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0선](15)
김동리 ‘역마’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mhdn/36674와 경향신문’에 동시에 연재되는 작가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0선을 전재합니다. 명단편 선정은 황석영 작가와 문학평론가 신수정 교수(명지대 문예창작과_문학동네 편집위원)가 공동으로 작업했습니다. 황석영 작가는 단편을 읽음으로써 역사서나 경제·사회학 전문서적보다 훨씬 우리의 삶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도 역사도 증발된 무중력 공간에 펼쳐진 운명적 사랑
김동리는 1913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명은 창봉, 자는 시종이고 필명은 동리였다. 그의 가계가 유학자의 집안이었지만 어려서부터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모친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김동리의 아버지는 오십이 넘어 늦둥이로 그를 보게 되었는데 환갑을 두 해 앞두고 사망했고 그의 맏형이 호주가 되었다. 맏형 김범부(金凡父)는 1897년생으로 김동리의 아버지이자 그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동서양 철학에 해박한 ‘거리의 철학자’로 <주역>과 <삼국유사>에 정통한 ‘신라정신의 대부’로 불렸다.
김범부와 아우 김동리의 사상적 밑바탕에는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에서 태어난 것과 이곳이 동학의 수운과 해월의 고장이었다는 점 이외에 김범부의 일본 도요(東洋)대학 유학 기간 중 접한 ‘다이쇼 교양주의’의 영향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근대적 개체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불안한 ‘개체’와 그 ‘개체를 초월하는 것’의 문제에 관심을 둔다. 그 후 쇼와 시대로 오면서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마르크시즘에서 파시즘으로 전향하는 사상적 진통을 겪을 때 김범부는 ‘조선정신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들어선다. <화랑외사> <김시습전>의 집필에서 보이듯 김범부는 전통적 민족주의를 택했고 쇼펜하우어, 니체 또는 딜타이의 영향인 듯 인간 정신의 근원이나 주역에 천착했다.
동리는 1928년 서울 경신고보에 다니다가 4학년에 중퇴하고 귀향하여 이후 4년 동안 일어판 세계문학전집을 읽어치우고 동양 고전에 심취했다고 한다.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가 당선된 다음,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 기거하는 그의 형 김범부를 찾아 상경했고 형의 제자인 배미사를 통해 서정주를 만나게 된다. 엉뚱하게도 서정주는 이 무렵에 소설을 쓰고 있었다니 시인 김동리와 소설가 서정주가 만난 셈이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의기 상통했고 서로 ‘키릴로프’다 ‘샤토프’다 하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주인공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나중에 김동리와 서정주는 김범부의 영향 아래서 각자 ‘무녀도’와 ‘화사집’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 무렵 형인 김범부가 서울에서 사천의 다솔사로 내려가자 동리는 형을 따라 거처를 옮겨 해방 무렵까지 머물게 된다. 이때 그는 ‘동구 밖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개구리 떼의 환청과 비단이불처럼 펼쳐진 뒷산의 진달래 빛깔로 표상된 환각을 본다’고 했다. 이는 시대로부터 스스로 벗어난 식민지 청년의 고독이었다. 억압과 굶주림과 고통 속에 있는 주위 사람들의 세계에서 자신을 끊어내어 ‘절대적인 궁극’의 대상을 탐구하겠다는 것이 그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쓴 그의 ‘무녀도’가 나중에 말년의 <을화>로 종결되는데 그의 소설에서는 언제 읽어도 기묘하게 ‘시간의 실종’이나 등장인물의 ‘증발’이 느껴진다. 과거 현재 미래 따위는 사라지고 인물도 없어지고 샤머니즘 운명 허무 등의 소재와 주제만이 밤하늘의 풍등처럼 떠있다.
김동리는 1937년 사천의 야학인 광명학원 교사로 자리를 잡았고, 나중에 ‘불화’로 개제한 ‘솔거’를 <조광>지에 발표했다. 일제하의 문인보국회, 국민문학연맹 등의 가입을 거절했는데 당시 서울에 있지 않고 지방에 은거했던 점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942년 광명학원이 일제에 의해 폐쇄되고 김범부가 구속되자 절망과 분노를 안은 채 사천을 떠나 한때 객지를 떠돌았다고 한다. 해방과 함께 서울에 올라간 김동리는 이듬해부터 문단의 좌우투쟁에 개입하여 민족진영에 입각하여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일에 나섰다. 서정주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조연현 등과 함께 좌측의 ‘문학가동맹’에 맞서 ‘청년문학가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에 취임했다.
1948년 좌파 비평가인 김동석 김병규 등이 순수문학과 휴머니즘을 표방한 김동리의 민족문학론이 현실과 시대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주장하자 김동리는 그들의 빗발 같은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공산주의 문학을 매도했고 순수문학은 민족문학이며 ‘제3휴머니즘’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아마도 이는 르네상스기의 고전적 휴머니즘, 근대과학의 합리적 정신과 결부된 시민혁명기의 계몽적 휴머니즘에 이어 나중에 실존주의로 통합되는 인간 존재와 그 본래성을 고수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렇지만 휴머니즘이란 개념의 추상성과 현실에서의 애매함으로 인하여 추상적 원리에 그치고, 오히려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될 위험성도 내포한다.
누군가 ‘현실과 정치에 전혀 관심 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자기의 또 다른 ‘정치적 견해’를 말하고 있다는 함정에 빠진다.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지고 좌다 우다 진영을 가르는 상황에서 어느 한편에 능동적으로 서게 된 김동리의 ‘문학과 사상’은 이제 ‘순수한 교양주의’가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테제’로 굳어져버린다.
여러 신문사의 문화부장과 편집국장을 거쳐 전쟁 시기에 ‘전국문화예술인총연합회’ 구국부대장을 지내고 예술대학 교수와 예술원회원이 된 것이 ‘약관’ 40세인 1954년이었다. 이후 김동리는 정부의 수많은 문화예술과 관계된 명예직과 상을 받았고 몇 차례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에 피선되었으며 예술원장을 지냈다. 김동리는 조연현, 서정주와 더불어 이념적 동반자로서 말년까지도 두 차례의 군사정권과 함께 갈 수 있었다.
그의 단편 ‘역마’는 역마살이라고 하는 팔자를 지고 태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요즘은 노래에도 나오는 화개장터가 작품의 무대다. 산과 바다가 지척이고 하동포구 팔십 리 뱃길이 있어서 화개장터는 남도의 유명한 장이다. 흐드러진 장터에서 주막을 하고 있는 옥화는 본시 그의 어미가 젊은 남사당의 진양조 가락에 빠져 하룻밤 풋사랑에 태어난 딸이었고, 옥화 아들 성기는 구름 같이 떠돌던 중과 인연을 맺어 낳은 자식이었다. 같은 운명의 할미와 어미는 성기의 사주에 역마살이 끼어있음을 걱정하여 아이가 열 살 무렵부터 쌍계사에 올려 보내 동승질을 시켰다.
어느 날 늙은 체장사가 딸을 데리고 주막에 묵었는데 떠돌이 신세타령을 하고는 딸을 맡겨놓고 화갯골에 들어갔다가 하동 나갈 때 데려가마고 했다. 그맘때 성기는 절에도 못 붙어 있고 어미 옥화는 자식의 역마살이 발동할까 걱정하여 꼭 화개장에서만이란 조건으로 책전을 내주었다. 성기는 한눈에 체장사 딸 계연에게 마음이 끌렸다. 옥화도 아들을 붙들어 둘 수 있을까 하여 계연에게 시중도 들게 하고 둘이 마실도 나가도록 했다. 어느 날 옥화가 계연의 머리를 빗겨주다가 귓바퀴의 조그만 사마귀를 보고 놀란다. 서른여섯 해 전에 남사당으로 장터에 들어와 주막집 홀어미와 하룻밤 인연을 맺었다던 체장수 영감의 얘기가 떠올랐다. 체장수 영감이 아비라면 옥화와 계연은 이복 자매간이 되는 셈이었다. 성기는 계연에게 이미 마음을 빼앗겼는데 옥화는 체장수와 계연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 상실감으로 성기는 앓아눕게 되었고 옥화는 아들에게 사실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고는 ‘니 애비가 있을 강원도 쪽으로 가보고 싶으냐’고 달래본다. 얼마쯤 지나서 성기는 엿판이나 하나 맞춰 달라고 한다. 그러고는 체장수 부녀가 떠나간 길과 반대편 길을 향하여 떠난다.
읽고 보니 옛 그림을 본 듯이 아련하고 정겹다. 어디선가 읽은 듯싶기도 하고 어려서 추석날에 어른을 따라가서 보았던 한국영화 같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간대의 지리산 주위를 둘러보면 남북에 분단정권이 들어선 이후 제주도에서 4·3사건이 터지고, 이를 원인으로 여수와 순천에서 군 반란사건이 일어나며, 이들은 바로 이 고장을 근거지로 하여 빨치산 활동을 치열하게 전개하던 때이다.
아마도 김동리는 바로 이러한 화개장터를 통째로 타임머신에 실어다 구한말이나 해방 전 일제시기의 어느 때에다 펼쳐 놓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김동리 단편소설 ‘역마’는 인터넷 상에 게재하는 것을 언치 않는 유족의 뜻에 따라 소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