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최영미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

라라와복래 2013. 4. 6. 10:35

이미 뜨거운 것들

최영미 시집

실천문학

2013.03.29

최영미 시인은 19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문단에 화려하게 나왔다. 한 해에 50만 부라는 경이적인 판매 기록을 세우며, 당시 아이돌 가수에 못지않은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이후 <꿈의 페달을 밟고>, <돼지들에게>, <도착하지 않은 삶> 등의 여러 시집을 통해 독자들에게 거침없이 사랑과 자유를 노래해왔다. 최영미 시인의 이번 시집은 정치 문제부터 뜨거운 사랑, 소소한 가족사, 그리고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일상으로부터 길어 올린 살아 있는 비유와 부드러운 호흡을 통해 자연스럽게 작품에 대해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은 실천문학사 홈페이지 시집 소개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경쾌하게 던지는 돌직구 스타일

지난 겨울 유례 없이 뜨거웠던 대선이 끝나고, 한국의 정치계는 몸살을 앓고 있다. 정권을 잃은 자들은 그들대로, 또 정권을 획득한 자들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느라 정신없이 봄을 보내고 있다. 대선 과정에서 보여준 정치인들의 행태를 지켜보던 시인은 그들에게 요즘 속된 말로 돌직구를 던진다.

5천만의 국민을 감히 사랑한다고

떠드는 자들.

사랑을 말하며

너는 숨도 쉬지 않니?

조찬과 오찬과 만찬에 참석해

축하하고 격려하고 약속하고

화장하지 않은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왼손이 하는 일은 반드시 오른손이 알게 하고

보도되지 않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여우들. _‘정치인’ 부분

최영미 시인은 그동안 이념과 투쟁이 아니라 사람과 사랑을 노래해왔다. 그가 많은 대중적 인기와 호응을 얻었던 데에는 단순 명쾌하게 핵심을 향해 돌진하는 명료성에 있다. 우리 사회에 횡행하고 있는 거짓말과 위선들을 향해 날카롭게 돌직구를 던진다. 대담하면서도 속 시원한 그녀의 화법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대리 만족을 충분히 안겨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해준다. 따라서 위정자들에게 돌직구를 던지는 통쾌함이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북조선에서는 잘 우는 사람이 출세하고

남한에서는 적당한 웃음이 성공의 비결.

인민 모두가 배우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자 돼지가 사망한 뒤, 눈물공장이 24시간 가동해

야근을 하며 눈물을 생산한 노동자들은 간부로 승격하고

슬픔을 충분히 짜내지 못하면 쫓겨나고

남한의 오락프로는 억지웃음을 만드느라 돈을 쏟아 붓고

상사가 썰렁한 농담을 해도 웃어주는

한반도의 이쪽과 저쪽에서

대장의 눈치를 살피며

웃고 울며 겨울이 가노니. _‘닮은꼴’ 전문

시인의 이러한 돌직구는 비단 국내 정치인들에게만 향하지는 않는다. 북한의 정치 행태 또한 똑같다고 일갈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神이야 말로 태초에/죄인”(‘고해성사’)이라고 말하거나, “그 여자의 성공 비결은/얄팍한 거울”(‘성공한 여성’)에 있다며 이기적인 인간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시골 시인 자신은 “담뱃재를 털며/풍자시를 연습한다”(‘풍자시 연습’). 이처럼 시집의 1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부조리한 세상을 채우는 탐욕스런 돼지와 교활한 여우들을 향해 속 시원하게 던지는 풍자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욕망하는 뜨거운 것들

시인이 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자는 시인이 될 수 없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자는 이미 시인인 까닭이다. 이런 점을 상기해볼 때 최영미 시인은 분명 아직 사랑을 꿈꾸고 사는 청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욕망은 “고장 난 생의 시계가 움직이고/사랑이 눈처럼 쏟아지는 오후”(‘겨울의 문’)에 만나는 사랑이다. 젊은 청춘들의 사랑이 아니라 인생의 한가운데에서 만나는 “어느 겨울날, 내 방에 들어온 청춘의 빛./잔치가 끝난 뒤”(‘선물’)에 만나는 “선물” 같은 사랑인 것이다.

너는 차가웠고,

나는 뜨거웠고,

그리고 너를 잊기 위해 만난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남자들.

내 인생의 위험한 태풍은 지나갔다

살아남은 시들이 종이 위에 인쇄되고

느릿느릿 기어가는 차량들.

내일은 전국이 흐리고,

나는 샴푸를 사러

나갈 것이다 _‘일기예보’ 부분

한때 아이돌 스타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그녀는 이제 “왼쪽에 줄을 맞추던 시간들이/조금씩 오른쪽으로/움직이고// 운동화에서 구두로,/바꿔 신으며 중년”(‘세월의 신발장’)이 되었다.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이제 남겨진 가족이다. 늙은 아비를 따라 오른 선산과 이를 관리해야 하는 자신의 의무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아버지에서 맏딸에게 이어지는 집안의 숙제.

내가 물려받을 조상의 역사를 설명하는

아비의 입가에 접힌 팔자(八字) 주름

쨍쨍한 가을볕을 피하려 나는 얼른 일어섰다

내가 물려받고 싶지 않은 유산을

비닐봉지에 싸서 버리고

당신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

맏딸인 내가 관리할 무덤들을 둘러본다

망해가는 후손의 발목을 잡고 번창하는

그악스런 잡초들, 비석 위에 살아 있는

3대의 생몰연대를 휴대전화에 저장하고

가까운 그날에

당신 없이,

내가 앞장서 올라가야 할 언덕

길을 잃지 않으려,

저승 가는 번지수를 잊지 않으려

묘지 번호를 수첩에 적고

산을 내려오는

아버지와 딸.

팔십 세의 아비는 어느덧

중년의 딸보다 걸음이 빠르지 않다 _‘추석 즈음’ 부분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이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아들이 아닌 딸로서 그리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신에게 아버지가 바라는 욕망은 조상님을 잘 모시는 것이다. 그런 부모님의 욕망을 대신하여 생활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5년 뒤에야 내게 전달된 조카의 성탄절 그림엽서.

아기 곰의 배꼽에 달린 분홍색 리본을 일찍 끌렀다면,

그 애의 소원대로 내가 돈 벌고 집 사고

좋은 남자와 결혼해 아이 낳고

생활인이 되었을까 _‘Merry Christmas’ 부분

도시에 혼자 살아가는 시인의 모습은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그 외로움을 견뎌내는 시간을 용인하는 것이다. “낡은 나의 자화상을 응시하는 시간”(‘꿈이 빠져나간 주머니’) 속에는 뜨거워지지 못했던 욕망의 좌절이 “지난 여름의 얼룩”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닭장 속의 닭처럼 안전하게/먹고 싸는 지루함”(‘마법의 상자’)에서 벗어나 그가 꿈꾸는 것은 “엉망으로 구겨진 삶도 비행기 바람을 쐬면”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욕망하는 것이다.

최영미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에서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층위의 욕망들은 변주되지 않은 채 날것으로 드러나 보인다. 이는 자칫 통속적이라고 폄하될 수 있겠지만 오히려 통속미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명징함에 더 무게감을 주고 싶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신데렐라처럼 떠오르는 신인이 아니라 자신의 외로움을 견지할 수 있는 중견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바람대로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품들이 저마다 여행 가방의 바퀴처럼 잘도 굴러가서, 떠나지 못하는 외롭고 소외된 도시인들을 향해 그 무엇인가가 되기를 바란다.

 

어떤 신도

모시지 않았다

어떤 인간도

섬기지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새처럼

나 홀로 집을 짓고 허무는 데 능숙한

나는 유목민.

농경 사회에서 사느라 고생 좀 했지

짝이 맞는 옷장을 사지 않고도

반듯한 책상도 없이

에어컨도 김치냉장고도 없이

차도 없이 살았다 그냥.

여기는 대한민국

그가 들어가는 시멘트벽의 크기로,

그가 굴리는 바퀴의 이름으로 평가받는 나라.

정착해야, 소유하고 축적하고

머물러야, 사랑하고 인정받는데

누구 밑에 들어가지 않고

누구 위에 올라타지도 않고

혼자 사느라 고생 좀 했지

내가 네 집으로 들어갈까?

나의 누추한 천막으로 네가 올래?

나를 접으면,

아주 가벼워질 거야. _‘서울의 울란바토르’ 전문

 

시인의 말

살수록 알수록 시집 후기를 쓰기가 어려워진다.

뭔가 덧붙인다는 구차함.

다 털어놓는 민망함이여.

시로 나를 털고 털어, 사방에서 부수고 일그러뜨려

어디까지가 진정한 나인지?

어디서부터 속였는지?

내가 그걸 정말 느꼈는지?

마음의 조각들을 다시 붙여, 멀리서 바라본다.

말과 말 사이, 빈틈없는 것들은 빛나고

아닌 것들은 시들시들

주름을 감출 수 없다.

감추지 않으련다.

시를 청탁한 잡지사의 편집자들, 내 시를 가슴으로 읽은 사람들, 원고 정리를 도와준 친구들, 미국의 전승희 선생님을 기억하며, 귀한 발문을 주신 방민호 선생님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추천의 글을 얹어 주신 황인숙 시인에게 고마움을 보내며 사진을 찍고 표지를 만든 분들, 함께 작업한 실천문학 식구들과 새 책을 내는 기쁨을 나누고 싶다.

 

이미 슬픈 사람들, 이미 아픈 사람들, 이미 뜨거운 것들과 말을 섞으려 나는 또 떠나련다.

 

2013년 봄, 최영미

 

추천의 글

_황인숙(시인)

“살았다/사랑했다/썼다”(‘2009년의 묘비명’). 최영미의 시는 단순 명쾌하다. 그래서 “붕괴 직전의 예민한 신경을 끌고/시장에 나가 장사꾼들과 흥정한다”(‘계약’)거나 “아름다움을 버리고 돌아와/나는 울었다”(‘옛날 남자친구’)며 삶의 습습한 그늘을 토로할 때에도 칙칙하지 않다. 뜨겁고 서늘하다. 소설에서와 달리 시에서는 시인과 화자가 겹치기 일쑤다. 시인의 일상이나 몸과 마음의 형편과 동태가 작품에서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최영미는 그걸 꺼리지 않는다. 거침없고 서슴없다. 생이 얼마나 엄정하고 혹독한 것인데 자질구레한 부분에 연연할 것이냐며 본질과 핵심을 향해 질러가는 명민함이, 타고난 양명함과 자유로움에 포개져 그런 것 같다. 그 대범함에는 자부심도 한몫했으리라. 자신의 명민함에 대한 자부심, 젊은 날 수많은 독자들의 아이돌 시인이었던 데 대한 자부심, “가까운 그날에/당신 없이,/내가 앞장서 올라가야 할 언덕/길을 잃지 않으려”(‘추석 즈음’) 맏딸로서 가족에게 책임을 다하며 산다는 자부심, 매력 있는 여성으로서의 자부심. 내가 설핏 엿본 최영미는 그런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아침에 가장 늙었고/저녁이면 다시 젊어져//어둠이 눈꺼풀을 덮는 밤이면/ (...) 내 놀던 옛 동산에서 내려와/꿈이 깨진 뒤에도/살아서 비겁한 밥을 먹으며”(‘뒷맛이 씁쓸하지 않은’) 쓴 이번 시집에는 곳곳에 시인의 외로움과 고단함이 배어 있어 가슴을 아리게 한다. 하지만 순정하고 무구하고 절절한 사랑을 기억하고 희구하는 이 ‘시니컬 차도녀’의 시편들에선 때로 산들산들 때로 거세게, 참으로 향기롭고 아름다운 바람이 회오리쳐, ‘뒷맛이 씁쓸하지 않’다. 감히 말하건대, 젊은 한때 응석꾸러기인 줄로 알았던 시인 최영미야말로 생을 움켜쥔 것 같다.

 

최영미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후 <꿈의 페달을 밟고>, <돼지들에게>, <도착하지 않은 삶>, 그리고 세계의 명시에 해설을 곁들인 <내가 사랑하는 시>를 간행했다. 2005년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를 발표했고, 산문집으로 <시대의 우울: 최영미의 유럽 일기>,<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화가의 우연한 시선>,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공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번역서로 <화가의 잔인한 손>, <그리스 신화>가 있다. 2002년 미국에서 출간된 3인 시집 <Three Poets of Modern Korea>(Sarabande books)는 2004년 미국번역문학협회상의 최종 후보로 지명되었다. 2005년 일본에서 발간된 시선집 <三十, 잔치는 끝났다>는 일본 문단과 독자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2006년 <돼지들에게>로 이수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미국 버클리대의 초청으로 2009년 시낭송 프로그램 ‘Lunch Poem’에 참가했다.

 

“난 지금 달콤한 연애 중” 그녀의 시가 다시 뜨거워졌다

_동아일보 황인찬 기자

“시인이니까 시 한 편 낭송하고 시작하겠다”며 최영미 시인(52)이 낭송을 시작했다. “…돌담 밑에서 입을 맞추던 첫사랑이 눈을 크게 뜨고/너, 괜찮니? 물어본다// 내 옆에 누워 팔팔 끓어오르는 남자에게/시들시들한 나를 들키지 않으려/이불을 끌어당긴다” 시집을 덮은 그가 빙그레 웃었다. “좀 야하죠? 최근에 쓴 시예요. 호호.”

최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을 펴냈다. 3일 간담회에서 만난 그는 달콤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했다. 만난 지 5개월째. “다시 연애의 세계에 복귀했다”며 시인은 밝게 웃었다. 그가 연애를 반기는 것은 시작(詩作)과도 연관이 있다. 1994년 <서른, 잔치는 끝났다>부터 매번 시집을 낼 때마다 연애 중이었다. 뜨거운 사랑과 애틋함, 그리움은 문학의 주 ‘원료’다. 다만 2009년 네 번째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을 낼 때는 혼자였다. “그래서 네 번째 시집은 드라이해. 호호.”

최영미 시인은 “제가 냉소적이라고 말들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냉소의 기술’을 모르는 게 인간 최영미의 가장 큰 약점”이라며 웃었다.

‘너는 차가웠고,/나는 뜨거웠고,/그리고 너를 잊기 위해 만난/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미지근한 남자들./내 인생의 위험한 태풍은 지나갔다…내일은 전국이 흐리고,/나는 샴푸를 사러/나갈 것이다’(시 ‘일기예보’에서)

남북한 정치현실을 풍자한 시들도 눈에 띈다. ‘할아버지도 돼지./아버지도 돼지./손자도 돼지.// 돼지 3대가 지배하는 이상한 외투의 나라.// 꽃 속에 파묻힌 아버지를 보며/꼬마 돼지가 눈물을 흘린다’(시 ‘돼지의 죽음’에서)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시인의 어머니는 병원에서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북한 관련 뉴스가 이어지던 그때 시인은 노모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시를 썼다고 했다. 그가 서른셋에 펴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20년 가까이 그를 따라다니는 영광이자 상처다. 그의 도발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담론은 당시 운동권을 들끓게 만들었다. “제가 갖고 있는 도발적, 냉소적 이미지는 사실 출판사가 마케팅 과정에서 만든 이미지예요. 책은 많이 팔렸지만 제 문학은 끝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죠.”

386세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불리지만 정작 최 시인은 386세대란 말을 안 좋아한다고 했다. 1980년대, 자신의 20대를 떠올리면 마음이 편치 않고, 치유하지 못한 상처도 남았단다. 그런 그가 계간 <문학의오늘> 여름호부터 자신의 20대를 담은 자전적 소설 연재를 시작한다. “더 잊기 전에 쓰려고요. 1980년대 후일담 소설들은 대개 집단의 의지나 경험에 초점을 맞췄지만 저는 저 개인의 경험을 얘기하고 싶어요. 어떤 면에선 개인의 기억이 집단의 기억보다 정확하다고 믿거든요.”

풍자로 달궈진 최영미 시인의 프라이팬

국민일보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통행금지 등 남북관계가 초긴장 상태로 돌입한 가운데 386세대 대표 시인 중 한 명인 최영미(52)가 신작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실천문학사)에서 북한의 3대 세습을 통렬하게 조롱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할아버지도 돼지./ 아버지도 돼지./ 손자도 돼지.// 돼지 3대가 지배하는 이상한 외투의 나라.// 꽃 속에 파묻힌 아버지를 보며/ 꼬마 돼지가 눈물을 흘린다/ 돼지가 울자/ 농장의 모든 동물들이 통곡한다/ (중략) / 때마침 눈이 내려/ 영구차가 미끄러질까 봐/ 위대한(그의 胃는 정말 거대했다)/ 장군님 가시는 마지막 길에 외투를 벗어 바친다/ 영하의 날씨도 느끼지 못하고/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들./ 코미디인지, 비극인지”_‘돼지의 죽음’ 부분

최영미는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례식과 3대 세습을 희화화한 이 시를 비롯해 풍자의 화살을 남북한 정치인들에게도 날린다. 전직 대통령이 목숨을 끊자 장례식을 마련하고 조문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도 시로 포착된다. “텔레비전으로 최고 통치자의 슬픔이 생중계되는,/ 지금이 그가 가장 약해 보이는 순간,/ 눈가의 주름과 뾰루지가 화면에 잡히고/ 검정 조문복을 입고 분향하는/ 엉덩이에서 총알이 튀어나온다/ (내 뒤에서 까불지마!)” _‘권력의 얼굴’ 부분

그런가 하면 북한과 남한의 사회상을 울음과 웃음에 비교해 보여주는 시도 있다. “북조선에서는 잘 우는 사람이 출세하고/ 남한에서는 적당한 웃음이 성공의 비결.// 인민 모두가 배우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자 돼지가 사망한 뒤, 눈물공장이 24시간 가동해/ 야근을 하며 눈물을 생산한 노동자들은 간부로 승격하고/ 슬픔을 충분히 짜내지 못하면 쫓겨나고” _‘닮은 꼴’ 부분

올해로 등단 20년인 그는 시의 촉수를 자신에게도 들이댄다. “전성기가 지난 속옷들이/ 빨랫줄에 걸려 있다// 꿈이 빠져나간 주머니./ 나란히 접힌 순면 100퍼센트가 슬퍼// 일요일 저녁에 구워먹은 소고기가 적막한 위를 통과하고/ 낡은 나의 자화상을 응시하는 시간” _‘꿈이 빠져나간 주머니’ 부분

최영미의 강점은 타인의 치부에 대한 풍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약점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데 있다.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로 50만 부라는 경이적인 판매 기록을 세운 영광의 세월을 뒤로 하고 세상과 겨루면서 눈에 보이지 않은 상처를 입었던 최영미는 1987년 서울 명동에서 ‘민주 볼펜’을 외치던 젊은 시절의 자신을 회상하기도 한다.

볼펜 사세요!/ 한 개의 천 원짜리/ ‘민주’ 볼펜 사세요!/ 명동 한 복판에서/ 나는 외쳤다/ 민주주의보다 볼펜을 더 크게,/ 외쳤다 강철 추위에 발을 구르며/ 모금함을 들고 동상처럼 서서/ 1987년 겨울을 운반하고 있었다 _‘1987년 겨울’ 부분

‘민주 볼펜’을 팔던 시절에 진실이 단 하나의 향기였다면 이제 그는 하나만이 진실이라고 외치지 않는다. “나쁜 자식./ 위선자./ 벗겨도 살점 하나 묻어나지 않는 껍데기들.// 그들을 싸잡아 욕한 뒤에/ 단풍을 보았다// 울긋불긋 모든/ 그들은 하나의 색이/ 아니었다/ 한꺼번에 물들지도 않았다// 진실은 순색(純色)이 아니다 _‘추상(秋想)’ 전문

과거의 최영미가 혼자 단단하고 혼자 투명한 시인이었을 때, 하나의 색만이 진실이었다면 지금 그에게 진실은 순색이 아니라 세상의 얼룩을 닮은 단풍 같은 것이다. “내 발이 걸쳤던 신발들이 얼마나 될까?/ 내가 버린 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왼쪽에 줄을 맞추던 시간들이/ 조금씩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운동화에서 구두로,/ 바꿔 신으며 중년이 되었다” _‘세월의 신발장’ 전문

이제 오십을 훌쩍 넘겨 중년이 된 그는 ‘시인의 말’에 이렇게 썼다. “이미 슬픈 사람들, 이미 아픈 사람들, 이미 뜨거운 것들과 말을 섞으려 나는 또 떠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