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평론가 김형수 지난번 사범학교 이야기는 무척 마음 아팠습니다. 그 밤에 열세 살의 고독을 함께 나눈 밤하늘이 제 눈앞에도 펼쳐지는 것 같았어요. 수묵의 먹 자국이 푸른빛을 내듯이 한 문장의 별빛이 세계를 대신하다니! 그래서 갖게 된 생각인데, 대개는 풍경을 무엇엔가 귀인(歸因)시키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합니다. 의미가 부여돼야 정감도 결정되는, 즉 의미의 요인이 인지와 더불어 작동하는 증상을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번 별빛 묘사는 그런 속박에서 아주 자유롭습니다. 왜 그러는지는 아직 해독하지 못했어요.
고은 어떤 회화론에는 진한 원색이 아닌 2차색이나 엷은 혼색의 미의식이 무척이나 배타형을 숨기고 있다고 하지. 나는 이런 이론에 턱없이 찬성하는 바 아니지만 동북아시아 수묵화 세계나 문인화의 어느 골짝에 내면화되어 있는 그늘이라든가 음영(陰影), 그리고 창호지에 스미는 음예와, 소리의 12율(律)의 섞이기 쉽지 않은 음려(陰呂) 따위를 접신의 격조로 내세우는 데서 놀라운 이질 거절반응이 숨어 있는 것은 사실 아닌가. 그래서 동양화 전통에서의 담(淡)은 무섭지. 일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음예론에도 근대의식이나 서구의식에의 반동이 보이지.
김형수 이데올로기가 배제되면 담(淡)이 될까요? 탐미주의에는 어쩜 그리 통렬한지요? 한국인들은 사계절이 뚜렷한 탓인지 감수성이 풍요롭고 섬세한 게 사실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자주 지적·도덕적 실존의 문제보다 미적 태도로 치우치는 편향을 보입니다.
고은 반드시 이런 독선적인 심미주의와 내통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반도의 성정은 바다 저쪽의 중국보다 그 예각이 유난스럽지.
김형수 대지가 작기 때문일 거예요. 좁다는 것, 그래서 넓이와 깊이를 빌려서 쓴다는 것, 여기에서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읽지 못하는 지적 편향의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고은 신채호가 조선 사람에게 불교가 오면 조선의 불교가 되지 않고 불교의 조선이 되고 유교가 오면 유교의 조선, 기독교가 오자마자 기독교의 조선이 된다고 할(喝)을 터뜨렸지. 신라 왕비가 석가의 어머니 마야가 되고 여왕의 능이 불교 수미세계 천상 제2천인 도리천이 되고 조선 성리학의 교조주의는 다 해동공자, 해동주자 아니던가. 저 황사영은 아예 조선을 서학에 다 바치는 수작 아닌가.
김형수 해동공자처럼 수사학조차도 외부의 권위에 기댄다는 게 참 서글퍼요.
고은 사실인즉 송학(宋學)으로서의 주자학이란 그때까지의 원시유교 공맹 차원은 생활윤리거나 국가규범이었는데 공연히 불교 화엄학을 모방함으로써 이학(理學)으로 장식된 것 아닌가. 물론 동북 오랑캐에 밀린 남송(南宋) 체제는 일종의 국가수호의 형이상학이라는 존엄으로 정주학의 긍지를 삼은 것이지만 그래서 중세 주체사상이기도 하지. 이런 것도 정작 중국에서는 융통성이나 모서리가 무딘 유연성이 있는데 그것을 수용한 객지인 해동에서는 극단적으로 되지. 변방에서 요절을 내지.
김형수 그런 쏠림 현상은 왜 생기는지, 때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원칙을 만들어 스스로 피학적이 되는 증상은 또 왜 생기는 건지….
고은 단재의 지적 그대로 식민지 시대 독립투쟁노선으로서의 공산주의도 그 고난을 통해서 어느 이데올로기보다 극단의 적대의식을 강화하지. 한국 공산주의가 심하게 말하면 스탈린주의의 다분한 가능성이었어. 옌안 토굴의 중국공산당 근본주의 패거리 캉성(康生) 일당이 님 웨일스의 <아리랑>의 주인공인 조선의 젊은 혁명가 김산을 트로츠키스트로, 일제 스파이라는 혐의로 즉결처분하는 행패는 사실 임정 초기의 파쟁 불화나 그 뒤의 조선공산당의 국내외 분열을 통한 공격주의들과 유사한 극단주의이지. 이에 대한 우익 역시 일종의 무장세력이 되고 말지. 그래서 해방 직후 1945년 겨울에 접어들면 그때부터 2, 3년간은 이른바 민족 내부투쟁의 극단적인 사례들이 상습적으로 이어졌어.
김형수 진취적인 인간형들에게서 잘못된 신념이 형성, 유지되는 과정을 직시하는 건 괴롭습니다. 저도 세상을 알아가던 시절에 용기 없는 자아의 초라함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신념을 가불해서 사용했는지 몰라요. 젊음을 지나고 나서야 내 젊음은 왜 하필 그때였을까 하고 후회할 걸 말입니다.
고은 일제에 대응해온 선발대였던 국내 세력의 건준은 곧장 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내걸다가 흐지부지되고 충칭 임정 진영 역시 온건 우익으로 자신들의 정치공간을 얻지 못하고 말지. 그래서 임정 신진파인 신익희는 임정과 결별하고 임정계 광복군 장준하 역시 김구의 순정에만 집착하지 않게 되었는지 몰라. 이렇게 되자 한반도는 미·소 대결 그대로 좌우 대결로 이원화되는 빠른 정치 결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어.
김형수 8·15 해방이 민족의 온전한 미래를 불가능하게 만든 분단의 시작이었던 사실 속으로 다시 돌아오네요.
고은 이 양극으로서의 상극은 평소 순박한 인품에 살인범 같은 극악 범죄가 있게 되는 것처럼 평소 혼자서는 절대로 저지르지 않을 행동을 하는 경우가 집단에 참여했을 때 나오지. 대부분의 테러리스트는 본래 개인으로는 순진한 위인들이기 십상이야. 그렇듯이 해방 뒤 정치 집단의 분위기에 속한 사람들은 유유상종 속에서 놀라운 변종으로 바뀌지. 나치의 집단극단화도 그렇고 그 밖의 사회 여러 분야에서 최선이나 최악의 사태는 이런 극단의 집단심리가 만들어내기 십상이야. 조지 오웰이 말하는 ‘이중사고’도 이런 집단사고와 연결되는 셈 아닌가.
김형수 그릇된 경향성은 대개 필요에 의해서 발생되는 게 아니라 인지능력의 결함에서 파생된다고 합니다. 세상을 큰 눈으로 읽는 게 얼마나 어렵고 막중한지 모르겠어요.
고은 해방시기 1946년 전반기 말이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5년간 운운의 조선 신탁통치 사항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극렬한 국내투쟁은 적어도 38선 이남의 한국사회를 요동치는 격랑 위에 놓았어. 해방 직후의 건준 학도대 명멸에 이어 반탁학생의 우익세력이 다음해 벽두 전국학생연맹으로 나타나는데 이게 학련이야. 보성전문의 이철승이 위원장이었어.
김형수 한국 현대정치사의 유아기였어요. 제 발로 서기에는 너무 어렸던.
고은 그동안 국립대학안 반대파인 좌익학생 세력과 학도병 동맹세력에 이어 우익의 학련에 대응한 ‘학통’의 혈투는 도시 게릴라전을 방불케 했지. 그들의 지하실 바닥은 핏자국 투성이였어. 미 군정청의 좌익세력 불법화로 학련 세력과 서북학련 등의 월남 우익청년 세력의 김두한 일파 등과 함께 사회의 표면을 장악하게 되었어. 이런 사태 발전의 바탕에 바로 좌든 우든 극단주의의 집단의식이 그 행동의 숙주였는지 몰라.
김형수 “통일이야말로 분단시대의 수많은 원한과 희망을 먹고 자라난 민족사의 신생아”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라요. 그런 자아균열의 절망감을 시골 어린이들도 느낄 수 있었습니까? 미디어 수준이 한참 못 미치던 때인데요.
고은 시골에서도 서울에서 암살사건이 이어질 때마다 촌락 자체가 심리적으로 긴장 상태로 되어갔어. 고창 출신 김성수의 친구 송진우가 동아일보사 현관 밖에서 총 맞아 죽고 누군지 짐작도 못한 장덕수라는 인사도 총 맞았고 이어서 몇 번의 암살 모면과 납치 모면의 나머지 기어이 혜화동 네거리를 지나가는 차 속의 여운형이 총 맞아 죽으면서 경향 각지는 음산한 공간이 되고 말았어.
김형수 벌목꾼이 아름드리를 찍듯이 어쩜 그리 거목을 찾아 도끼질을 했는지 모릅니다.
고은 내 10대 후반의 기억 속에는 38선을 넘는 김구 일행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한참 뒤에야 본 사실이 아직도 생생하다네. 한복에 중절모를 쓴 김구의 육중한 풍모였어. 얼마 뒤에는 바로 그분이 경교장 처소에서 국방군 육군 장교의 총 세 발을 맞고 세상을 떠난 사건이 일어나지. 이때는 나라가 거의 전국적인 곡성으로 차 있었어. 아버지가 엉엉 울면서 나더러도 ‘너도 울어라. 너도 울어야 한다’ ‘오늘은 우는 날이다’라고 말해서 나도 무턱대고 울었어.
김형수 김구 이야기를 전할 때는 약간의 감정이입이 되는 걸 느낍니다. 까닭이 있으신가요?
고은 그 뒤 아버지는 한글판 <백범일지>를 구해다가 나더러 읽으라고 해서 그 쉽게 써내려간 구어체 분위기의 책을 읽게 되었지. 그 뒤로 그 책은 몇 해마다 한 번씩 읽은 평생 도서가 되었다네. 나에게 순정이 다 소진되었다고 생각할 때, 나에게 눈물과 정직이 고갈되었다고 생각할 때, 내가 너무 박람강기(博覽强記)에 파묻혀 있어서 스스로 다그칠 때 서가에 꽂힌 <백범일지>를 펴보며 자정(自淨)의 제례를 행하게 된다네. 그리고 그 책의 어느 행간에서 실컷 울음을 터뜨린다네. 어떤 때는 통곡이 되기도 하는데 그런 통곡 뒤의 내 심정은 지극한 청복(淸福)을 누리지. 나만의 신앙 간증이고 나만의 영험이 아닐 수 없어.
김형수 정서적으로 김구의 혈통이라고 봐도 되겠어요.
고은 박지원이 요동 땅의 어느 벌판에 이르러 여기야말로 울음을 울 만한 터전이로다라고 말했거니와 내 울음의 지성소는 바로 <백범일지>야.
김형수 이번에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셔서 너무 좋아요. 특히 추억담을 들을 때 머리가 유난히 맑아집니다.
고은 나는 사범학교 낙방 다음해 입시공부를 하지 않은 상태로 군산중학교에 입학했어. 그 학교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생만의 학교인데 양념으로 ‘모범 조선인의 자제’ 몇 사람의 조선 학생이 끼어 있다가 해방 뒤 순 조선 학생만의 시대를 새로 연 셈이었지. 그런데 해방 뒤라 지난날은 선택받은 부잣집 아이나 가던 중학교에 너도나도 가게 되어 한꺼번에 신입생 500명이 8학급으로 60여 명씩 한 교실을 배당 받았어. 교실 부족으로 강당을 몇 칸으로 나누고 일제 강점기 무도관을 교실로 쪼개고 했는데 이 500명 중에서 내가 1등으로 입학했어. 아마 내 생애 중에서 1등이라는 것을 한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라네. 국민학교에서는 한두 번 1등을 했지만 중학교 입학 이후로는 내 운세에는 1등은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네. 이 소문이 동네에 퍼지고 아버지는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동네잔치에 마을의 남녀노소를 불러들였어. 이런 잔치 덕담으로 나는 어이없는 신동 소리도 들어보았어.
김형수 논 가운데를 가로질러 달구지 자국이 구불구불한 풍경이 그려집니다. 길가에는 볏단들이 서 있고, 가을이면 나락과 마늘, 붉은 고추가 햇볕에 말려지던 시골길 말입니다. 그곳의 달밤 속에 서계실 아버님 형상은 얼마나 큰지 몰라요.
고은 1등 입학성적 덕분에 나는 1학년 6반 급장이 되었지. 그런데 나보다 6, 7세 연상의 학생도 있고 두메마을 10리 길 통학생인 나와는 달리 군산 시내 학생들의 위압적인 분위기로 급장 노릇은 시원치 않았어.
김형수 어린데다 몸도 약하고…. 담임선생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고은 담임은 동양사 교사인 강철종인데 이분은 뒷날 이어령의 처남이 되지. 이분의 여러 누이동생 중의 하나인 강인숙이 바로 이어령의 문리대 국문과 동기이자 아내였어. 성대가 늘 떨리는 목소리로 중국사 속의 원교근공(遠交近攻)이나 합종연횡(合從連橫)을 자세히 설명했어. 나중에는 교장 김인호와 함께 수복 후 개교한 전북대 교수로 가서 동양사학자로 정년을 맞았지.
김형수 나무가 숲이 되는 과정은 언제 들어도 흥미진진합니다. 시야가 커지는 걸 그때 느껴요. 다른 선생님도 기억하세요?
고은 교감 최혁인은 처음으로 교내 문예신문 월간에 자작시를 발표했는데 그 시 구절 속에 ‘음악이 혈액처럼 흘러가는 이 밤’ 운운이 인상 깊었어. 그런데 그것이 어떤 시인의 작품 표절인 것을 나중에 알았지. 식물 교사 최경식은 월남한 신혼부부 신랑이었고 사회과목 정윤기는 군산여상 교장 정찬홍의 장남인데 별명이 ‘정대포’였어. 과장하는 언동 탓으로 붙은 별명이었지. 한문 선생 전동권은 대학이나 중학 졸업장이 없는 서당 출신의 교사인데 8km의 신작로를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어. 자전거 위의 꼿꼿한 자세가 의젓한 분이었어. 김창환은 대수·기하 선생이었고, 나중에도 삼각함수도 가르쳤어. 박래제는 화가 김기창의 아내인 여류화가 박래현의 친동생인데 키가 5척이야. 체조 선생이었지. 호각을 자주 불어대고 엎드려뻗쳐 기합을 자주 시켰어. 그 밖에 술을 많이 마셔서 코가 빨개진 ‘코빨갱이’ 선생과 학도호국단 담당이고 교관이던 군복차림의 김진강이 생각나네.
김형수 어떻게 이름도 안 잊을 수 있는지. 그 시절에 특별했던 스승은 없으세요?
고은 나는 미술반에 들어갔는데 미술교사 안태환은 서울에서 막 미대를 다니다 온 곱슬머리 화가인데 나를 무척 사랑했어. 일제강점기의 것을 폐지하고 새로 학교의 모표(帽標) 도안을 그리게 했고 배지 도안도 맡겨서 둘 다 내 도안으로 만들게 되었어.
김형수 모표와 배지가 학생 작품이란 말인가요? 그림, 회화는 어떠셨어요?
고은 첫 교내전에서 1등상을 받았어. 본관 그림을 측면 각도로 그린 작품인데 교장실에 걸어놓았지. 상품은 잡기장과 잉크와 수채화 물감과 도화지 등이었지. 이 미술교사는 6·25 당시 인공에 부역한 뒤 행방불명이 되지.
김형수 일제하의 성장사에서 전해오는 가장 큰 울림은 모국어가 어떻게 모독당했는지를 증언하는 침묵이었습니다. 지금은 해방 직후예요.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데 새들이 지저귀고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소리들은 아직도 모국어의 철자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학적 자아도 눈 뜨지 않았어요.
고은 첫 국어 교과서 얘기를 안 할 수 없네. 해방 뒤의 편수 교과서라 오늘날의 교과서처럼 세련된 체제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감격의 교과서였어. 거기에서 시라는 것을 처음 만났지. 물론 서당 시절 훈장의 시경 국풍(國風) 몇 줄이야 눈여겨보기도 했지만 정식으로 정면으로 이것이 시라 하고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 시가 처음이야. 바로 이육사의 ‘광야’였어.
김형수 아아, ‘광야’. 만주 벌판까지 흘러가 독립운동을 했던 외삼촌의 대지가 떠오르는 시입니다. 선생님께 튄 영감의 불똥이 매우 강렬했을 것 같아요.
고은 ‘광야’라는 대공간. 닭 우는 소리도 없던 ‘태초’와 ‘천고’의 대시간 그리고 여느 인간이 아닌 초인(超人)이라는 대인간, 그것도 백마 타고 오는 대인간이 시 한 편 안에 들어 있는 것이지. 나는 대시간, 대공간, 대인간의 삼위일체인 그 시가 두려웠고 벅찼고 내 가슴속에서 마구 깊고 깊은 진동이 솟아나왔어. 이육사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그저 그런 엄청난 시를 쓴 시인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지. 일종의 신비평적인 사건으로서의 시 자체와의 해후임에 틀림없었다네. 바로 이 시가 내 시의 운명 전야에 빛나는 저 밤하늘 속의 북극성이었는지 몰라.
김형수 그곳에서 시력 50년을 맞기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멉니까? 50년을 맞는 시 ‘인도양’에서 보여주는 회한의 무게는 얼마나 큰지요. 외람되게도 저는 후반기의 절창을 거기에서 봅니다.
고은 하지만 그때의 나는 아직 화가 지망생일 뿐이었어. 나는 ‘광야’를 혼자 소리 내어 읽고 나서 혼자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속이 성적(性的)으로 떨렸어.
김형수 가슴이 성적으로 떨린다 하시니 강물 같은 생명 에너지가 전신을 굽이쳐 헤적이는 느낌이 전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