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톨스토이 작품 18권 펴내는 박형규 전 고려대 교수

라라와복래 2013. 4. 11. 11:52

톨스토이 작품 18권 펴내는 박형규 전 고려대 교수

50년 연구 끝에 톨스토이 전집 단독 번역 출간

러시아 문학자이자 해방 이후 1세대 번역가인 박형규 전 고려대 교수(82)가 18권으로 구성된 레프 톨스토이 전집을 단독 번역으로 출간한다. 2002년 설립된 러시아교육문화센터 뿌쉬낀하우스에서 출간하는 이 전집은 국내 최초의 톨스토이 전집이다. 번역가 한 명이 전집을 번역하는 것도 처음이다.

“1956년부터 8년에 걸쳐 <안나 까레니나>와 <전쟁과 평화>를 러시아어 원전으로 번역한 뒤 1966년 처음 책이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50년 이상을 톨스토이 번역에 매달려온 셈이지요. 그의 철학과 문체를 이해하는 한 사람의 번역가가 통일된 전집을 내놓는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 전 교수는 “나는 다만 학자일 뿐 언론에 나선 적이 없다. 그러나 이번 톨스토이 전집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콘스탄틴 브누코프 주한 러시아 대사도 대신 참석한 올렉 다비도프 공사를 통해 “방대한 양의 작업을 이루어낸 박 교수에게 감사한다”는 축사를 했다. 박형규 전 고려대 교수가 9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톨스토이의 작품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집은 <안나 까레니나>를 시작으로 <부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오는 6, 7월 각각 출간된다. 이어 내년 말까지 18권이 순차적으로 출간된다. 톨스토이 전집은 구소련 정부가 작가 탄생 100주년이던 1928년 출간하기 시작해 1958년 완간한 90권짜리가 정본인데 이번 한국어 전집은 가장 분량이 많은 일기와 서간문을 추려낸 것을 제외하고는 원전에 실린 소설과 에세이가 모두 포함된다.

박 전 교수는 주요 장편 3개를 비롯해 자전소설 <유년시절>, <지혜의 달력>(<인생독본>으로 번역됨) 등을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 전집에 들어간 초기 중·단편집 <악마> <결혼의 행복>, 희곡집 <어둠의 힘>, 후기 중·단편집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예술·문학·교육론집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생·종교·사회평론집 <고백> 등은 처음 선보인다. 러시아어 원전과 권수 차이가 큰 것은 원전의 경우 <안나 까레니나>만 해도 6권으로 나올 만큼 권당 분량이 적은 데다 창작메모와 여러 판본이 모두 포함됐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1910년대에 최남선, 이광수에 의해 소개됐습니다. 그의 문학과 사상은 한국 근대문학의 일부라고 할 만큼 우리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어요.”

박 전 교수는 “인간의 감정과 체험의 세계를 깊이 통찰하는 기교, 문체의 정직성과 솔직함, 사회적 불공평과 결함에 대한 비판, 악에 대한 과감한 폭로, 도덕적ㆍ심리적 문제를 사회적 문제와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복잡한 상호관계 속에서 작중 인물의 충실한 성격을 창조하기 위해 심리분석을 이용한 점” 등을 우리 문학에 남긴 톨스토이의 유산으로 꼽았다. 그는 또 톨스토이 번역이 문학연구자가 아니라 러시아어 번역가에 의해 이뤄진 데다 상업성 부족을 이유로 아직까지 전집이 나오지 못한 국내 출판 상황을 비판했다.

톨스토이 작품 가운데서도 <안나 까레니나>를 가장 아낀다는 그는 최근 개봉한 동명의 영화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안나 까레니나>는 기품 있고 아름다운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여자로서의 매력뿐 아니라 사랑에 몸을 불사르는 격정도 가진 복합적 인물이어서 한 여배우가 그려낸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데 지금 영화는 간통에만 초점을 맞추고 각 장면의 연결조차 되지 않을 만큼 엉성해요. 굉장히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영화 때문에 고전에 관심을 갖는 건 좋지만 고전은 책으로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1931년생인 그는 해방 직후 중학생 시절, ‘모스크바 3상회의’ 등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구소련에 관심을 가지면서 외교관이 되기 위해 일본어 책으로 러시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6·25로 분단된 이후에는 외교 대신 문학으로 관심을 돌려 1954년 창설된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에 들어갔다. 일제시대 중국 하얼빈에서 러시아어를 배우거나 일본 학병으로 러시아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교수에게 러시아어를 배웠다.

제5공화국 시절에는 일본에 있는 러시아 원서 극동총판에 책을 주문했다가 동료 교수가 신고해 간첩으로 몰리면서 이틀간 중앙정보부에 감금돼 취조를 당하기도 했다. 1986년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러시아문학회 창립 3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받아 주일 소련대사를 만났고, 1989년 한국러시아문학회를 창립했다. 그를 만난 러시아인들은 “냉전 상황에서 어떻게 러시아어를 공부할 생각을 했느냐”며 감탄했다.

박 전 교수는 “일본에서는 수십 종의 톨스토이 전집이 나왔지만 하다 히사시로란 분이 전체를 번역한 전집만이 살아남았다”면서 “평생을 함께한 톨스토이 번역이 전집으로 출간돼 보람과 책임감이 크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한윤정 기자 2013.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