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 어느 인문주의자의 클래식 읽기 / 문학수 지음

라라와복래 2013. 4. 7. 11:04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_어느 인문주의자의 클래식 읽기

지은이: 문학수

펴낸곳: 돌베개

펴낸날: 2013.02.25

 

 

 

 

 

달빛이 환한 밤이다. 이런 밤은 덜 외로워서 좋다.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따뜻하게 품어주고 있는 달빛이 곁에 있으니까. 그래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의 첫째 악장에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라는 말이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 음 하나하나를 충분히 눌러 느리게 연주하라는 작곡가의 명령이다. 마치 달빛처럼. 햇빛은 사물에 튕겨 나오지만, 달빛은 사물에 젖어 들어가는 힘이 있다. 문학수의 새로운 책 <아다지오 소스테누토>가 달빛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클래식 세계를 풍미했던 수많은 거장과 연주자들을 이처럼 하나하나 충분히 음미하면서 쉽게 전달했던 책이 어디 있는가.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의 정신!’ 당분간 문학수의 책이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는 최선의 안내자가 되리라는 예감이 드는 것도 그가 이런 달빛의 정신을 품고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_강신주(철학자)

 

*이 글은 도서출판 <돌베개>의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감성과 지성이 어우러진 인문주의자의 클래식 읽기

음악은 애초에 인문학의 범주에 놓여 있었다. 미국의 인문학자 월터 카우프만에 따르자면 인문학이란 “철학과 문학, 종교와 역사, 음악과 미술”을 통틀어 일컫는다. 말하자면 음악이 지향하는 바는 이른바 ‘전인성’(全人性)이었다는 얘기다. (351쪽)

인문주의자가 들려주는 클래식 이야기에는 어떤 것들이 담길까? 16세기의 작곡가 바흐부터 현대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주앙 피레스까지 24명 남짓한 음악가들의 생애와 시대를 씨줄과 날줄로 엮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음악 담당기자이자 30여 년간 클래식 애호가로서 오랫동안 음악비평을 써온 문학수다. 그의 책 <아다지오 소스테누토>가 독자들에게 매혹적인 클래식 이야기를 펼쳐낸다.

저자는 음악을 감각의 기쁨과 위안을 주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삶과 시대를 들여다보는 창으로서 이해한다. 예컨대 저자는 클로드 드뷔시의 음악에 대해 ‘현대적 회화성’으로 대변되는 독특한 음악적 감수성의 변화를 보여줬다고 지적하며, 드뷔시의 음악적 생애를 ‘모더니즘의 새벽’으로 규정한다. 구스타프 말러 편에서는 그가 보여준 정체성의 혼란, 삶에 대한 애착과 죽음의 공포 등을 그의 개인사적 궤적을 통해 살펴보면서, ‘분열된 주체’로서의 자아를 음악에 투영하면서 20세기의 징후를 포착한 음악가였다고 평한다. 또한 마리아 주앙 피레스 편에서는 일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 예찬’을 빌려와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달빛과 같은 “서늘한 그늘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음예의 피아니즘이라고 찬평한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기존의 클래식 교양서들에서 남발되는 뻔한 에피소드나 공허한 수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저자는 음악가들의 생애를 잡다하게 늘어놓기보다는 주제에 따라 주목할 만한 에피소드들을 기록하고, 그들의 음악세계를 특유한 언어로 감각적으로 집어낸다. 이 책이 여느 클래식 교양서 이상으로 인문학적 깊이와 즐거움을 더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음악가들의 삶에 대해 전제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시야와 이를 음미할 수 있는 저자의 지적 깊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저자의 음악 공부는 그가 탐독했던 음악을 사랑했던 사상가들로부터 힘입은 바가 크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 니체와 아도르노, 비트겐슈타인과 에드워드 사이드, 슬라보예 지젝 등은 그에게 음악을 이해하는 또 다른 자극과 영감을 제공했다. 음악을 감각적으로 즐기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음악에 대한 애정을 폭넓은 독서로 연장시킨 저자의 노력이 책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생애’라는 앵글로 들여다본 특별한 음악 이야기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는 결국 사람을 만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그것이 음악 듣기의 궁극이라고 믿는다. 바흐를 들을 때는 바흐를 만나고, 베토벤이나 슈베르트를 들을 때는 또 그들과 조우하는 것이다. (14쪽)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은 지루하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TV 드라마나 영화 배경음악에나 적당할 음악으로나 여길 뿐이다. 영상이나 가사 없는 ‘음악’을 한 시간 남짓 들어야 한다면 곤혹스러워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클래식은 그 안에 수많은 사연들과 드라마를 간직한 놀라운 이야기상자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생애’라는 앵글로 음악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자는 음악가의 삶을 따라가며 개인사에 중점을 두거나, 시대적 역할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고, 당대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예컨대 바흐에 대해 쓰고 있는 장에서는 뛰어난 생산력을 자랑했던 바흐의 작품이 오랜 시간 빛을 보지 못하다 수세기 뒤에 새롭게 발굴되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주며, 하이든을 서술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종속 음악가 신분에서 자유시민이 된 하이든이 새로운 청중을 대상으로 음악을 쓰게 된 이야기가 당대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곁들여지며 서술된다. 또한 모차르트의 경우에는 익히 알려진 천재성의 이면에, 그의 성장 과정에서 비롯한 신분상의 콤플렉스, 아울러 평생에 걸친 극심한 노동이 존재했음을 이야기한다.

유럽이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던 19세기 초·중반 활약했던 세 음악가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몽상적 내러티브를 음악으로 구현한 베를리오즈와 격렬한 열정을 건반 위에서 쏟아내고 짧은 생을 마친 쇼팽,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던 시대에 고즈넉하게 자기만의 세계를 침잠했던 <레퀴엠>의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가 대표적이다.

또한 작곡가들뿐 아니라 나치 시절의 지휘자들에 관한 서술도 주목할 만하다. 나치와 교묘히 협력하며 음악 권력의 자리를 장악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카를 뵘, 카라얀과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 같은 시대에 그와는 반대의 길을 걸었던 지휘자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책의 후반부에는 저자가 오랫동안 애정을 품어온 연주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여러 장에 걸쳐 담겨 있다. 연주회 시작 2분 전에야 두터운 외투와 헐렁한 스웨터 차림으로 연주회장에 나타나 청중을 경악시킨 글렌 굴드, 관객들에게 최선의 피아노를 들려주기 위해서라며 보잉747 항공기로 자신이 늘 사용하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공수시키고 전속 요리사까지 대동해가며 연주회를 열었던 호로비츠 등 흥미로운 일화를 곁들여 명연주자들의 독특한 음악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밖에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에릭 사티, 쇤베르크, 야나체크, 쇼스타코비치 등을 생애와 음악의 연관성 속에서 조명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들의 삶 속에서 천재와 초인의 모습보다는, 욕망에 비틀거리고 콤플렉스 때문에 힘겨워하는 나약한 인간의 초상을 엿보게 될지 모른다.

30년 음악 애호가가 권하는 클래식과 친해지는 법

80년대 초반 대학생 시절에 클래식을 접한 저자에게 음악은 하나의 운명과 같았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d단조에 붙은 ‘혁명’이라는 부제에 홀려 테이프가 닿도록 들었던 대학생은 30년이 넘어 어느덧 음악을 사랑하는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었다.

클래식과 좀 더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가 제안하는 방식은 이렇다. 처음에는 성악곡을 많이 들을 것. 오페라 아리아와 같이 인간의 목소리가 담긴 곡이야 말로 “가장 빠르고 리얼하게 가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란 것이다. 다음으로 “이 곡 저 곡 많이 들으려고 하지 말고, 같은 곡을 자꾸 반복해 들을 것”을 당부한다. 곡의 흐름을 외우는 순간, 다시 말해 그 곡의 전체적 구조가 머릿속에 들어올 때 음악은 ‘내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클래식 입문자들이 음악의 감흥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렇게 음악이 주는 감각적 느낌을 즐길 수 있을 때, 사람들은 음악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30년 공력의 음악 애호가의 체험에서 나온 이야기이기에 믿을 만하다. 이 책은 그렇게 음악에 대한 갈증을 품게 된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여전히 클래식이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급문화’라는 편견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러나 저자의 대학 시절처럼 부르주아적 취향이라는 눈초리 때문에 클래식 음반을 숨어서 들어야 할 시절은 옛날이다. 이미 우리나라의 주요 시마다 교향악단이 생겨났고, 음악가들의 정기 공연과 순회연주, 철마다 찾아오는 해외 유수의 지휘자와 관현악단의 내한 연주는 흔히 접할 수 있는 광경이다. 클래식이 대중에게 한발씩 다가가고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저자 또한 음악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숨기지 않는다. 제목인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느리게, 한 음 한 음을 깊이 눌러서)가 뜻하는 것처럼, 음악가 한 명 한 명의 생애를 음미하는 이 책이 특별한 매력을 주는 까닭은 음악 애호가들이 좀 더 늘어나길 바라는 저자의 진정한 바람이 담겼기 때문이다. 

 

목차

프롤로

1. 음악으로 가는 입구, 낯익은 이정표들   

바흐, 음악의 규범을 만든 현자

하이든, 근대로 가는 징검다리

하이든, 18세기 런던의 두 얼굴

모차르트, 고단했던 천재의 삶

슈베르트, 가난한 떠돌이의 31년

2. 혁명에서 세기말까지

베를리오즈, 몽상의 내러티브와 음악의 육체성

쇼팽, 어두운 열정의 시인

바그너, 도취와 열광의 신전에서

브람스, 낭만의 끝자락에서 고전을 바라보다

말러(1), 삶과 죽음, 현실과 천국 사이

말러(2), 떨칠 수 없는 이중의 자의식

3. 음악, 20세기를 바라보다

드뷔시, 모더니즘의 새벽

포레, 안식 혹은 슬픔

에릭 사티, 기인으로 살았던 선구자

야나체크, 피아노로 그린 내면의 풍경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불편하고 황홀한

쇤베르크, 상처 입은 아방가르드

쇼스타코비치(1), 예술과 생존의 이중구조

쇼스타코비치(2), 영화음악 노동자의 애환

4.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초상(肖像)

나치 시절, 떠난 자들과 남은 자들

클라라 하스킬, 가혹한 육신이 남긴 빛나는 모차르트

호로비츠, 영감과 즉흥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명상과 낭만의 접점

글렌 굴드, 지식인 비르투오조

지휘자 마렉 야노프스키의 정중동(靜中動)

다니엘 바렌보임, 전인적 음악가

마리아 주앙 피레스, 음예의 피아니즘

참고문헌

찾아보기

 

지은이 | 문학수  

대학 시절부터 클래식 음반을 쫓아다닌 음악 애호가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 관현악과 피아노 독주다. 오랫동안 <경향신문>에 음악비평을 써왔으며, 채널예스에 음악 칼럼 ‘내 인생의 클래식 101’, 서울시향의 기관지 <SPO>에 ‘20세기 음악 산책’ 등을 연재하고 있다. 경향신문사에서 문화부장을 두 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고단함과 바그너의 뜨거움

신간 소개: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문학수 지음 | 돌베개

[경향신문 백승찬 기자 2013.03.01]

음악을 하거나 듣기 위해서는 음악만 알면 되는 걸까. 얼핏 생각하면 그런 것 같다. 음악가는 좋은 연주를 하면 되고, 청취자는 열심히 들으면 된다. 음악 바깥에 무엇이 있는가. 실제로 “단지 음악을 했을 뿐”이라고 답한 이가 있었다. 베를린 필의 리더였으며 아마도 20세기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지휘자였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다. 자발적으로 나치에 입당해 성공가도를 달렸던 그는 전쟁 이후 자신을 심문한 미군 장교에게 그렇게 말했다. 미군 장교는 카라얀에 대해 “오로지 음악만이 중요한 광신자”라고 적었다. 정말 그게 다일까.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의 저자는 달리 생각한다. 카라얀이 주장한 ‘음악의 자율성’이란 “기회주의자들의 훌륭한 자기변호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평한다. 하지만 한국 음악계는 음악의 순수성을 신앙처럼 받드는 이로 넘쳐난다. 그래서 “음악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뻔한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지휘자가 있고, 유능한 연주자를 많이 배출한 교육자에게 마치 동물을 다룬 듯 ‘명 조련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음악은 음표의 집합이 아니다. 음악은 순수하지도 않다. 오히려 음악은 불순하다. 음악은 철학, 문학, 종교, 역사와 뒤섞여 ‘인문학’의 덩어리를 이룬다. 그래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만나는 일”이자 “개인사와 당대사를 씨줄과 날줄로 삼은 ‘음악의 생애’를 만나는 일”이라고 믿는 저자가 자신의 책 부제를 ‘어느 인문주의자의 클래식 읽기’로 정한 것은 자연스럽다.

책의 첫 장은 당연하게도 ‘음악의 규범’을 만든 바흐를 위해 마련됐다. 바흐는 고지식하고 완고했으며 초야에 묻혀 작곡에 몰두하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6대조부터 대대로 음악가를 배출했던 바흐 가문의 남자들에게 음악은 화려한 명성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직분이었다. 그의 음악도 하늘에서 떨어진 듯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그렇게 과거를 이으면서 미래를 내다봤기에 훗날 ‘온건한 전범’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아마데우스> 같은 영화를 통해 스타처럼 묘사된 모차르트에게선 의외로 ‘고단함’을 읽어낸다. 신동으로 소문났던 모차르트는 10살도 되지 않은 시점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서유럽 전체를 누비는 연주여행을 떠났다. 자유로운 음악가라기보다는 서커스단의 원숭이처럼 기교를 뽐내야 했던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하루 종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작곡을 했다. 이렇게 모차르트는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탕진했는데, 훗날 니체는 적절하게도 “천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낭비가이기 마련”이라는 말을 남긴다.

바그너는 뜨거운 사내였다. 바쿠닌과 함께 혁명에 참여했다가 쫓겨다녔고, 후원자의 아내를 유혹했으며, 이전 누구도 듣거나 본 적 없는 거대한 음악극을 선보였다. 그러나 바그너의 음악 속에는 반유대주의의 싹이 심어져 있었고, 나치들이 그런 바그너의 음악에 감동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문에 바그너에 꺼림칙함을 느끼던 이들이 있었으니 유대인 음악가 다니엘 바렌보임이나 재일교포 지식인 서경식 등이다. 그러나 이들마저 종내는 “불가해한 감동”으로 몰아넣은 것이 바그너 음악의 힘이다.

20세기 지휘자, 연주자에 대한 서술도 4분의 1을 차지한다. 1925년 22살의 나이로 소련을 떠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순식간에 서유럽과 미국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피아노에 “불이 붙은” 듯한 기술로 연주하던 그를 보겠다고 청중은 휴식 시간에도 박수를 쳤다. 그는 늘 자신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보잉747로 공수해가며 연주했고, 여행에 전속 요리사를 대동했다. 그는 연주의 즉흥성과 영감을 강조한 피아니스트였기에, 하루 2시간 이상 연습하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많은 연습은 연주를 기계적으로 만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테르는 여러 면에서 호로비츠와 반대였다. 서방세계의 열렬한 찬사와 소련 공산당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결코 조국 소련을 떠나지 않았고, 명성을 즐기지도 않았다. 71세였던 1986년 자동차 한 대로 러시아 대륙을 횡단하며 100회 가까운 연주회를 치른 그는 시골 성당의 낡은 피아노, 조율 안 된 피아노 앞에도 선뜻 앉았다고 한다.

다루는 작품을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평론이 좋은 평론이라면,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는 그런 글들로 가득하다. 음악가의 시대와 삶에 대해 읽다보면, 들어보지도 못한 곡들의 선율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같고 유튜브에서라도 찾아 듣고 싶어진다. 저자는 경향신문에서 음악 담당 선임기자로 활동 중인데, 저널리스트답게 정확한 정보, 단정한 문장, 선명한 통찰을 전하는 데 집중한다. 예를 들어 슈베르트는 “간결한 언어를 구사한 시인이라기보다는 미문의 에세이스트”, 베를리오즈는 “뭔가를 보여주려고 했던 인간”이라고 평하는 식이다. 흥미로운 것은 클래식 사상 최고의 거인이라 할 만한 베토벤에 대한 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역량 부족’ 때문에 언급하지 못했다며 독자의 양해를 구하는데, 정작 베토벤은 이후 여러 작곡가들의 삶에 대한 설명에서 지울 수 없는 그림자처럼 등장한다. 각 음악에 대해 들을 만한 음반 목록도 추천했다.‘아다지오 소스테누토’는 “음 하나하나를 충분히 눌러 무겁고 느리게 연주하라”는 음악용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