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평론가 김형수 선생님은 늘 소년 이미지를 지켜왔습니다. 자아를 불완전동사라 하셨잖아요. 그런데 등 뒤에 얼마나 많은, 한없이 멀고 긴 옛날이 달려 있는지 들을수록 경탄하게 됩니다.
고은 진화는 퇴화의 대가인지 모르겠네 그려. 사람의 귀 말이네. 옛 선사 조상들의 청각은 동물들의 청각이 그렇듯이 실로 놀라운 먼 곳까지 가청거리로 삼고 있었지. 어디 청각뿐이겠는가. 바닷가의 등대 불빛은 밤바다 8km 이내로 불빛을 보내지. 이런 등대 광력에 비례해서 안개가 깊은 밤에는 무적(霧笛)을 울려 보내는데 그것은 4km 저쪽의 수면에까지 들림으로써 빛의 신호를 대행하지. 옛 조상들의 시청각이 이런 등대의 그것에 결코 못지않았지.
김형수 비유가 참 절묘합니다. 등대는 암초를 알리는 경고 신호로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느끼는 것은 홀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외로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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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임옥상 화백
고은 그런데 동물들의 청력은 이런 가청거리를 훨씬 넘어서는 일도 적지 않을 것이네. 사람과 함께 사는 개들의 청력도 어디 사람의 그것에 견줄 수 있겠는가. 옛날 옛적의 현생인류도 그때는 이런 개의 귀에 버금가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어림도 없지. 그러니까 인류의 뇌 용량 크기로 그 기능이 동물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진화를 보이는 반면 그 기능에 흡수된 청각의 역할은 그저 함께 자는 가족의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설치는 정도이거나 모차르트의 ‘천상의 음악’을 듣고 황홀해하거나 하는 정도로 퇴화된 것 아닌가.
김형수 인류가 진화의 대가로 지불한 것이 그쪽에 있었나 봅니다. 세계의 깊은 곳을 아는 건 눈보다도 귀인데 말입니다. 고대 성현들의 시대만 해도 많이 달랐겠지요?
고은 사실 인류의 귀가 동물의 귀와 다른 것은 귀의 장식으로도 말할 수 있겠네. 고대 이래 귀 장식이야말로 여성의 신분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지. 귀의 크기로도 인간의 위상이 결정되었어. 공자의 귀가 지금의 공자상에서처럼 큰 것은 후대의 과장이지. 노자는 본디 귀가 컸다지. 이름도 귀(耳)를 뜻하고 자도 귀와 관련되는 담(聃)이지. 성인의 성(聖)자도 귀가 전제되고 있어. 이 노자에 질세라 석가모니불의 귀는 32상(相) 80종호(種好) 중 귀는 두껍고 크고 길고 귓불이 길게 늘어진 것으로 찬미되고 있지. 무위의 사상에 귀라는 유위의 형상으로 말하지. 금강경이 사상(四相)을 타파하는 형상, 집착의 초월을 내세우면서 형상의 원만을 강조하는 역설이 재미나기도 하겠지.
김형수 부처님 귀가 넉넉함을 상징하게 된 게 시각적 효과 때문만은 아니었네요?
고은 귀의 크기로야 코끼리를 당할쏜가. 또 삼국지의 유비의 귀는 어깨까지 늘어졌다 하지 않는가. 또 서유기 속의 저팔계는 귀때기로 부채질까지 하지 않던가.
김형수 우리가 잃은 것이 ‘먼 곳’임에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이 어렸을 때 장항 제련소의 굴뚝연기를 보며 발견했다는 그것 말입니다. 그 먼 곳이 그리움의 크기이고 그리움의 크기가 생명의 크기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안경을 쓰고도 멀리 가지 못하는 이 눈빛, 저 먼 곳의 소리를 가려듣지 못하는 귀, 먼 곳까지 걸어갈 생각이 전혀 없는 다리, 굳이 힘들이고 싶지 않은 정서적 불구의 신체에 갇혀 산다는 게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모릅니다. 비 오는 날 고가도로 밑에서 쉬고 있는 살진 비둘기처럼 모두 세계를 귀찮아하는 불행에 빠진 겁니다.
고은 이런 귀의 세계가 없었다면 이 세상의 소리란 소리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었을 테지. 청마의 시에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것도 있기는 있으나 소리야말로 그것을 들어주는 귀의 청각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었겠지.
김형수 저는 ‘소리 없는 아우성’에서 식물을 연상하고는 합니다. 선생님의 시 ‘죽은 개’에서 “나뭇잎 컹컹 짖으며 푸르렀습니다” 했던 것처럼요.
고은 인체의 여러 기구들은 하나같이 밖의 대상과 안에의 이입이 서로 주고받는 관계의 지속 상태를 가능케 함으로써 내부의 표현과 외부의 반영을 통한 내외일여를 이루지. 그러니까 존재론과 인식론의 구별은 인체의 구조에서는 말짱 헛것이야. 나에게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고향의 음향이 있다네. 그것은 밤의 두견새 소리, 낮의 뻐꾸기 소리 그리고 한여름의 매미, 쓰르라미 소리나 반가운 소식이나 손님을 미리 알리는 까치 소리만이 아니네. 또 마을 아저씨의 애 끓이는 육자배기 가락만이 아니네.
김형수 그 잃어버린 음향은 어떤 것입니까?
고은 그것은 바로 징소리라네. 이 징소리가 바로 1940년대 전쟁 말기에 없어져버린 것이네. 방짜 징이야말로 쇠붙이를 강제 징발할 때 놋요강, 놋대야, 놋그릇 따위와 함께 우선의 대상이었지. 이것은 농업의 일상에서 불가결한 풍장의 꽹과리, 장구, 북, 징의 역할이 폐기된 것을 말하지. 징과 함께 꽹과리도 쇠붙이라 걷어갔지.
김형수 전쟁이 마을을, 하나의 세계의 틀을 가져갔군요. 한데 그 말씀은 왜 하시는지….
고은 마을의 풍장은 오랜 공동체의 기본 필수품이었어. 노동농악, 축원농악, 걸립농악, 연예농악에다 군사농악까지 아우르는 것이 풍장이지. 이 풍장 또는 풍물이 내내 ‘두레굿’ ‘풍물굿’이라고 하는데 구한말 원각사, 협률사 시대에 농업 장려를 내세워 ‘농악’이라 불린 것이 1970년대까지도 그랬지. 또한 이 ‘농악’은 일제시기 ‘조선의 연중행사’에서 지어낸 이름이기도 한 것인데 요즘은 ‘사물놀이’로 정착된 셈이네.
김형수 그럼 ‘사물놀이’는 현대어입니까?
고은 1978년 오늘날의 사물놀이 1세대인 김용배,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등이 그들의 풍물 기량을 처음으로 뽐내는 공연 당시 민속학자 심우성이 지어낸 이름이더군. 과연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내내 격렬한 학생운동의 일선에는 으레 사물의 위압적인 지신밟기, 파쇼밟기로 정체화한 것이지. 본디 절집의 사물로서는 법고, 운판, 목어, 대종을 말하는 데서 연유한 셈이네.
김형수 유신독재와 싸웠던 1970년대 정신은 5·18을 겪고 난 1980년대 정신과 여러모로 다릅니다. 아마도 그 둘을 연결시키는 것이 민중 연희예술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마침 사회운동이 대중화되는 시점이라 풍물패가 그 꽃이었어요. 심지어는 루카치며 브레히트의 이름까지 풍물패가 전해줬거든요.
고은 그랬던가. 내 어린 시절은 한여름 김매기에는 반드시 이 사물꾼이 논 앞에 나서서 김매는 일렬횡대의 흥을 돋워주었어. 또 정이월 농한기에는 걸립굿과 안택굿을 이 풍장꾼들이 가가호호 순회로 해주고 곡식 약간씩을 출연하게 했어. 그런데 그때는 사물 중 북은 생략하고 꽹과리, 징, 장구 세 가지로만 했어. 꽹과리가 신명의 문을 열어 주면 장구가 잇고 징이 한 단락을 맺어주지. 어린 나도 꽹과리를 쳤어. 그래서 어른들이 나를 야 상쇠야, 상쇠야 하고 부르기도 했어.
김형수 와, 풍물패를 선도한 경험까지 있으신 거네요?
고은 이 풍장은 정월 대보름날도 추석 때도 향토의 근본 음향으로 거를 때가 없었어. 박경리 <토지> 처음도 추석 뒤의 이 풍장 소리로 시작하지. 그런데 징은 이런 풍장 풍물로만 사용하지 않고 마을 회합이나 비상시의 응급 신호로도 쓰였어. 한밤중 마을 지주네 창고가 털릴 때도 징소리로 잠을 깨웠고 두레 모임 때나 마을에 큰일이 생겼을 때 우리 집 위의 쇠정지 마루턱에서 징을 과앙, 과앙, 과앙 하고 쳐대면 마을의 사립문들이 여기저기서 열리게 되지.
김형수 농경 공동체 전체와 소통하는 소리가 징소리였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마당굿을 할 때도 세계를 열고 닫는 게 징이었지요?
고은 그렇지. 나는 그 징소리의 긴 울림과 그 울림의 소장(消長)을 따라가며 그 소리의 한없는 수행자가 되었어. 뒷날 산중의 황종조(黃鐘調)의 범종 소리가 산중을 가득하게 채우는 그 소리 장엄과는 또 다른 소리의 비극성이 내 서정의 체질에 닿아 있던 것인지 몰라. 징소리에는 지하 용암의 음성이 들어 있어.
김형수 그렇게 인간과 세계가 한 통의 생명체로 어우러져 있던 것을 파괴해온 책임이 근대 지성사에게 부과되어 있습니다.
고은 이런 징소리를 빼앗기고 꽹과리도 걷어가고 나자 장구만 설장구 신세로 입을 다물고 있었네. 징소리가 없어진 뒤로도 한동안 나는 한밤중 잠 깨었을 때나 백주의 폭염에 쥐죽은 듯한 단조로운 논밭 앞산 뒷산의 식민지 풍경을 채운 적막 속에서 징소리의 환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어. 부재는 실재의 재생이 되지.
김형수 부재하는 실재, 그 과앙, 과앙 하는 징소리 안에 들어 있는 장면들을 들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고은 모가 자라는 봄날 뜸부기 웃음소리가 일고 모 심을 때도 논두렁에서 풍물패가 풍장을 쳐서 모 심는 의식을 치른 뒤 비로소 못줄을 논의 양쪽에서 물 위에 내렸다 올렸다 하는데 못줄을 내리면 논 가운데 모꾼들이 모를 심어. 남녀가 내외할 때라 가운데는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있고 한쪽은 아낙네, 처녀, 소녀, 한쪽은 남정네, 총각들이 줄 서서 모를 심지. 이런 줄모는 줄마다 15cm쯤의 칸막이 표시가 되어서 거기에 맞춰 심는 것인데 이런 줄모의 이앙법은 1920년대부터였어. 그 이전에는 그저 여기저기 제멋대로 심었지. 그런데 이런 듬성듬성하던 이앙법도 조선 후기 18세기에야 창안된 것이라네. 그 이전 수전(水田) 농업 몇 천 년 동안 그저 제멋대로 씨 뿌리는 파종이었는데 인구가 늘고 수확은 늘지 않자 이앙법이라는 못자리 모 기르기와 그 모를 새로 옮겨 심는 지혜가 뒤늦게 작동한 것이지.
김형수 중학교 때 단체로 농번기 활동을 하면서 사춘기에 이른 남녀가 똑같은 논바닥에 발을 담그고 키득거리던 일, 농촌지도소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못자리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농약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계몽을 하던 일들이 마구 떠오릅니다.
고은 그런데 이런 모 심기에서 마을의 연애도 생겨났다네. 모 심고 일어날 때, 아직 한 번 더 심는 시늉을 하며 총각이 처녀 쪽을 슬쩍 쳐다보는데 그때 마침 처녀도 늦게 심고 나서 슬쩍 남성 쪽을 보다가 눈이 마주치지. 한 번으로는 우연이니 그 다음에 총각이 다시 시도하면 그때도 처녀가 총각을 쳐다보지. 이렇게 사랑이 싹텄어.
김형수 숨이 막힐 것 같아요. 어린 시절 논둑길에 두고 온 첫사랑의 시간들을 지금 감쪽같이 깨우셨어요.
고은 연애를 옛말로 “눈이 맞는다”라고 했는데 눈과 눈이 사랑의 시작이지. 그럴진대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사랑은 눈으로 들어오고 술은 입으로 들어온다”는 구절은 만고의 진실 아닌가. 그렇게 눈 맞아서 밤에는 마을 뒷산에서 손과 손이 맞게 되지.
김형수 눈을 사랑의 도구로 삼았던 것은 동서가 모두 같았네요.
고은 사실 아일랜드 말이 나왔네만 아일랜드 지주도 소작인 착취와 학대는 무지막지했어. 지주의 악취미에 충성을 다하느라고 마름이 소작인의 귀를 잘라 쟁반에 담아 보냈어. 그러니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 오라던 살로메와 그녀를 조종한 악녀 헤로디아에 견주어지겠지. 참 말라르메의 작품에 이 헤로디아를 소재로 한 ‘에로디아드’가 있지 않은가.
김형수 ‘에로디아드’가 그런 시라는 건 몰랐습니다. 말라르메는 보들레르, 랭보와 함께 현대시의 한 분수령을 이루는 이름인데, 그러고 보니 저는 이론으로만 스쳐오고 말았습니다.
고은 시 얘길랑 따로 하세나. 예나 이제나 동서나 다 소작인과 빈민 계층의 고통과 치욕은 언제 없어질지 모르겠네. 아일랜드의 소작료도 착취 수준이었어. 더구나 영국 지배 하에서는 아일랜드 인민은 짐승 취급이었지. 우리 고려시대 사찰의 농지 소작료도 무서웠어. 공전 1할, 사전 3할일 때 사찰답은 아예 반타작의 5할이었으니까. 무신정권 최이의 시대에 총리 벼슬을 한 시인 이규보의 일면을 우리는 그 탁월한 시 세계로 가리고 있는 셈이지.
김형수 ‘팔만대장경’의 창조 과정을 추적하는 어느 연구서에서 그런 이규보에 대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몽골이 침입했던 때인데요.
고은 나는 동네 농사에만 어린 농민이 아니라 국민학교 전교생이 4km를 걸어가서 일본인 대형 농장의 모심기를 무료로 했어. 낮에 주먹밥으로 받는 그 쌀밥 하나가 품삯이었어. 모 심는 철은 며칠씩 일본 농장의 논에 가서 살았어.
김형수 그 많은 나락농사를 짓고도 수확할 것이라고는 이슬과 서리밖에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고은 그런데 패전 분위기가 되자 일본인들의 표정에 어떤 여유도 없어졌어. 교장도 교사도 군대의 명령을 닮아 아이들을 다그쳐댔어. 일본어가 서툴러도 벌을 받고 나무열매 따기에 게을러도 연대 기합을 받았어. 학교에는 ‘천황 폐하’만 있고 ‘황군’만 있고 미국, 영국을 귀신이나 짐승으로 저주하는 ‘미영귀축’만이 있었지.
김형수 정말 극악했군요.
고은 고향마을 관동군 주둔의 병력도 대대 병력이다가 곱절로 늘어났어. 그러니까 만주 지방이나 중국 북부에 있던 병력이 내려와 미군의 한반도 상륙에 대비하고 있었지. 일본 본토 여섯 군데와 그 밖의 지역에서 미국의 일본 상륙을 저지하는 최후 결전의 작전이 있게 되었어. 북해도 쪽이 ‘결1호’이고 본토 이외의 곳 제주도가 ‘결7호’이지. 그런데 이 제주도 작전 다음의 작전지역이 군산 일대였어. 삼개 육군 사단, 일개 혼성 여단의 7만5000 병력이 제주도를 최전방 진지로 만들었는데 그 제주도가 함락될 때의 최후 결전이 조선반도로 설정되었지.
김형수 사대와 굴종, 집단적 수모의 기억들이 우리에게 영원히 치유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팽창을 경험한 대신 그 피해를 체험하지 못한 정신은 지구의 광범한 지역을 점하고 사는 압도적 다수 인민의 공감대를 얻지 못하리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고은 태평양 복판 사이판 등지의 섬에서 일본군 전원 옥쇄라는 자살 사태 이래 오키나와에서도 미군에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한편 그 옥쇄가 있게 되었어. 오키나와는 이 옥쇄로 아들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서로 죽이고 스스로 자살하는 그런 참극이 있었어. 더러운 적군에게 죽느니 깨끗하게 우리끼리 죽자는 강제 명분이었지. 그래서 일본 본토의 일본인들도 다 이런 옥쇄를 각오하고 있었어. 조선반도의 일본인이나 일본군도 옥쇄를 앞두고 있었던 것인데 이런 극한의 상황이 바로 조선인 사회에로 그대로 연장되는 판이어서 우리들 국민학교 어린 것들마저 미영귀축에 대한 증오심으로 뭉쳐지게 되었어. 강제 역시 자발성 못지않게 자신의 감정과 의지로 다져지는 것 아닌가.
김형수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왔다고 말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것은 예측도, 준비도 하지 못했다는 걸 뜻하는데, 그 무렵 일제의 마지막 표정을 시골에서도 읽을 수 있었습니까?
고은 할미산 일본군은 매일 연습전을 했어. 총탄이나 포탄은 아껴야 하므로 빈 총검으로 돌격과 사격 연습을 할 때는 산 전체가 군대들로 덮였어. 우리 마을 사람들도 이런 일본군의 지시로 목검 훈련을 받고 아낙네들은 후방의 병사 지원의 훈련을 받았지. 그러니까 우리 마을과 이어진 몇 마을은 온통 일본군의 부속지역이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 없이 병영의 군속으로 조직화된 상태였어. 전쟁은 그 전쟁의 최전방 못지않게 후방을 최전방화하는 사실을 나는 전쟁론이나 군사학 이전에 고향의 어린 시절에 실제의 사실로 터득한 셈이네. 전쟁은 일부가 아니라 전체이지. 거기에서는 어떤 최소한의 개체독립도 불가능하지. 인간에게 고유명사가 필요 없는 것 말이네.
김형수 아, 개체독립도 불가능했다는 말씀이 가슴에 아프게 박혀 옵니다. 시인은 하나의 독자적인 정부여야 된다고 하셨던 게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