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고은과의 대화](36) 중학교 하굣길에 주운 ‘한하운 시초’는 내 정신의 화재사건이었어

라라와복래 2012. 7. 8. 07:07

[고은과의 대화](36) 양 세기의 달빛

중학교 하굣길에 주운 ‘한하운 시초’는 내 정신의 화재사건이었어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선생님의 어떤 말씀은 날짜가 한참 지난 뒤에 무릎을 치게 합니다. 지난번에 이육사의 '광야'를 읽고 “성적(性的)으로 떨렸다!” 하던 것도 그런 예에 속합니다. 한 정신에 눈 뜨는 순간 육체적인 해방감에 전율하는, 그 광활한 수컷의 첫 울음을 달리 어떻게 표현할까 싶어요. 생의 시간을 온통 창조적 긴장으로 채웠던 관록이 그렇게 활성(活性) 언어를 마구 뿜어내게 하는 건 아닌지…. 이제 시의 전야(前夜)를 얘기할 차례입니다.

고은 내 3년 동안의 학교 미술부 생활은 행복했어. 토요일의 오전 수업을 제외하면 5일간은 매일 7시간의 정규수업을 마친 뒤에 해가 질 무렵까지 미술부의 물감냄새 속에 파묻혀 있었지.

김형수 시력(詩歷) 50년 전시회 때 다들 놀랐는데, 그렇게 오랜 과거 속에 데생 수련이 있었을 걸 누가 알았겠어요. 한데, 집안 환경도 좀 들려주시면 어떻습니까?

그림 | 임옥상 화백

 

고은 집에 돌아오면 9촌 숙부가 되는 고창희와 지냈어. 안면도 관목(灌木) 벌채 사업과 군산항과 인천항의 선박해운사업으로 일제시기 이래의 천 석 부자의 부동산 전체가 차압 딱지가 붙으면서 망한 집의 차남이었지. 그는 서울의 경기중학에 다니다가 군산중학으로 내려왔지. 장남인 고창홍만 가까스로 서울 법대 중퇴를 면했지. 바로 그 고창희가 김소월 시집에 빠져 있었고,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읽고 또 읽었어. 둘은 한 방에서 하나는 시집을 하나는 기수나 기하 교과서를 붙들고 있었지.

김형수 시를 읽는 이가 9촌이고 기하 교과서를 보는 이가 선생님이라 하신 건데요.

고은 그 창희 아저씨가 나에게 수학자가 되라 했어. 지금은 하나에서 열까지 세면 더 이상 수를 세는 능력은 아프리카 부시먼에 가까운 수준인데 그 시절에는 제법 수학에 흥미가 나 있었지. 부시먼은 1과 2까지는 세고 그 이상은 그저 ‘많다’이지. 지금 내가 10 이상은 절망인 것하고 엇비슷하지 않은가.

김형수 아주 오래 묵은 ‘가지 않은 길’이 또 있었네요.

고은 학교의 미술부는 해방 시기의 격동 한 모서리여서 나만의 동굴 세계가 가능했던 셈이네. 하지만 학교에 가면 교실과 미술부가 아니면 거기도 사회의 정치 열기가 그대로 삼엄한 분위기로 번졌어.

김형수 중학생들에게도 정치 지도자가 있었습니까?

고은 우익 학련 계열의 후속인 학도호국단은 단장 함신호가 이끌었어. 언제나 교모를 삐딱하게 쓴 미남자였는데 내가 1학년일 때 4학년이었지. 그 당시 국방군 제12연대 연대장 함건호의 막내 동생이었는데 ‘차리이어엇!’ 하는 전교생 정렬 구령이 아주 음악적이었어. 시내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아서 여중과 여상의 여학생 몇 십 명이 잠을 못 이룬다 했지. 그런데 좌익의 학내 지도자는 5학년 서재열이었는데 키가 컸고 함신호의 하얀 얼굴과 달리 갈색 피부의 품행단정의 모범생인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줄줄 외운다고 했어.

김형수 이념의 차이가 경향성을 넘어 정치 행위로도 표출됐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고은 바로 이 서재열이 운동장 조회 때 교장과 교사 전원이 삼삼오오 조회장소로 나오기 직전에 정렬을 마치고 나서 열중쉬엇 자세로 모여 있는 전교생을 내려다보는 단상에 뛰어올라 동맹휴학을 선포했어. 선언문을 목청껏 읽고 나면 좌익 간부 학생들은 전교생을 각 학급별로 해산시켜 버리지. 나는 그런 해산 판에서 고무신 한 짝을 잃어버린 채 그것을 찾지 못했어. 그래서 한쪽은 맨발인 채 십리 길의 집으로 돌아와야 했어.

김형수 자아와 세계의 충돌 지점에 쓰러져 있을 그 고무신짝의 마음이 전해져 와요.

고은 이미 국민학교 때부터 국민학교 아동들까지 ‘신탁통치 절대반대!’ ‘신탁통치 만세!’ 따위를 철부지로 불러대는 일이 벌어진 바 있지만 중학교의 마당은 하루가 우익 학생의 판이라면 또 하루는 좌익 판이 되는 일이 한 달에 몇 번인가 되풀이되었어.

김형수 선생님은 어느 편에 섰습니까?

고은 나는 객체였어(웃음). 우익 학생 완장은 흰색이고 좌익은 붉은색이었으니 색조차 이데올로기의 언어였지. 이런 색의 정치 도구화를 벗어난 곳이 교실 한 칸 규모의 미술부의 공간이었지. 거기서는 색의 자유, 색의 이상이 어떤 외부의 개입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색가(色價)를 발휘했어. 색은 빛의 작품이자 인간 감각의 작품이지. 빛의 스펙트럼이라는 빛의 분화를 눈의 감각이 받아들여서 색의 세계가 태어나지 않나. 나는 이런 색 또는 색채의 세계로서 이 세상의 물질적 존재를 총칭하는 불교의 색과 색계(色界)의 묘미를 좀 짐작하네. 아니, 불교에서의 색계는 우리가 사는 욕계(欲界)의 차원을 벗어난 제2의 욕계이기도 하지. 이런 점에서 색이라는 의미는 색채론과 색계론을 아우르는가 하네.

김형수 그 같은 감수성은 타고나는 건지 학습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여러 층위의 현상들을 단숨에 간파하는 안목과 정신의 아우라 속에 묻힌 체험의 본토를 발견하는 기쁨이 큽니다.

고은 내가 장차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뱃속에 지니게 된 동기가 있었어. 물론 어릴 때부터 누구네 집 안방 벽에 붙은 민화나 화투 따위를 그리거나 할미산 위에서 바라본 기차 지나가는 먼 풍경과 철새들의 하늘 여행 그리고 배 따위를 그리는 버릇은 있었으나 화가의 꿈을 갖게 된 것은 뒷날의 일이었네.

김형수 미술부를 현실적 긴장의 도피처로만 여길 뻔했습니다. 샘솟은 물이 언제나 예정된 길로만 가는 게 아니라 매번 더 낮은 곳으로 방향을 바꾸듯이 삶도 매 순간 운명의 방향을 수정하는 거라 생각하면 생의 시간들이 한없이 소중해지는 것 같아요.

고은 내가 태어난 집에는 책이 없었으나 재종조부네 사랑채에는 제법 많은 책이 있어서 그 책을 빌려볼 수는 있었지. 하지만 내 마음껏 책을 본 것은 외갓집에서였어. 외삼촌의 서가에는 외국문학과 예술에 관한 책과 내가 볼 수 없는 학술서적들이 잘도 정리되어 꽂혀 있었네. 내가 헤겔이라는 철학자의 이름을 안 것도 그 서가에서였어. 이태리나 불란서 독일의 책들도 일본어 번역판이 있었고 일본 이와나미 문고판의 작은 책들도 많았어. 그 가운데 반 고흐에 관한 책이 두 권이나 있었다네. 그것을 읽고 그 책 속에 수록된 고흐의 그림을 통해 그 정신 나간 듯한 초속(超俗)의 세계에 깔려 있는 인간 내면의 지옥 같은 오뇌에 전율했겠지. 어린 나에게도 그는 화가일 뿐 아니라 진리나 세계를 위한 순교자 같았어.

김형수 책갈피 속에서 고흐가 불렀군요? 누구도 알지 못하게, 그러나 아주 뜨겁게.

고은 그래서 나는 내 온몸에 고흐의 피가 흐른다고 여겼지. 귀를 자르다니! 제 신체에 총알을 박다니! 여름밤의 별들을 삼키다니! 해바라기와 보리와 밀밭의 그 광염(狂炎)에 투신하다니! 우체부 할아범 룰랑에게 한없는 우정을 바치다니! 아우 테오와 제수에게 그들이 고흐에게 헌신적인 것처럼 그 헌신에 헌신적으로 의존하며 그토록 고독해지다니! 끝내 고갱의 강한 우정에 강한 결별로 맞서서 남프랑스의 그 작열하는 태양광선 앞에서 육안 대신 심안을 뜰 수 있다니! 나는 마음속에서 이미 이런 화가가 되고 만 것이네. 외갓집에서 돌아온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쓰는 내 방 책상 앞 벽에 붓글씨로 쪽지를 써 붙였어. ‘고흐 아니면 무(無)다!’라고. 네덜란드 이름은 ‘판 호흐’이지.

김형수 선생님의 정신사는 식민지에 처했던 한 공동체가 온전한 자아를 찾는 여정에 복무합니다. 바로 그 정신사에 개입한 증여자 중에 이육사, 고흐 같은 불우한 거장들이 있었던 사실은 많은 생각을 다시 하게 합니다. 심안(心眼)에 국경이 없는 것도 그 하나입니다.

고은 내가 학교 미술부에서 오후 내내 행복에 파묻힐 수 있었던 것은 미술교사 안태환의 나에 대한 격렬한 편애 때문이기도 했어. 그는 내 그림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수채화 물감의 붓을 헹군 큰 물통 구정물에 내 대가리를 몽땅 처넣었어. 기합이었지. 박종철의 물고문이나 1970~1980년대 정보기관과 여러 치안분실에서 자행된 악명 높은 물고문 사태와는 다르지만 지도교사의 그런 가학적인 관심으로 내 그림 솜씨가 단련된 셈이었지.

김형수 그러게 아무리 빼어난 개인적 재능도 공동체의 재산임을 간과할 수 없어요.

고은 그 교사는 나에게 벅찬 미술이론도 무턱대고 주입시켰어. “태양이야말로 회화의 아버지다. 태양광선이야말로 예술의 어머니다” “태양광선 속의 광선 입자들의 작용과 인간의 시각 작용이 만나서 색의 세계와 형의 세계가 탄생하는 거다” 따위의 말을 하거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인상파의 외광 이론도 말하고 음영론도 말했어. 그런 것들은 나를 가르치기보다 자신의 열렬한 독백처럼 들렸지. 어느 때는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깔만이 아니라, 수백, 수천 가지라고 외치기도 했어. 나는 제1회 교내 미술전에서 1등상을 받고 나서 제법 학교 안팎에서 이름이 알려졌어. 조회 때 교장으로부터 상을 받았지.

김형수 풍습이나 명분 같은 것 못지않게 부자연스러운 억압이나 저항의 대상조차도 생명의 현재성을 빚는 재료가 되잖습니까?

고은 방과 후의 학교 미술부 생활로 나는 언제나 4km의 신작로를 저녁 어스름 속에서 돌아왔어. 이튿날 아침 등교시간에는 8km 거리의 옥구면 학생과 4km 거리 미면 학생들로 신작로가 가득했는데 저녁의 하굣길은 달랑 나 혼자였어. 이때의 고독을 나는 특권으로 누렸지.

김형수 정말 특권입니다. 고독 속을 걷는 건 혼자지만 발걸음은 이미 그것을 준 공간을 데리고 다니니까요. 지나가는 곳에 나무가 서 있든, 바람이 불고 눈비가 오든, 그 이동하는 감수성 안에서 실로 많은 상념이 명멸했으리라 사료되요. 그래서 길과 나는 서로 싫증내지 않았노라 했을, 그 시절의 사유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고은 기억은 연속성보다 불연속성이 더 기억답지. 빛 얘기를 더 하겠네. 스펙트럼에 의한 그 빛 갈래의 성질들이 우선 육안으로 분리되는 적, 주황, 황, 초록, 청, 남, 자주의 무지갯빛이지. 이 무지개가 비온 뒤 마을 저쪽에 걸리면 그것을 천궁(天弓)이라 했어. 절간의 개울다리를 홍예문이라 하는 것도 무지개를 말하는 것이지. 그런데 이 무지개 7색은 인상파 색채론에서는 무지개색 6색을 말하지. 적, 주황, 황, 녹, 청, 자(紫)말이네. 이것은 ‘스펙틀’이라고 하는데 이 이름은 화가의 것이 아니라 물리학자의 작명이네. 이 가운데에서 황, 청은 1차색이고 제2차 원색은 1차색의 혼합에서 만들어져서 적과 황 사이에서 주황이 나고 황과 청 사이에서 녹이 나오고 청과 적 사이에서 자색이 나지. 이것들은 각자의 보색이 됨으로써 색은 존재이기보다 관계의 작용이라 하겠네. 마치 레비스트로스의 구조학에서 관계가 존재를 낳는 것처럼 말이네. <주역> 계사전에는 적색이 건(乾)이더군. 이에 비해서 배달겨레의 백색은 모든 색의 총화이지. 백색이야말로 관계의 색 아닌가.

김형수 먼지 나는 길 위에서 한 존재가 깨어 매 순간 신록과 하늘과 새와 보리밭 따위를 보면서 얻는 관계의 춤이 새삼 눈부십니다. 좀 나중 일이지만, ‘편지’ 같은 시가 그런 감수성의 활동이 아주 왕성할 때 쓴 게 아닐까 해요.

고은 나는 괜히 내 나름의 공상으로 선이나 형은 공간이고 색은 시간이라고 단정하기도 하는 유치한 회화론을 만들어내기도 했어. 요컨대 내 소년 시절의 행복 속에서 미술실의 그것 말고는 거의 현실의 정서적 빈곤을 면할 수 없었어. 어쩌다 미술실에 우익 학생이나 좌익 상급생들이 와서 플래카드를 써 달라, 캐리커처로 이승만이나 누구의 얼굴을 익살맞게 그려달라고 강요하거나 여학생 사진을 가져와서 초상화로 그려달라고 하는 주문도 있었지만, 이런 일 말고는 미술부 실내만은 학교 안팎의 현실과 동떨어진 그림 속의 낙원이었어. 이때의 3년 미만이야말로 나 자신이 정신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

김형수 오늘은 어린 선재가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정말 선명히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고은 그러던 어느 날 그 특별한 행복의 절정이 학교와 집 사이의 길 위에서 있게 되었네. 이제까지의 세계와는 딴판인 새로운 세계에 나 자신이 들어섰어. 그리고 그 행복의 사건이 내 일생을 관통하는 천직(天職)의 그것일 줄이야 어찌 알아차렸겠는가.

김형수 생애 가장 큰 사건이 비로소 등장하나 봅니다. 어떤 건데요?

고은 저녁이란 언제나 나에게는 환생(還生)의 시간이지. 그 시각의 눈에는 저쪽에서 가까워 오는 것이 말인지 소인지 식별하기 어려운 박암(薄暗)의 시간이기도 하지. 명암 교체란 사물의 윤곽을 지워버리니까. 하지만 아침 항구를 떠나는 배의 그 욕망과 저녁에 항구로 돌아오는 배의 체념으로 나누어지듯이 저녁은 돌아오는 자의 귀환과 재생 그리고 원점과의 만남이 있지. 또한 저녁이란 시의 시간이 아닌가.

김형수 세속과 신화의 경계를 박암의 색채로 그리시다니! 항구의 저녁시간을 ‘풀 죽어 돌아오는 배의 체념’으로 그리시는 것도 참으로 인상 깊습니다. 초원의 유목민들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시간을 ‘하얀빛 때, 회색빛 때, 누런빛 때’로 나누는데….

고은 아마도 이런 저녁의 시간에 내 운명의 싹이 돋아났는지도 몰라. 학교에서 방과 후 미술부 실기연습을 마치고 십리 길 비포장도로를 터벅터벅 돌아오는 도중 길가의 어스름 속에서 무엇인가가 빛나고 있었어. 확실히 그것은 빛 덩어리였어. 가까이 가보니 내 눈 속에 갑자기 파고들었던 그 빛덩어리는 책 한 권이었어. 더 가까이 가니 그것은 바로 이제 막 세상에 나와서 거기에 떨어져 있는 시집이었어. <한하운 시초>라는 시집이었네.

김형수 하늘이 떨어뜨린 거네요. 인간의 정신을 목격하는 것은 허공을 긋듯이 날아가는 새를 보는 것과 같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새가 멀리 날수록 정신은 더욱 심원(深遠)해지니까요.

고은 1949년 신간의 시집이었어. 정음사 간행이었어. 지금도 선연히 기억하고 있다네. 심리학에서 말하는 ‘섬광기억’이지. 시집 본문 뒤에는 발행인 최영해라는 사람과 시인 조영암의 발문이 붙어 있었어. 나는 온몸이 저 구약 모세의 출애굽기에 나오는 불타는 떨기나무처럼 활활 타올랐지. 그 시집은 내 정신의 화재사건이었어.

김형수 헉, 정신의 화재사건! 어린 시절에 눈 덮인 방앗간이 타서 새까맣게 재가 되던 풍경이 떠오릅니다. 시가 인간을 태웠다는 말씀에서 그 극적인 사태, 눈밭에서 발화된 불씨가 한 마을의 농경적 거점을 전소시킨 일이 연상되는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고은 누군가가 그날 사가지고 가다가 분실한 것이 틀림없는데, 그래서 시집 표지도 매끄럽게 장정된 것인데 그 실물(失物)이 내 보물이 되고 말았지. 이것이 하필 여기에 있는 것은 나를 위해서였다!라고 속으로 부르짖고 그 시집을 가지고 집에 오자마자 읽기 시작했지. 저녁밥이야 먹는 둥 마는 둥이었고 밤새 책보를 풀지도 않은 채 그 시집만 읽고 또 읽었어. ‘가도 가도 황톳길’은 거의 외우다시피 했지. 새벽이 되었어. 나는 첫째 한하운처럼 문둥병자가 될 것, 나는 한하운처럼 떠도는 시인이 될 것을 맹세하고 마구 울어댔지. 이육사는 시를 알게 했고 한하운은 나를 시에 뛰어들게 했지.

김형수 감동적입니다. 어떤 체계에도 복속되지 않는 까닭에 어떠어떠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무엇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인식론적 계보상으로 한 주인에게 예속된 집짐승이 아니라 들짐승이라 할, 바로 고은적(的) 정신활동의 생태계를 엿보는 것 같습니다

 

편지

지금 나는 드넓은 후면(後面)을 돌아다본다.

삶은 까닭 없이 넓구나

길들이 재회한다.

하나의 길이 상모처럼 굽이친다.

누가 저 길로 빛발치며 올 것인가.

누가 별인가 그리움인가

어쩌다 새가 잘못 날 때 죽음이 여기저기서 메아리친다.

가장 멀리까지 들릴 새소리 밑으로 나는 가야 한다.

그리하여 솟아오르는 하늘에서 편지를 받는다.

받은 편지는 한 번 죽는다. 그리고 태어난다.

어떤 아낙네가 첫인사로 길을 묻고

함께 가다가 몇 마디의 어의(語意) 뒤에 헤어진다.

새가 나 대신 떨어져 죽는다. 종달새의 삶으로

다 마친 일 속에 반드시 남은 일이 있다.

마침내 반짝이는 편지 속에 저세상의 새가 운다.

지금 나는 밭에서 흙 묻은 손과 이야기한다.

편지의 구절들이 살아서 내 말이 된다.

저만큼 남은 처녀지까지 가기 전에

귀빈인가, 먼 곳에서 지진이 으르르 지나간다.

그러나 내 앞으로 올 날들이 서두르고

하늘은 무엇인가를 자꾸 포기하며 저 혼자 달아나며 높다.

편지는 하늘 것들을 이 땅에 쉽게 가지고 온다.

새가 죽은 뒤 극약의 정적 속으로 보리밭이 자고

언젠가 날고 난 다음 잊어버린 우렛소리 아래로

곧 누가 묻힐 근조(謹弔)의 언덕바지에서

편지는 비처럼 벼랑처럼 나의 묵은 현(絃)을 울린다.

여기까지 얼마나 많은 뜻으로 비가 왔는가.

 

  출처 : 경향신문 2012.05.2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251933465&code=210100&s_code=af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