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봄, 무량사 - 김경미

라라와복래 2013. 4. 6. 10:06

 

봄, 무량사

김경

무량사 가자시네 이제 스물몇살의 기타소리 같은 남자

무엇이든 약속할 수 있어 무엇이든 깨도 좋을 나이

겨자같이 싱싱한 처녀들의 봄에

십년도 더 산 늙은 여자에게 무량사 가자시네

거기 가면 비로소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며

늙은 여자 소녀처럼 벚꽃나무를 헤아리네

흰 벚꽃들 지지 마라, 차라리 얼른 져버려라, 아니,

아니 두 발목 다 가볍고 길게 넘어져라

금세 어둡고 추워질 봄밤의 약속을 내 모르랴

무량사 끝내 혼자 가네 좀 짧게 자른 머리를 차창에

기울이며 봄마다 피고 넘어지는 벚꽃과 발목들의 무량

거기 벌써 여러 번 다녀온 늙은 여자 혼자 가네

스물몇살의 처녀, 오십도 넘은 남자에게 무량사 가자

가면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 재촉하던 날처럼

출전: <고통을 달래는 순서>(창비)

 

‘무량사 가자시네’. 쿵더쿵, 맵시 있게 시작되는 한 자락 풍류. 봄날의 벚꽃과 싱숭생숭 들썩이는 두 발목과 무량사와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 탐스러운 언어 감각으로 그려져 있다. (예컨대, 무량함과 헤아림의 절묘한 배합). ‘거기 가면 비로소 헤아릴 수 있는 게 있다’는 무량사(無量寺)의 유혹. 어쩌자고 ‘이제 스물몇살’ 남자는 저보다 십년도 더 산 화자에게 무량사 가자셨나. ‘스물몇살의 처녀’였던 화자는 ‘오십도 넘은 남자’에게 무량사 가자 재촉했나. 나이 같은 건 헤아리지 않는 무량한 사랑의 스물 몇 살들!

‘봄마다 피고 넘어지는 벚꽃과 발목들의 무량/거기 벌써 여러번 다녀온’ 화자, 정작 무량사는 이제야 ‘끝내 혼자’ 간단다. 부러워라, 아직 헤아릴 게 있는 듯 가는구나. 아니, 이루 헤아릴 수 없다는 듯 가는구나! 시의 리듬에 실려 흩어지고 가지런해지는 감정과 감상이 간간 화자의 아주 작은 한숨소리 들릴 지경으로 생생하다.

무량한 바람이 분다. 남산 벚나무들 꽃눈들도 채찍질하는 저 바람 속에서 눈을 꼭 감고 있겠지. 꼭꼭 숨어 있다 바람이 자면 눈 뜨거라. 이제 곧 두근두근 벚꽃 철이다! 올해도 남산에 벚꽃 만발하면 헤아리지 않고 꽃그늘을 거니리라. 김경미의 ‘봄, 무량사’ 생각도 나겠지. 내겐 너무 먼 무량사.

문학집배원 황인숙

 

김경미 1959년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으며,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쉿, 나의 세컨드> <고통을 달래는 순서> 등이 있다. 노작문학상 수상.

낭독 채세라 배우. 연극 <우리 읍내>, 뮤지컬 <루나틱> 드라마 <궁> 등에 출연.

캐리커처 박종신 / 음악 Digital Juice – BackTraxx / 애니메이션 강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