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아주 짧은 초상화] 어떤 법치주의자 - 한승오 | 농부

라라와복래 2013. 4. 11. 12:20

[아주 짧은 초상화]

어떤 법치주의자

한승오 | 농부

이 년 전, 명식은 아내와 초등학생인 두 아이와 함께 지석골 마을에 귀농했다. 명식 부부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고, 귀농하기 전 명식은 출판 편집 일을 했고 아내는 학습지 방문교사 일을 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두 사람은 농사를 지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기껏해야 명식이 서울의 귀농학교에서 해본 간단한 농사실습이 경험의 전부였다. 명식의 가족은 빈집을 수리해서 살았는데, 그 집에 딸린 세 마지기 논과 약 700㎡(200평) 밭이 그들이 일궈 먹고살아야 할 땅이었다. 그들에게 다른 생계수단은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15분쯤 걸어 올라가면, 지석골이라 불리는 야트막하나 꽤 긴 골짜기로 들어서는 길목이 나오는데, 거기 붉은 벽돌집에 나이 팔십에 다가선 황 노인이 두 번째 부인과 단 둘이서 산다. 황 노인은 집 주변 열두 마지기 논과 2000여㎡의 밭을 일구고 있다. 지석골의 다랑논들을 오가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집을 지나쳐야 한다. 그 길이 콘크리트로 포장되기 전에는 황 노인은 걸핏하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막고 나섰다. 자기 땅을 길로 내주었는데 도통 시끄럽고 번잡스러워서 살 수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래서 경운기는 멀리 산길로 에둘러 가야 했고 사람들은 황 노인 집 앞을 조심조심 오가야 했다. 땅주인인 황 노인의 고집으로 길은 겨우 차 한 대 지나갈 정도로 아주 좁게 포장되었다. 길에는 그가 만들어놓은 높고 두꺼운 콘크리트 과속방지턱 두 개가 10여m 간격으로 장애물처럼 돌출해 있다. 그 턱을 넘는 차는 별안간 크게 한 번씩 출렁이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황 노인을 욕하곤 한다.

지석골의 다랑논들은 황 노인 집 앞의 지하수 관정에서 물을 끌어 쓴다. 그 관정은 20여 년 전 농업용수 대책으로 군청에서 파준 것이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황 노인이 주인처럼 관정을 관리한다. 그런 사정들 때문일까? 그는 마치 지석골의 성주나 되는 것처럼 행세한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그를 내놓은 사람 취급하고 가급적 그와 내왕하려 하지 않는다. 명식은 황 노인과 여러 번 마주쳤다. 그때마다 깍듯이 인사했지만, 황 노인은 아무 대꾸 없이 명식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를 매섭게 쏘아보는 그의 눈은 옆으로 가늘게 찢어졌고 꽉 다문 입은 작고 입술은 가느스름했고 이마는 좁고 볼은 야위었고 턱은 각이 졌다. 키는 작고 몸매는 노인답지 않게 다부졌다. 그의 인상은 대단히 차갑고 매웠다.

지난해, 봄가뭄이 극심했다. 4월 말부터 6월 초순까지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관정에서 나오는 지하수 양도 예년에 비해 확 줄었다. 황 노인 집 앞의 관정에는 지석골 논 일곱 다랑이가 물을 대려고 줄을 섰는데, 명식의 논도 그 중 하나였다. 순서가 어떻게 정해지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황 노인 논에 먼저 물을 댄 후 나머지 논들에 차례대로 물을 대는 것 같았다. 명식은 자신의 논이 마지막 순서일 거라고 눈치껏 짐작하고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6월에 들어서도록 그 차례는 오지 않았다. 다른 논들은 벌써 모내기를 끝내고, 다시 돌아가면서 논에 물을 대고들 있었다. 명식이 자기 논에도 물을 좀 대자고 하소연하면, 사람들은 논에 심은 모가 타 죽을 지경이라며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말만 했다.

어느 어스름한 저녁. 명식은 황 노인 집 앞으로 갔다. 명식은 관정에 연결된 호스를 벗겨내고 자기 논으로 향하는 호스를 연결했다. 명식의 손동작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다는 듯 거리낌없고 단호했다. 수압을 버티느라 탱탱해진 주황색 합성수지 호스에서는 물이 올라가는 소리가 꾸르륵 꾸르륵 났다. 명식은 논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잠시 후 명식의 논으로 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명식은 속이 후련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논으로 간 명식은 눈앞의 광경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논에는 흙에 스며든 물자국만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 물은 한 방울도 없었다. 전날 밤 누군가가 관정에 연결된 호스를 다시 다른 논으로 돌렸던 것이다. 명식은 온몸에 맥이 풀려 논둑에 털썩 주저앉았다.

명식은 논에서 내려와 황 노인 집 앞에 섰다. 관정의 물은 황 노인 논으로 흘러들고 있었고 황 노인은 한 손에 삽을 들고 논둑 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아저씨, 논에 물 좀 대면 안 되겠습니까?” 명식은 최대한 정중하게 말한다. 황 노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고개 숙여 논둑을 쳐다본다. “이놈의 두더지들 때문에 물을 가둘 수 있어야지. 이거 봐, 논물이 다 빠졌잖아.” 그의 논물은 논둑에 넘칠 정도로 그득하다. “아저씨, 이러다간 모내기도 못하겠습니다.” 황 노인은 명식의 눈을 빤히 쳐다본다. 흔들림 없는 작고 까만 눈동자가 마치 독사 눈 같다. “아니, 누가 물을 대지 말라나. 물을 대, 양심껏.” 명식은 ‘양심’이라는 말을 속으로 여러 번 되뇐다. 잠시 후 마지못해 공손히 말한다. “어제는 아저씨 논물이 다 찬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고 물을 돌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황 노인은 명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등을 돌리고 다시 논둑을 걷는다. 두더지 구멍을 찾는지, 삽으로 논둑을 여기저기 찔러본다. 명식은 황 노인을 뒤쫓으며 그의 단단한 등에 대고 말한다. “모내기 때를 놓칠까봐 마음이 급해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황 노인은 명식을 보지도 않고 무심하고 차갑게 말한다. “재주껏 물을 대라고.” 그의 허락 없이 물을 돌려놓는다면, 채 10분도 되지 않아 물은 다시 그의 논으로 돌아갈 것이 뻔하다. “아저씨, 모내기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배운 사람이 말이야, 양심껏 해야지.” 갑자기 가슴 깊숙한 곳에서 모멸감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른다. 명식은 속이 뒤틀린다.

며칠 후, 이제 논에 물을 못 대면 모내기는 불가능했다. 명식은 다시 황 노인을 찾았다. 관정의 지하수는 황 노인의 마늘밭을 적시고 있었다. 황 노인은 집 앞에 의자를 내놓고 거기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황 노인은 다가오는 명식을 보고도 모른 척 태평스러운 표정으로 먼 산을 쳐다보았다. 명식은 황 노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곧장 그에게 갔다. 명식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말한다. “아저씨, 물 좀 돌리겠습니다.” 황 노인은 귀찮다는 듯 명식을 외면한다. “논물 대기도 어려운 판에 마늘밭에 물을 대는 게 말이 됩니까?” 명식의 목소리는 높고 떨리기까지 한다. 황 노인은 얼굴을 찡그린다. “이봐, 아쉬운 사람이 샘을 파는 거야. 큰소리치는 걸 보니 자존심은 있나 보네.” 황 노인은 ‘자존심’이라는 말에 살짝 말꼬리를 틀며 은근히 비아냥거린다. 명식의 얼굴이 벌게지며 잔뜩 일그러진다. “관정은 아저씨 게 아니잖아요!” 명식의 목에 핏대가 선다. “누가 뭐라나? 법대로 해.” 황 노인은 나직이 말을 내뱉더니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은 채 명식을 쏘아본다. 그의 작고 까만 눈동자는 언제나 미세한 흔들림조차 없다.

“논에 물 대는 데 따로 무슨 법이 있어요? 차례대로 물을 대는 게 법 아닌가요?” 명식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심하게 흔들리고 주먹 쥔 손은 부들부들 떨린다. “여하튼 법대로 하라니까.” 황 노인은 ‘법대로’라는 말을 또박또박 되새김질한다. 결국 명식은 논을 묵혔다. 지석골 인근에서 모내기를 하지 못한 논은 명식의 논밖에 없었다. [경향신문 2013.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