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고은과의 대화](37) 통일은 오스트리아에서, 분단 상황은 게르만 민족에서 배우네

라라와복래 2012. 7. 8. 07:46

[고은과의 대화](37) 양 세기의 달빛

통일은 오스트리아에서, 분단 상황은 게르만 민족에서 배우네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선생님의 유년기 체험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일은 ‘먼 곳’의 발견입니다. 장항제련소의 굴뚝 연기로 상징되는 그 ‘먼 곳’의 매혹은 나중에 세계에 대한 한없는 모험을 낳는 문학의 동반자가 되었어요. 이육사의 ‘광야’ 충격도 먼 곳의 발호이고, 고흐의 형상도 내면의 먼 곳입니다. 이제 그 먼 곳을 견인하는 여기, 즉 실존의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고은 먼 곳이나 먼 것에의 지향이 내 내면의 생성인 셈이지. 그러나 우선 태생의 지형을 살피게 되네 그려. 조선 13도는 당시 218군으로 지방 고을이 나누어져 있었어. 옥구군이라는 내 고향 고을은 그중의 하나인데 옥구라는 한자 표기 그대로 비옥한 평야지대였지. 물론 옆 고을인 만경강 일대의 ‘징게맹게 외배미들(김제 만경 너른 들)’처럼 한반도 위의 지평선 평야는 아니네만 옥구 대야 회현 일대는 거의 구릉 따위가 없는 맨 들판이었어. 나머지도 몇 군데의 비산비야를 나서면 목이 확 트이는 준지평선의 들녘이지. 게다가 일본의 대농장 군림으로 바다의 일부를 노동집약의 강제 동원으로 메운 간척지 평야가 늘어나 있었지. 그런 일망무제의 공허한 들녘에 한겨울의 눈이 퍼부을 때의 그 지향 없는 무시간적 충만의 감동은 각별하지. 하지만 정작 내가 태어난 용둔리(龍屯里)라는 부락은 말단 구역으로 미제(米堤) 마을과 원당리(元堂里)를 합해서 미룡리(米龍里)로 통합한 뒤에도 후미진 한 자연부락이었어. 할미산이나 앞산 그리고 고씨들의 종중산인 뒷산 말고는 옥구면 만경강으로 흘러드는 긴 수로 양쪽에 기름진 논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 풍경이란 단조롭고 범용하기 짝이 없어.

김형수 한 편의 소설 무대 같습니다. 간척지를 낀 광대한 들녘에 눈이 내리는 ‘무시간적 충만의 감동’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고향은 매번 ‘비산비야’로 등장합니다.

고은 그래서 뒷날 함경북도 삼수갑산 끝에 있는 혜산진에서 태어난 이철범에게 출생의 열등감이 있었고 심지어는 강릉 경포대 언저리에서 태어난 16세기의 허균을 부러워하고 금강산 외금강에서 6·25 때까지 살았던 화가 한묵(韓默)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겼지. 그만큼 내 고향의 풍경은 전형적으로 명승지나 절경의 정반대였네.

김형수 대개 불우를 존재의 거점으로 삼을 때는 그에 맞는 풍경을 갖기 마련입니다. 선생님의 시들은 고향 풍경을 상처로 삼지 않는데요.

고은 나중에는 풍경의 평상에 시대의 비상이 와버렸지. 이런 고향에 대한 풍광으로서의 가난과 함께 가계(家系)의 가난도 왜 없었겠는가. 대대의 농투성이 핏줄이었으니까. 그래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같은 인도 바라문 명문의 아들인 그런 신분에 대한 어떤 반감도 생길 법하지. 그래서 타고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네만.

김형수 맞아요. 존재에게는 장소 못지않게 내력도 중요한 출발이 됩니다. 한하운을 읽고 문둥병자를 선망하는 현상도 그런 자아 서사의 갈망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고은 타고르 말이네. 그이는 할아버지도 마하트마이지. 간디를 마하트마 간디로 높이는 것처럼. 그 아버지 대벤드라나트 타고르도 ‘신성한 타고르’라는 존칭이 따라붙네. 인도의 오랜 4성(四姓) 계급 최상층 바라문 계층이며 동시에 ‘하늘의 자손’ 또는 ‘태양의 혈족’이었어. 신성한 종교적 우월성에 대대로 광대한 토지의 대부호였지. 젊은 타고르는 한때 그 대토지 지주로서 관리도 맡아본 적이 있었어. 거기서 유미주의 시풍이 좀 달라지고 농촌 개량에 관한 관심도 생겨났어. 그는 10대부터 시인이었어. 그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런 최상급의 운문의 대가들이었어.

   그림 | 임옥상 화백

김형수 군산에도 이규보의 흔적, 또 아버지, 삼촌 등 ‘구변문학’이 넘치는 가계사가 있는데요.

고은 타고르의 가문이 아니라도 시인들에게는 근원으로서의 귀족 취향이 따라붙고 있어. 이백이 하늘로부터 추방당한 유배자라고 자칭하고 보들레르가 제 이름에 귀족의 흔적인 미들 네임 ‘드’를 끼워 넣는 수작이나 릴케가 먼 조상의 귀족 후예라고 자신을 장식하던 것도 그렇지. 이에 비하면 타고르는 아예 처음부터 확실한 귀족의 신분이었어. 어찌 시인들뿐인가. 우리네들도 입만 벌이면 ‘나는 양반이네’하는 양반 타령뿐 아닌가. 이런 귀족이나 양반 가계에다 명문(名門)의 자손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자존심과 자만심의 조건이겠지.

김형수 예술적 감정을 확보하려는 몸짓이라 할까요? 시적 화자 같은.

고은 나는 명승지의 고향도 명문의 조상도 없는 농촌 소농의 한 섬약한 아이일 뿐이었어.

김형수 대지도 역사도 없는 빈털터리여서 오히려 ‘먼 곳’과 ‘전통의 결여’를 얻는 건지 몰라요.

고은 그런데 어릴 때 우리 마을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철학자 전원배(田元培)가 있었지. 그는 일본 교토제대를 나온 사람이었어. 뒷날 그이는 전후의 논문 ‘실존과 각존(覺存)’을 발표했는데 나는 ‘각존’의 논리 단편을 내 것으로 삼아 강연 주제로 내세운 적도 있었지. 이 철학자는 헤겔 철학, 하이데거 철학 전공에다가 나중에는 실존철학을 했는데 지방에서만 살았으므로 서울의 박종홍이나 고형곤과 같은 명성은 없었지. 오직 지역의 새로 설립된 대학에서 자신의 존재감 따위를 저버린 채 조용히 살다 떠났지. 내가 아는 명사의 이름이었어. 철학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철학자 전원배’라면 나 자신조차 괜히 심각해졌어.

김형수 세상의 한 모퉁이를 고요하게 지킨 이야기는 감동적입니다. 깊은 어둠 속에서 존엄했던 존재 형식에 이미 ‘각존’의 무게가 스며드는 느낌입니다.

고은 그리고 고향 선배 채만식의 이름도 몰랐지. 요컨대 우리 마을은 환경으로도 무명이지만 가족의 내력으로도 무엇 하나 자랑할 것이 없는 농촌의 익명 그 자체였네. 이런 내 어린 중학생활 시절에 해방시기의 그 정치 열기와 좌우 이데올로기의 살의와 적의가 몰려왔지. 학교 운동장과 군산 시내의 거리와 고향 농촌의 신작로 일대를 야비한 정치구호들이 덮고 있었지. 밤이면 먼 마을 뒷산에서 야산대라는 좌익세력의 봉홧불이 오르고 낮에는 일제시대 무서운 조선인 순사였던 사람이 경찰서 형사로 나타나 마을의 좌익을 잡으러 나와 집들을 뒤지고 대밭을 뒤졌어. 그 사람은 괜히 공포를 쏴댔지.

김형수 해방 정국의 격렬한 동요와 복잡성을 야기한 주범이 그것이라고 봅니다. 친일 부역자가 애국자를 응징하는 상황, 그 부조리를 이념 세탁하느라 좌우 갈등은 더 소란해야 했어요.

고은 이런 내 현실에서 유일하게 나만의 세계가 가능했던 것이 미술부 그림 그리기였던 셈이지. 시대의 광풍이 차단되는 그 방이야말로 상급생이나 동급생들의 그 쇳내 나는 극단의 분위기가 미치지 못하는 내 마음의 뒷동산이었네.

김형수 미술부가 정치적 진공 지대라기보다 전혀 다른 역사 생명을 준비하는 곳 같아요.

고은 이런 내 화가 지망의 행복 골짜기에 한하운 시집 이래 시의 꿈에 담겨져서 나의 욕구는 대체되기보다 병행되기 시작했어. 흔히 전통 문인화의 격조로 ‘시 속의 그림’ ‘그림 속의 시’를 정석으로 말하지만 이런 시화 일체론과는 조금 다른 경우였어. 하지만 나는 고흐가 되겠다는 화가의 꿈 대신 한하운이 되겠다는 시인의 꿈만을 좇지 않았어. 여전히 방과 후에는 미술부의 그 미적 분위기의 현장에서 나 자신의 초라하고 가난한 것들을 넘어설 수 있었고 거기에 시인이 되는 공상이 더해져서 어느 날의 나는 화가이고 어느 날의 나는 시인 노릇을 하는 두 가지 욕구의 병행에 내 행복은 복합적으로 되었어.

김형수 자고로 중대본부가 초라하고 가난해야 전투의 내공이 쌓인다고 합니다. 예술도 그렇다고 봐요. 근대 미학의 뼈아픈 실패 영역이라 할 족집게 과외 같은 기교 학습이 없었던 탓에 전방위적 예술가 기질이 싹튼 게 아닌가 합니다.

고은 이 무렵 꿈을 자주 꾸었어. 미술부 학생답게 꿈속의 세상이 온통 천연의 색이었지. 현실의 강물보다 훨씬 더 짙은 푸른빛을 띤 강이나 푸른 하늘이 쏟아질 듯했고 그런 천연색의 산꼭대기에 올라간 내가 시를 써서 훨훨 날리기도 했지. 그리고 끝 간 데 모를 벌판 위에 혼자 남겨져서 우리 집 몸채 4칸보다 더 큰 화판에 내가 커다란 붓으로 그림을 마구 그려대는 꿈을 꾸었어.

김형수 자아의 상부구조를 꿈이 차지했네요? 언젠가 마르크스 사관을 읽을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사회를 왜 토대와 상부구조로 나누고, 발전의 주도력이 토대, 즉 생산력에 있다고 하는 걸까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물론 국가나 이데올로기가 중요하다는 건 아니지만, 인간의 문제가 신체의 문제인 게 아니듯이 사회의 문제도 노동력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요. 하여튼 선생님의 미학적 체력은 꿈으로 단련된 느낌입니다.

고은 이런 나의 내면의 화려한 비현실의 세계와 달리 마을은 차츰 무미건조하고 학교의 현실은 좌우의 막다른 대결 국면으로 피투성이가 되었어. 이런 해방공간의 현실은 국민학교 4·5학년 아이까지도 ‘신탁통치 절대반대!’를 외쳐대는 일 이상으로 현실이 들어차게 되었지. 실제로 원당리 밖에 사는 과부의 아들 송현섭이는 아이로서도 뚱보 몸매였는데 학교 종소리만 나면 복도를 오가며 ‘신탁통치 절대반대!’를 외치는 무서운 국민학교 4학년 아이로 돌변했어.

김형수 분단은 그 시초부터 조선의 ‘아큐’들을 대량생산하는 덤핑 공장이었어요.

고은 근대의 후진 풍경으로는 한국과 중국은 쌍둥이였지. 아무튼 이런 일이 중학교에서 고학년 상급생들이 밤마다 좌우 진영으로 갈려서 저학년 아이들의 집단구타를 일삼고 때로는 테러도 있었지. 그런 사태는 보복으로 꼬리를 물었어. 또 단정(單政) 반대 삐라를 뿌리는 좌익 학생과 ‘찬탁의 적구(赤狗)!’를 조회 직전에 외쳐대는 우익 학생을 교사들도 어쩌지 못하고 방관하고 있었어. 밤중에 삐라 붙이는 일도 지겨운 노릇이었어.

김형수 “내전은 누군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역사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말입니다. 전에 유년 풍경의 빈곤을 토로하신 적 있는데, 저 폭력적 정치 범람에 의해 고향이 극단적으로 침윤되고 유폐되었기 때문일 거라고 봅니다. 한국적 심성의 원형을 파괴한 것은 좌우 대립이 저지른 가장 엄중한 범죄입니다.

고은 벌써 38선에서는 총소리가 심심파적으로 계속되고 있었지. 1947년 중학교 1학년생의 나는 사건의 환경을 벗어날 수 없었어. 그해 막바지까지 모스크바 3상회의 미·영·소의 한반도 5년 신탁통치 합의는 한반도 38도선의 남과 북을 정치 갈등의 열탕(熱湯)으로 들끓게 했어. 이는 독일 나치 점령지였던 오스트리아가 미·영·소·불 4개 전승국에 의해서 10년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인 것과 달랐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세계의 7개 지역 신탁통치 뒤 독립국가가 된 사례가 있어. 고대에도 신탁통치가 있었지. 그런데 한반도에 관한 3상회의 구성은 미·중이라는 우파와 소련이라는 좌파의 2 대 1 비율이어서 사실상 그 신탁통치 체제의 임시정부 내지 과도정부가 실현되었다면 얼핏 보기에는 자유진영의 영향이 주도될 여지가 있었던 것이지.

김형수 좋은 것은 오르막길에는 왜 보이지 않는지. 시 ‘순간의 꽃’에서 “내려갈 때 보았네” 하는 부분을 접했을 때 얼마나 경이로웠는지 몰라요.

고은 당시의 격렬한 반탁과 극렬한 남로당의 돌연한 찬탁의 그 죽기 살기의 대결을 제3자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자면 한반도의 운명의 대승적 시간으로서의 5년 신탁에 의한 분단 청산의 청사진도 가능할 법하지. 결국 탁치 결사반대는 분단을 가속화한 것이 되고 말았어. 그래서 해방 이전부터 해방 이후를 대비한 중도 내지 좌우 합작의 가능성이나 좌우 연립의 현실성을 추구하던 여운형의 희생 이래 사실상 좌와 우라는 극단 관계만이 한층 더 가혹한 대결국면으로 되고 말았어. 여기에 탁치 반대가 군림하자 이런 판에서는 반탁도 분단이고 찬탁의 결말도 통일을 요원하게 만들었을 터이지.

김형수 하나의 공동체 내부에서 구성원이 경험하는 모든 사건, 사실이 언제나 극단적으로 다른 낱말로 표현된다는 건 너무나 큰 재앙입니다.

고은 맥아더 총사령부의 본래 전후 처리는 소련 견제의 강도가 엷은 상태였지. 철석같이 믿었던 장제스 청천백일기의 정권이 미국의 대폭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에도 불구하고 본래 낙관했던 제압은 허깨비의 꿈이었지. 장제스 세력의 부패와 중국 사회 민심 이반은 심각했어. 미국 전략 전문가의 예상에 따르면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당연히 패배하는 것이었고 중국 현지를 시찰한 마셜도 그런 것을 장담했지. 바로 그 장담 다음날 모든 예상을 제치고 중국 공산당의 천하가 도래한 것이지.

김형수 제가 20대 때 편집한 책인데, 일본 이케다 마코토(池田誠)의 <중국현대혁명사>는 중국 공산당, 중국 국민당, 군벌 세력, 제국주의 세력 이 네 개에 가려진 제5의 세력을 조명합니다. 처음에는 희미한 빛에 불과하지만 점차로 강렬한, 눈을 뜰 수 없도록 눈부신 빛을 발하는, 역사의 자물통 같은 인민대중이 그들이에요. 어떤 노선도 제5의 세력을 통하지 않고는 자아의지를 실현할 수 없어요.

고은 마오는 중국 농민의 몇 천 년의 자치와 자립 역량을 천재적으로 간파한 사람이지. 저 고대 춘추전국 시대나 삼국지 시대나 어느 시대나 역성혁명과 전쟁으로 패배를 입어 온 농민들은 권력의 차원을 추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모색으로밖에 살 길이 없다는 피어린 지혜를 쌓아왔지. 중국 사회주의 혁명이 달성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노동자와 공장 집단의 계급투쟁에 기초하지 않고 농민의 자연부락 민심에 근거한 독창적인 혁명 수행의 특수성이야말로 중국 인민의 항구적인 명제와의 일치일 것이네. 그것은 이데올로기 차원이 아니라 생존 지속의 차원이기도 하지.

김형수 마오쩌둥은 제5의 세력을 잘 읽은 거지요.

고은 이런 중국의 새 시대가 도래하게 되자 잠자는 호랑이, 종이 호랑이였던 홍콩 아편전쟁 이래의 중국이 진짜 호랑이인 신중국으로 나타났지. 신중국은 중국사 5000년의 최대 영역국가이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 제1인자로서 당황하고 말지. 그래서 전후 롤백 정책으로 선회함으로써 일본을 친미 제2급 지역으로 만들고 중국 주변 동남아 지역까지 아우르는 반공전선을 책정하게 되지. 1948년 남의 대한민국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단독정부는 이런 동아시아 정세의 산물이기도 하지 않은가.

김형수 1980년대의 학습 과잉 탓인지 옛 정세는 조금 기피됩니다. 근대 유토피아의 열정이 생기를 잃은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어요.

고은 사실 10년 신탁통치를 받아들인 오스트리아는 현대 세계사에서의 통일운동 모범사례이지. 오스트리아는 바로 수구적인 근대 유럽사를 주도한 합스부르크의 경륜이 있는 곳 아닌가. 비록 오늘의 작은 영토로 쪼그라들긴 했지만 그네들의 높은 자존심은 전 시대 프랑스의 역대 왕조의 그것과도 겨루었지. 루이 왕조의 왕비가 오스트리아 여제의 공주마마 아니던가.

김형수 오스트리아는 잘 모르겠어요. 민청련 김근태 의장도 제도정치에 입문해 오스트리아 모델을 상기하고, 문익환 목사도 방북 때 김일성 주석에게 오스트리아식 중립주의를 물었는데, 그러한 통일상(像)이 잘 연상되지 않아요.

고은 그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정치 유산인지 모르지만 수상이 외상이 되고 옛날 우두머리가 심부름꾼이 되며 미·영·불·소 전승국의 갖은 비위를 다 맞추고 국내 각 정치세력의 간절한 연대와 합의를 이끌어내 10년 신탁통치 기간 이전에 일찌감치 통일된 오스트리아가 됨으로써 오늘날 유엔 기구도 두고 있는 영세중립국이 된 것이네.

김형수 아, 신탁통치를 인큐베이터로 사용한 경우네요.

고은 나는 통일에의 실현은 이 같은 무아(無我)로서의 자아들이 뭉칠 때 가능한 사실을 빈에서 찾네. 그러니 통일은 오스트리아에서 배우고 분단은 동서 분단의 상호소통이던 게르만 민족에서 배우네.

김형수 게르만 민족의 경험을 귄터 그라스가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 방문해 햇볕정책을 지지하면서, 도움을 주는 자가 받는 자에게 굴욕감을 주어서는 왜 안 되는지 간곡히 역설했어요.

고은 그때 한국에 온 그와 포도주 좀 마셔댔어. 그때 그는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직무유기자라고 질타했지. 1948년 남과 북의 단독정권이 바로 분단 정권이 되었고 그 정권들이 서울과 평양에 서자마자 38선은 바로 총부리와 총부리가 맞선 적대의 현장이 되네. 6·25는 6·25 이전부터야.

김형수 6·25는 머리도, 꼬리도 너무 깁니다. 도대체 공소시효가 있기나 할까요? 이데올로기적 분열의 타격을 그토록 가혹하게, 또 그토록 지속적으로 입어야 하다니!

 

 

출처 : 경향신문 2012.06.0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011929425&code=210100&s_code=af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