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평론가 김형수 바람이 그토록 불어대더니 이제 자리를 잡았는지 조용합니다. 유목민은 대기, 냄새 따위도 세상을 구성하는 물체로 보았는데, 봄 기색이 완연할 때마다 새삼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근에 쓴 소설 때문에 그런 상념이 더 많아졌는가 봐요.
고은 자네의 역작 <조드> 첫 머리는 인상적이데 그려. “옛날도 아주 옛날. 대지가 처음 모양새를 갖추고, 이제 해가 뜨는가 하면 나뭇잎이 깨어나고 달이 솟는가 하면 창포가 푸르러지게 된 후의 일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조그만 연못 하나가 자라서 아주 커다란 호수가 되었다….” 이 예외적이고 간결한 대칭의 문체는 시에서는 고대 이백의 절구 절창에서나 보이는 것이지. 나는 <조드> 서사의 천지에 바늘 하나 못 하나로 그 자력에 붙어버렸네.
김형수 몽골 신화의 대지 서사를 옮긴 것입니다. 아름다운 경관에 발자국들이 덧쌓이면 자연이 얼굴을 감추고 흐르는 물이 숨어버린다고 하는 말들과 함께요.고은 거기에 씨족 추장이 딸을 햇빛이든 달빛이든 하늘이 오면 데려가도록 하라고 하는데 이는 스키타이 전설에서 왕이 딸을 태양한테나 시집보내겠다고 하는 호언장담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지상의 한 왕이 태양을 부마로 삼겠다면 그런 시대의 여성이란 벌써 우주적인 짝이 아니겠는가. 기껏해야 태양 숭배의 시대인데 태양을 제 수하에 두는 그 배짱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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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임옥상 화백
김형수 흉노 신화의 한 가닥을 틀림없이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대륙 기질에서 자주 스키타이 정서를 느낍니다.
고은 또한 선사와 역사의 접변기 이래 모계사회의 여성 존엄은 인류사의 기억 속에서 반추되어 마땅하네. 아비가 누구인지를 상관할 바 없이 어머니를 종족의 원적으로 삼는 고대 성(姓)받이의 어떤 경우는 어머니 성을 따랐을 터이지. 우리는 특히 중세 이래 성으로 일관했으나 내 어린 시절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씨로 통칭되었지. 그래서 오늘날의 ‘성명’이 아닌 ‘씨명’으로 내 성과 이름을 쓰게 되었어.
김형수 성(姓)이라는 글자는 ‘여자(女)’가 ‘났다(生)’로 되어 있는데요. 그런데 성과 씨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고 있습니다.
고은 본디 성은 혈통의 연원이고 씨는 그 혈통의 토지 기반이어서 본관을 뜻하지. 그 아래에 족이 생겨나네. 모계 이래 중원에서는 제왕이 제후에게 성을 주었다 하지. 그런데 씨가 제례적인 공동체나 조상 숭배의 그것이라면 ‘족’은 집단의 군사적 공동체를 뜻하지. 고대 복희씨나 여와씨나 신농씨, 황제씨와 요제, 순제가 다 어머니 성씨였지. 성(姓) 자체가 여성을 뜻하지 않는가.
김형수 그때까지 모계사회였습니까? 단군신화에도 곰이 마늘을 먹고 웅녀가 되었으니 우리 민족도 시작은 모계가 되는 것 같습니다.
고은 오늘날 반드시 인류가 원시 난혼 시대, 집단혼 시대와 모계사회 이후 부계사회로 이행되었다는 모건의 학설을 지지하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었으나 모계의 흔적은 동서양 상고시대에 뚜렷하네 그려. 부인이 사당을 지키는 신성한 임무를 전담한 것은 모권 내지 여권의 제정적(祭政的)인 발생을 뜻하는지 몰라. 고대 그리스 델피 신전도 처녀무당이 사제의 으뜸이었어.
김형수 유목민에게는 그런 흔적이 꽤 늦게까지 남아 있었나 봅니다. 샘물이나 강물도 어머니의 피로 여겨 함부로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그 자식으로 보아서인지 “자리를 옮긴 돌은 사흘을 아파한다!”고도 해요.
고은 멋진 시대의 감각이네 그려. 고구려 결혼 관습으로 신랑이 처가살이로 결혼생활을 하다가 아이를 낳은 뒤에야 본가로 돌아오는 것이나 근대까지도 처가살이 풍습이 있는 것들과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전기까지 여자가 재산상속권 행사를 한 사실이나 조선 사대부 가문들의 부인이 엄연한 재산권 행사를 하며 남편의 경어 사용으로 품위가 존중된 사실들은 오랜 사회사를 채워온 것인데, 이것이 조선 후기 교조화되는 주자학 상황에서 주자가례적인 남존여비가 심화되었겠지. 그래서 특히 서민층 아녀자에게는 숫제 성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없고 문자 해독이 금지되었어. 그래서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의 경우는 특별하지. 이들에 견주어서 차라리 노류장화의 삶으로 나선 황진이의 ‘자유’야말로 남녀차별을 타파하는 자신의 세계가 가능했어.
김형수 해가 달을 낳았다 하여 해를 여성에 달을 남성에 비유했던 유목민 신화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고은 고대 중국 신화 속에서 활동하는 여와씨야말로 인류를 창조한 천신이 아닌가. 아니 그녀가 심심한 나머지 인간과 만물을 만들었다네. 이런 신화 시대의 절대신이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역 8괘의 건(乾) 3연(三連)이 하늘과 남성을 뜻하고 곤(坤) 3절(三絶)은 땅과 여성을 말하는 데서부터 여성의 하위가 확정되어버리네. 그래서 하늘은 존귀하고 땅은 비천한 것으로 건괘, 곤괘가 강조된다네.
김형수 저는 부계사회에 지쳤는지 모계적 상상력에서 영감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고은 수컷의 보복이 본시는 원시 성반란이기도 하지. 상고시대 신화나 제정시대 여성 우위가 전도된 것이지. 심지어 서경(書經)이 외쳐대기를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노라’에 이른다네. 조선 왕조에서 왕비를 곤전(坤殿)으로 부르는 것도 그렇겠지. 실제로 내 어린 시절은 마을 두레에서도 부녀자들은 남정네한테 모든 것을 내맡긴 허울의 상태로 살았어. 이름도 어린 소녀는 ‘조그마한 이’라는 ‘쪼깐이’였어. 내가 1970년대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옹호하는 시 제목을 ‘쪼깐이의 노래’로 지어본 것도 어릴 때의 기억에서 나온 셈이지.
김형수 그 작품은 참 읽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제가 찾지 못한 시에 속합니다. <만인보>에는 그런 이름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나오는데요. 대표적으로 ‘물캐똥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고은 오랫동안 평민, 천민의 사내도 성씨 없는 이름만 있었지. 물론 그 당시 여자아이들도 여자에게 이름이나마 붙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절로 복순이다, 덕순이다 또는 필례다, 순례다 하는 이름이 있었지만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조선 말기 고종 연대가 아니었나 싶어. 그 중에는 잇달아서 아들이 아닌 딸을 낳으면 ‘딸그만이’라는 이름이 붙지. 그게 ‘네 뒤로는 사내동생을 보아라’라는 염원을 강제해서 ‘후남(後男)’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하지. 그 중에는 쌀을 많이 타고나라는 ‘쌀봉’이가 호적에 ‘미봉(米峰)’으로 올려지기도 했어. 이러다가 1940년대 성씨가 강제로 일본 것으로 되면서 이름도 남자는 일본의 ‘타로(太郞)’가 되기 십상이고 여자는 거의 다 일본 여자 그대로 이름 끝이 자(子)로 되어버리고 말지. 유키코(雪子), 하나코(花子), 다마코(玉子), 히데코(秀子), 도미코(富子) 하루코(春子)였어.
김형수 일본에서는 여자 이름에 왜 아들 자(子)를 붙일까요?
고은 이름에 자가 붙는 일은 고대 중국에서는 성현에 대한 경칭이기도 했어. 공씨에 자를 붙여서 공자고 맹씨가 맹자였고 이씨는 노숙한 경지를 뜻하는 노자가 되고 이렇게 되니 전국시대 제자백가 여러 현사(賢士) 중에서도 순자가 되고 관자가 되고 말지. 심지어 자(子)씨 성까지도 있게 되지. 그래서 딸 낳은 집에서 다음에는 아들 낳으라고 ‘여자’에 하나 더해서 ‘여자자(女子子)’라는 이름을 달아주지. 심지어 코도 ‘비쯔(鼻子)’, 귀도 ‘얼쯔(耳子)’라 불러서 남자 선호의 극단으로 나아가지. 물론 태어나는 딸마다 다 아들 자자가 붙는 것은 이런 중국의 작명 사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본 씨명을 따른 것이지. 이렇게 되자 어쩌다 재래식 이름인 ‘복녀’나 ‘춘심’ ‘입분이’는 무척이나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어. 오늘날의 미국식 한국인의 이름에 대해서 재래식 이름이 그렇게 여겨지는 것하고 어금버금하지.
김형수 지배자의 용모가 교체되면 미의식도 교체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고은 1940년대 후반 미군 주둔 이래 그 미군부대 주변의 여인이 일제시대 ‘아이코(愛子)’였다가 ‘엘레나 킴’이나 ‘제니퍼 팍’이 되는 시대의 선사(先史)이기도 한 셈이지.
김형수 그런 이름에도 우리 민족의 파행적인 근대를 주도할 감독자들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임무 교대를 했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고은 사실 한국인의 성(姓)이라는 것도 고대사회에서는 왕이나 귀족들의 그것에 불과했어. 대부분의 생민들이야 존재의 무명성과 생의 익명성을 자신의 숙명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어. 이런 사실은 가령 원시시대를 그대로 이어오는 아프리카 바르바족이 장구한 세월 내내 한 인간이 세 개의 이름을 갖고 사는 존엄스러운 바가 부럽기 짝이 없게 하지. ‘내적인 이름’ ‘생의 이름’ 그리고 남에게 알리지 않는 ‘존재의 이름’이 있다네. 두 번째 ‘생의 이름’이 성년이 되는 통과의례 고행을 겪은 뒤 받는 것으로 신분이나 연령을 나타내고 세 번째가 우리네 양반의 호(號)와 같아서 본인의 뜻대로 지어지는 것이겠지. 이런 사람이 죽은 뒤에는 첫째의 이름으로 세상에 기억되는 모양이야.
김형수 아프리카를 인류 ‘문화들’의 고향으로 삼을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 같아요. 당대 문명이 고착시킨 것과 다른 수많은 사례가 그곳에 있으니까요.
고은 아프리카를 함부로 내치는 것은 인류의 모독이지. 이름이라는 것은 씨족의 한 단위로 가입된다는 것이고 조상의 점지를 받은 후손의 정체성이 성립되는 것이지. 사실상 선사시대 씨족 뒤의 부족사회나 근대 민족사회라도 씨족의 잔재가 역력해. 씨란 한 혈친이 함께 음식을 차릴 때의 곡도(曲刀)에서 생겨났지. 조상숭배의 씨족의 표징이 바로 족이라네. 모든 고대종교도 이 조상신의 손에서 생겨난 것 아닌가. 구약전서 봐. 성씨도 이름도 이런 조상 점지였어.
김형수 조상숭배가 모계사회에서 생겼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만, 조상숭배는 인간의 세계관이 자연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옮겨가면서 생겨난 형태라고 들었습니다.
고은 인간에게만 고유명사를 달고 있는 것이 인류의 사촌인 원숭이와의 경계를 이룬다면 고대 통치자는 인류 하나하나를 인격체로 인식한 적이 없고 피통치자 즉 가축이라는 의식으로 일관했어. 그래서 가축을 헤아리는 수로 사람도 한 마리 두 마리의 구(口)로 지칭한 것이지.
김형수 밥 먹는 입의 개수를 식구라고 세는 것처럼요?
고은 한반도도 근대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이름이나 성씨가 붙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했어. 우리가 알고 있는 서민대중을 흔히 봉건시대 명사로 ‘백성(百姓)’이라 하지만 이 백성도 고대에는 상류층을 가리켰지. 그 귀족 지칭의 어휘가 타락해서 오늘의 ‘만백성’이 된 것 아닌가. 하기야 불교 미륵경전도 상생경(上生經)의 상류층 세계가 하생경의 대중세계로의 확산을 지향하거나 서구 귀족이 18세기 이래의 부르주아 신흥계급과 표면적인 구별이 없어지는 것하고도 유사한 노릇이지.
김형수 만백성이 그런 뜻이었군요? 불교 초기 경전 ‘숫타니파타’에 이름 이야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모든 생물이 태생의 차이에 따라 종류 구별이 되는데, 사람은 태생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서 농부와 기술자와 도둑과 왕이 달라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이름을 얻게 된다는데요?
고은 일제시대 식민지 호적체계를 일괄 정리할 때 산간지방의 이름도 성도 없이 사는 화전민들은 그들이 사는 산비탈을 흐르는 물소리로 현지 조사원이 모두 수(水)씨로 성을 짓고 이름도 동쪽 오두막 사내는 ‘동남이’, 남쪽의 연장자는 ‘남숙(南叔)’ 그리고 다리를 저는 처녀는 ‘단녀(單女)’라 지어서 그곳 행정구역인 금화군의 이름으로 본관을 정해서 동성동본의 ‘금화 수씨’가 생겨났지.
김형수 조선총독부가 행정구획정리령으로 이제(里制), 면제(面制)를 시행할 때처럼 즉흥적인 편의주의가 판을 쳤군요. 제 고향에서 가까운 섬은 원래 누워 있는 듯이 보인다 해서 ‘눈섬’이라 했던 것을 ‘와도(臥島)’라 하지 않고 ‘설도(雪島)’라 개명했지 뭡니까?
고은 우리 마을 동구 밖에 와서 뿌리내린 떠돌이 사내 하나도 우리 마을 청풍 김씨네 머슴살이 때 청풍 김씨가 되고 아주 단단한 무쇠 같은 두 다리 때문에 ‘쇠다리’라는 이름이었다가 이른바 창씨개명 호적 변경 때 ‘사부로(三郞)’라는 일본 이름이 붙었어. 이런 성명 변경이 오랜 이름의 성차별을 없애주는 역할도 한 셈인데 그때까지 마을 여자들의 임시적인 통칭으로서의 이름은 조선시대 이래 여자에게 이렇다 할 이름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잔재를 드러내고 있었어. 삼월에 낳았다 해서 ‘삼월이’이고 김매는 도구 호미로 풀 잘 매라는 뜻으로 ‘호미’라고 불리던 아이가 ‘다마코(玉子)’라는 호적 이름을 얻었으니까.
김형수 이름의 배후에는 그것을 선호한 세대에게 공통된 미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시대의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미학적 자극이 당대의 이름에도 스며들어 내면화되고 제도화되니까요.
고은 고대국가에서 지배자가 국가성원을 객체화한 것처럼 또 고대철학이 여성을 근본적으로는 도구화한 것처럼 내 어린 시절의 여성은 가족적 사회적 인격체가 아니었어. 나의 어머니는 아마 환갑 이전까지는 밥상의 밥을 먹은 적이 없었지. 나는 할아버지와의 겸상이고 아버지는 아우와의 겸상인데 어머니는 추울 때는 방안에 들어와도 부엌과 큰방의 쪽문으로 들어와 구석 바닥에 밥과 반찬 한 가지로 따로 밥을 먹었으니까. 그럴 뿐 아니라 어머니는 식구들의 밥상만 차려서 방안에 놓고 부엌으로 돌아가 부뚜막에 밥그릇 국그릇을 놓고 쪼그리고 앉아 먹는 둥 마는 둥 했어. 이런 집안 풍경은 아무런 가책도 없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지. 이게 어디 우리 집만이었겠는가. 마을에서 남편과의 겸상으로 밥 먹는 여자는 서너 집뿐이었어. 지주네 늙은 안주인 정도가 금비녀 꽂고 밥상의 밥을 안방에서 받아먹었지. 식모와 침모, 유모가 갖추어진 안주인 마님이 남긴 밥상은 그 집 종년 차지가 될 때가 있지.
김형수 인류가 살아온 25만 년 동안 여성중심사회는 24만 년이고 남성중심사회는 1만 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생태계는 대부분 모계 중심인데, 이게 부계사회로 이동되고 나면 서열체계가 더 명확해지는 듯합니다. 계급의 발달이라 해야 할까요?
고은 언젠가 북한 개성의 옛 고려시대 성균관 터에 자리 잡은 박물관에서 고려 시기 남자 노예보다 여자 노예의 인신 가격이 훨씬 비싼 까닭이 여자의 번식 능력과 여자의 충실한 노동력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는데 조선후기나 일제강점기의 여성 평가는 남성의 그것에 현저하게 낙후되고 있었지. 실제로 일제강점기 풍다(風多) 석다(石多) 여다(女多)의 제주도에서도 여자는 남자의 종속 노동력에 불과한 여성의 오랜 비인간화 상태인 것을 1960년대 제주도 체류로도 알고 있었네. 이런 시대에 일제의 공장 착취에서 여성의 노동운동이 치열하게 지속되었던 사실은 현대 한국여성사의 선구적 자기 각성이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여성상위시대를 열었던 단초인 것을 알 수 있네 그려. 평양 여공 강주열의 투혼 말일세.
김형수 최근 진보적인 여성들이 아버지의 성씨와 어머니의 성씨를 동일한 반열에 올려 병기하는 것도 같은 현상일까요?
고은 그건 좀 타협주의이기도 하더군. 근대 일본의 여성도 세계 남성사회에서 가장 여성적이라는 그 절대복종과 헌신의 ‘미학’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해체됨으로써 오늘의 여권이 한류편의 자유분방한 바탕이 되는 것도 새삼스러운 노릇이지. 이제 한국 여성은 집 안뿐 아니라 집 밖에서도 남성의 만 년 기득권을 이양 받는 현상은 뚜렷하지 않은가. 이제 로자 룩셈부르크나 콜론타이는 더 이상 선봉이 아니지.
김형수 오늘 들어보니 그런 문명사적 전환기의 성격이 이름에서도 완연하네요. 1960년대 하버드대의 이과생들이 장차 인류의 삶을 바꿀 것이 우주선일지 원자력일지를 놓고 열띤 논쟁을 했는데 결국은 피임약이 문명사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나긴 생태 사슬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