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

세계의 명시/ 실비아 플라스 - 거상(巨象)

라라와복래 2015. 8. 4. 10:44

세계의 명시/ 실비아 플라스

거상(巨象)

저는 결코 당신을 온전히 짜 맞추진 못할 거예요,

조각조각 잇고 아교로 붙이고 올바로 끼워 맞추어.

노새 울음, 돼지가 꿀꿀거리는 소리, 음탕한 닭 울음소리가

당신의 커다란 입술에서 새어 나와요.

그건 헛간 앞뜰보다도 더 시끄럽답니다.

아마 당신은 스스로를 신탁(神託)이나

죽은 사람들, 아니면 이런저런 신(神)들의 대변자로 생각하겠지요.

삼십 년 동안이나 저는 당신의 목구멍에서

진흙 찌끼를 긁어내려고 애썼답니다.

그런데도 전 조금도 현명해지질 못했어요.

아교 냄비와 소독액이 담긴 양동이를 들고 작은 사닥다리를 기어올라

저는 잡초만 무성한 당신의 너른 이마를 슬퍼하면서

개미처럼 기어 다녀요,

거대한 두개골 판(板)을 수선하고

민둥민둥한 흰 고분(古墳) 같은 당신의 눈을 청소하려고.

오레스테스* 이야기에 나오는 푸른 하늘이

우리 머리 위에 아치 모양을 이루어요. 오 아버지, 혼자만으로도

당신은 로마의 대광장(大廣場)처럼 힘차고 역사적이에요.

저는 검은 삼(衫)나무 언덕 위에서 도시락을 폅니다.

홈이 파인 당신의 뼈와 아칸서스 잎 모양의 머리칼은

옛날처럼 어수선하게 지평선까지 널려 있어요.

그렇게 황폐하게 되려면

벼락 한 번만으론 부족할 거예요.

밤마다 전 바람을 피해

양(羊)의 뿔 모양을 한 당신의 왼쪽 귀 속에 쭈그리고 앉아

붉은 별들과 자줏빛 별들을 헤아린답니다.

태양은 기둥 같은 당신의 혀 밑에서 떠올라 와요.

제 시간은 그림자와 결혼했어요.

이제 전 더 이상 선착장의 얼빠진 돌에

배의 용골이 긁히는 소리엔 귀 기울이지 않아요.

*오레스테스(Oreste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가멤논과 클뤼테임네스트라의 아들로, 어머니를 죽인 죄로 복수의 여신들에 의해 쫓겨났음.

시를 말하다

정끝별 l 시인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그해 가을’)라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것들을 향해 막장 대거리를 했던 80년대 이성복의 시는 쇼킹했다. 한데 이보다 20여 년 전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아빠’)라고 절규했던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가 있었다. 실비아의 귀엽고 친근한 ‘아빠(daddy)'라는 시어는,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전쟁과 폭력의 원흉이었던 나치와 그녀의 일상을 옭아맸던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거느리고 있다. 두 번의 자살 미수에 이어 세 번째 자살이 성공했을 때 실비아가 죽였던 것은 그녀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아빠’들이기도 했다. ▶1955년 23살 때의 실비아 플라스

실비아 플라스만큼 ‘신화’라는 말이 어울리는 존재가 또 있을까. 아름다운 금발의 유망한 미국 여성 시인과 핸섬한 당대 최고의 영국 시인 테드 휴스와의 결혼은 현대 영미 문학계 최고의 로맨스였다. 여덟 살 적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플라스에게 “매장된 남성 뮤즈이자 창조주-신”(일기)과 같은 그리움과 찬양의 대상이었으나 그 아버지가 나치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아버지를 향한 분열적 감정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그런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했던 남자가 휴스였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남자를 만났어요”(일기), “바다의 질투 어린 공격들을/ 가르고 서 있는/ 저 장엄한 거상(巨像)도/ 당신보다 나은 게 없다./ 오 나의 사랑하는 이여…”(‘어느 순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라며 플라스는 휴스에게 단숨에 매혹됐다.

“아이의 울음이// 벽 안에서 녹아내린다./ 나는/ 화살이다.// 자살하듯 달리는/ 이슬, 돌진한다/ 붉은// 눈, 아침의 큰 솥 속으로”(‘에어리얼’). 이 비극의 극점에서 플라스의 삶과 작품들은 서로 경계를 넘나들며 허구화되고 신화화되었다. 그러나 플라스의 우울증에 휴스의 외도가 더해지면서 별거와 이혼, 그리고 어린 아이들 곁에 빵과 우유를 가져다 놓은 후 가스오븐에 서른두 살의 아름다운 금발을 묻고 자살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은 참혹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그녀의 짧은 생애에서 남성-뮤즈들은 상실감과 고통의 근원이었고, 평생을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마치 거상(colossus)과도 같은.

시 ‘거상(巨像)’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목의 ‘콜로서스’와 4연의 ‘오레스테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콜로서스란 ‘거대한 상’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 로도스 섬의 거상(巨像)을 지칭한다. 36m에 달하는 청동의 아폴로 상으로 BC 224년 지진으로 쓰러져 방치되다가 잔해마저 사라져 버린 전설의 거상이다. 한 발은 섬을 딛고 다른 한 발은 방파제를 딛게 세워져 배들이 이 거상의 다리 사이를 지나다녔다고 전한다. <오레스테이아> 역시 고대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아가멤논이 트로이 공주이자 포로인 카산드라를 데리고 귀환하자 아가멤논의 아내는 그 둘을 죽인다. 이에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아버지 무덤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바치며 복수를 다짐한 후, 죽은 아들의 뼛조각을 가지고 온 나그네로 위장해 어머니를 살해한다. 시 속에 등장하는 ‘홈이 팬 당신의 뼈’와 ‘머리카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한 상징물인 셈이다. 물론 파괴된 거상의 이미지이기도 하겠지만. ◀로도스 섬에 세워졌다는 전설의 콜로서스

“친숙한 아버지 숭배 소재. 그러나 다른. 더 오싹한”(일기)이라는 시작 메모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시에는 ‘당신’으로 불리는 거상, 즉 플라스의 남성-뮤즈에 대한 대립되고 모순된 감정이 투사되고 있다. ‘당신’은 지금 로도스 섬의 거상처럼 파괴되어 복원 불가능하다. 이을 수도, 꿰맞출 수도 없는 그 거상의 입에서는 엄숙한 신탁이 아니라 비천한 가축들의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나온다. 가축들과 부엌 용품에 둘러싸인 시적 공간을 통해 ‘나’와 ‘거상’이 딸과 아버지 혹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데, 개미에 비유되는 ‘나’는 30년간이나 ‘거상’의 목구멍 찌꺼기를 긁어내는 것은 물론 잇고 짜 맞추고 청소하고 수선해 온 것이 전부였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풍요와 남성성을 상징하는 “양의 뿔을 닮은 당신의 왼쪽 귀”에 앉아 어둠 속에서 당신의 분신인 붉은 별, 자줏빛 별을 센다. ‘당신’을 상징하는 태양이 거상의 혀 밑에서 솟아오르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당신은 내게 ‘말씀’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법이자 질서였을 것이다. 어쨌든 태양이 떠오르면 ‘당신’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개미만 한 ‘나’는 그 그림자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제 시간은 그림자와 결혼했어요”라는 구절이 절박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러고는 이제 더 이상 거상의 다리나 선착장에 배의 용골이 긁히는 소리에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용골이 긁히는 소리”는 결혼, 출산, 육아, 별거, 이혼, 자살에 이르는 잡다한 갈등들을 떠오르게 한다.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영화 <플라스>는 비스듬히 누운 플라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독백처럼 그녀의 시 “죽는 것은/ 하나의 예술이지요, 만사가 그렇듯./ 난 그걸 특히 잘 해내요”(‘라자로 부인’)가 낭독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붉은 천으로 씌워진 관 하나가 현관을 나오는 것으로 끝이 난다. “1963년 2월 11일 실비아 플라스는 자신의 부엌에서 가스를 마시고 자살했다”로 시작하는 프롤로그와도 같은 자막과 함께. 문득 단말마와도 같았던 그의 시 구절들이 떠오른다. “꽃피는 달은 끝났어요”, “제 이름을 알려 주세요”, “난 길을 잃었어요, 길을 잃었어요”, “사랑이란 내 저주의 뼈와 살이지요”(‘생일을 위한 시’)…

실비아 플라스 (Sylvia Plath, 1932.10.27-1963.02.11) 1932년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합병증으로 목숨을 잃은 이듬해, 아홉 살이었던 실비아 플라스는 첫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스미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3학년 여름 여성지 《마드무아젤》의 인턴으로 뽑혀 뉴욕 시에서 지내던 중 우울증이 급격히 심해졌다. 인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수면제를 먹고 두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뉸햄 칼리지에서 계속 공부했다. 스물네 살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이었던 테드 휴스를 만나 결혼했다. 1960년 큰딸을 낳고 첫 시집 <콜로서스>를 출판했으며 2년 후 아들 니콜라스를 낳았다. 같은 해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 공식적으로 별거를 선언, 아이들과 함께 런던으로 돌아와 ‘아빠’, ‘레이디 라자러스’ 등 많은 시를 썼다. 1963년, 빅토리아 루카스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소설 <벨 자>도 호평을 받았다. 별거로 인한 스트레스와 독감, 생계 문제까지 겹쳐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리던 실비아 플라스는 2월 11일 아침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정끝별 1988년 <문학사상>에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시론ㆍ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