철쭉꽃이 여름까지 이어지던 풍경이 떠오릅니다. 폐병에 걸린 누님이 그 어린 자아의 나라, 대지의 인격체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고은 할미산도 군 시설의 엄폐지대 말고는 민둥산이 되었어. 거기에 더해서 식량의 강제수탈인 공출이나 헌미(獻米)로 절량농가가 늘어나면서 뒷산 앞산의 초근목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하고 겨울 내내 냉골을 면하기 위한 땔감으로 풀뿐이 아니라 나무뿌리도 캐다 때야 했으므로 진달래 뿌리도 온전할 리 없었지. 그러므로 봄이 와도 피어날 진달래가 없었지. 봄도 텅 빈 봄, 그냥 봄이었어.


김형수 텅 빈 봄도 그 시대에 대한 은유 같아요. 사르트르의 소설 <철들 무렵>을 언급하면서 “철이란 계절이나 세월 따위의 시간의 생태를 뜻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체험적 성숙을 뜻하게 되었다”고 쓰지 않았습니까?


고은 그랬지. 그런데 어느 날 일본 군인 하나가 할미산 밑에 남겨진 오리나무 가지에 목매고 자살했어. 유서도 남겼는데 내지 고향의 처자도 공습으로 다 죽었다는 풍문을 듣고 비관한 것이라는 소문이 우리 마을에 떠돌았어. 그 자살시체를 상사인 일본 장교가 군홧발로 몇 번 찼다는 것도 알았어.


김형수 쯧, 인간과 자연 사이, 육체와 비육체 사이, 합리성과 직관 사이, 과거와 현재 사이의 단절을 메울 수 없는 파괴된 세상이 덮쳐오고 있었던 것 같아요.


고은 B-29 미국 폭격기가 일본 대공(對空) 사격거리 한계 밖인 높은 하늘 속을 유유하게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지. 그 항공기가 지나가다 떨어뜨린 폭탄이 할미산 밑의 밭에 있었는데 그것은 불발 폭탄이 아니라 빈 휘발유 드럼통이었어. 그것도 일본군이 우리 마을 남정네의 지게에 지게 해서 수거해 갔지.


김형수 어떤 존재도 다른 존재를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지 못하는 세상이 과연 오기나 할지….


고은 나는 학교만이 아니라 집에 와서도 아버지, 어머니에게 일본어를 한마디 한마디 가르치라는 학교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어. 그 대신 아버지, 어머니와의 대화를 가능한 한 하지 않게 되었어. 일제는 ‘조선인’이라는 것도 없애고 ‘반도인’이라고 우리를 부르고 이 반도인은 충성스러운 대일본제국 신민이 되기 위해서는 한갓 미개어에 불과한 조선어를 버리고 ‘국어(일본어)’ 생활을 해야 이다음에 대륙이나 그 밖의 대동아에 진출해서 그곳을 지배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어.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딱지를 분배해주고 조선어로 말하는 아이의 딱지를 다른 아이들이 빼앗아서 딱지 많은 일본어 애용의 아이에게 상을 주었어. 운동화나 잡기장도 상품으로 나왔어. 도청에서 시학관(視學官)이 나와서 일본어 사용 실태를 조사해 갔어. 어른들도 ‘두만강 푸른 물…’ 운운의 유행가를 못 부르게 된 지 오래였어. 전쟁의 상대방은 ‘미영귀축(米英鬼畜)’이었어. 귀신이나 짐승으로 표현했지.


김형수 학교가 왜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물적 토대가 되는지를 참 적나라하게 보여주네요. 아이들이 집에 오면 꽤 충돌했겠지요? 가정에서는 미신이 큰 영역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들의 술잔에는 김정구의 노래가 가득 차 있었을 테니까요.


고은 국민학교 아이들의 정규수업은 ‘수신(修身)’시간의 교장 수업 외에는 일본인 경영의 불이농촌(不二農村) 모심기 동원이나 방공호 파기 그리고 나무열매 따기 그리고 방공 연습과 군대에게 보내는 위문편지 쓰기 따위로 채워졌어. 집에서는 1일 2식은 정상 식생활이고 1일 1식도 많아졌지. 이따금 이틀 만에 꽁보리밥 한 그릇을 먹을 때도 있었어. 밥은 드물고 나물죽이나 콩깻묵 따위로 목숨 부지할 때가 많았어. 한 달에 쌀 200만 석을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실어가는 쌀 주산지의 생산자에게는 이토록 쌀이 없었지.


김형수 앞으로 어떤 집단도 다른 집단에게 정치적, 지적, 도덕적 강압을 그토록 파렴치하게 행사해서는 안 될 거예요.


고은 교장 아베의 수신시간이었어. 대개가 점심 도시락 없는 아이들이라 눈들이 푹 꺼진 상태였지. “장차 무엇이 되겠느냐?”는 교장의 질문에 아이들이 손을 들어야 했지. 누구는 육군대장이 되어 미영귀축을 격퇴하겠다, 누구는 가미카제를 타고 가서 적 항공모함을 폭파 침몰시키고 천황 폐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 누구는 간호부가 되어 적과 싸우다가 부상당한 제국 병대 아저씨들을 열심히 간호해서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도록 하겠다, 누구는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원수처럼 되어 대일본제국 군인의 영예를 남기겠다 등등의 대답을 빈 아랫배에서 나오는 큰소리로 외쳐대야 했어. 군대의 구령 발성이었지.


김형수 그런 말도 안 되는 애향단 조회를 저희들도 했습니다. 식민 잔재가 오래 남아서 거의 고등학교 교련시간 때까지도 악습이 이어졌거든요.


고은 연신 안경 속의 날카로운 교장의 시선에 기쁨이 담기면서 ‘욧시(좋아)’로 연거푸 아이들의 전시교육 효과에 만족하고 있을 때 무슨 까닭인지 나를 맨 나중에 불렀어. 나를 매우 사랑하는 편인 교장이 아껴둔 느낌이 들었는데 “다카바야시 군(高林君)! 너는 무엇이 되겠느냐?”라고 창밖을 보면서 물었어. 그런데 나는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어. 다른 아이들의 대답이나 내 대답이 별로 다를 까닭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그때 교장이 나를 뚫어져라 보았어. 대답을 재촉하는 것이었어. 내 대답 역시 큰소리였어. “예잇, 천황 폐하가 되겠습니다. 천황 폐하가 되어 대일본제국을 다스리겠습니다.”


김형수 하하하, 그런 스케일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태양에도 약점이 있을 것이다. 보름달에도 약점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쓰신 분이 선생님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고은 당연히 ‘욧시!’ 소리가 교장의 입에서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어. 벼락이 떨어졌어. “너 이놈 뭐가 어째? 감히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 폐하가 되겠다고? 네놈이야말로 미영귀축이야. 네놈은 당장 퇴학이다!”라는 분기탱천의 쇳소리 나는 교장의 호통이 터져버렸어. “당장 나가. 너 같은 비국민(非國民) 새끼는 집구석에나 처박혀야 해.”


김형수 어이쿠!


고은 나는 책보를 싸들고 넋을 잃은 상태로 교실을 비틀거리며 나와야 했지. 내 등 뒤의 교실 아이들이 우세두세했고 교장의 노여운 훈계로 괴괴해졌지. 나는 올데갈데없는 고아의 심정이 되어 어디로 발걸음을 뗄지 모르며 오줌을 바지 속에 저리기까지 했어. 집까지 가는 동안 이 논길 저 논길 돌고 돌면서 15분이면 될 학교와 집 사이의 도보시간을 한 시간 남짓 늘려서 아주 천천히 걸었어. 얼굴에는 제대로 울지도 못한 울음의 눈물자국이 말라붙었지.


김형수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겠어요.


고은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퇴학 처분을 받은 사실을 사실대로 아뢰었는데 아버지는 한마디 꾸짖음도 없이 있다가 날 저물어서야 씨암탉 한 마리를 새끼 구럭에 넣어가지고 집을 나섰지. 그 길로 2학년 담임인 조선인 교사 가네무라한테 가서 그 교사와 함께 학교에서 5분 거리인 교장 사택으로 찾아갔지. 교장 부부한테 아들의 일을 사죄했어. 아마도 그곳에서 20여 분쯤 빌고 빈 나머지 다음날 담임선생을 통해서 정학 처분으로 낮추는 대신 학교 실습창고에 모아둔 비 맞은 썩은 보리에서 상하지 않은 보리를 가려내는 작업을 6개월간 하도록 했어.


김형수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고은 1주일 뒤 학교에 갔어. 교실에는 들어갈 수 없으므로 실습창고로 가서 악취 속의 작업을 오후 2시까지 해야 했어. 그때 고독이라는 것을 체득한 셈이지. 아침 9시부터 낮 2시까지 실습장 창고 안에서 악취에 길들여지면서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불운에 차츰 적응했고 나도 그 불운에 적응하게 되자 그곳에서 보리알들을 가려내서 보리쌀의 산더미를 이루어가는 일이 차라리 교실 공부나 교실 밖의 동원보다 나 자신을 안정시켰지. 나는 나의 친구가 되었지. 고독이 고독의 동지이듯이 말이네.


김형수 고독의 거대한 미로와 같은 세계 밑에서 시의 샘물이 솟구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고은 6개월 실습시간은 물론 보리 가려내기 이외에도 실습지 채소나 화초 가꾸기도 예정되어 있었으나 내 보리 가려내기를 시찰한 교장한테 나에 대한 심경 변화가 있었던지 3개월이 지나자 교장실에 불려갔어. 교장실은 교무실 구석을 차단한 곳이었는데 “황공하옵게도 폐하는 오직 한 분이신 가미사마(神樣)이시다. 신의 나라(神國) 대일본제국 2000년 역사에 폐하가 되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라는 훈계가 있었고 “너는 죄인이니 늘 고개 숙이고 다녀야 하느니라”하고 교실 복귀의 사면이 내려졌어.


김형수 한 편의 희비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웃었지만 슬퍼요. 그리고 상황이 끝났습니까?


고은 교장이 물었다네. “이제부터 너는 뭐가 되고 싶은가?” 나는 마치 그 질문을 예상하고 있는 것처럼 즉각 대답했지. “우편배달부가 되겠습니다.” “왜 배달부가 되고 싶은가?” “세상 사람들의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이 대답에 교장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 말했어. “그런 것은 이 전쟁을 이긴 뒤에나 할 수 있다.”


김형수 인생이란 자신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를 선택해야 할 찰나들의 집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