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né Jacobs/Theater an der Wien 2013 - Mozart, Idomeneo
동화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미녀’의 아버지는 괴물의 정원에서 꽃을 꺾다가 들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집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존재를 괴물에게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납니다. 이렇게 목숨의 대가를 약속하는 스토리는 옛날이야기의 흔한 패턴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에서 주인공인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 역시 바다 위에서 자신의 함대가 거센 폭풍우에 휩쓸리자 바다의 신 넵튠(포세이돈)에게 살려 달라고 기도하며 크레타에 도착해 처음 만나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인신 공양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살아 돌아온 아버지들이 처음 마주치는 건 집에서 기르던 삽살개가 아니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자녀들입니다. 운명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스토리죠. 절망한 아버지들은 앓아눕거나 술수를 써서 이 비극을 피해보려 하지만 젊고 순수한 딸과 아들은 괴물 또는 신에게 맞서 정면 돌파를 시도합니다.
대본 작가 로렌초 다 폰테를 만나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 같은 걸작 오페라를 탄생시키기 전에 모차르트는 여러 편의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 정가극. 대체로 신화나 영웅담에서 소재를 얻은 진지한 내용의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그 가운데 바레스코의 대본으로 1781년 뮌헨 궁정극장에서 초연한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Idomeno, Re di Creta)>는 모차르트 스스로가 자신의 오페라 중 최고 걸작이라고 확신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후세의 청중은 오페라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장 피에르 포넬이나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같은 거장들이 취리히와 잘츠부르크에서 이 작품을 새롭게 해석해 선보인 뒤에도 <이도메네오>는 여전히 논란거리가 많은 문제작으로 남았습니다.
신들에게 약속하지 말라는 교훈
1막: 크레타 왕궁
BC 1200년경 크레타 왕궁을 배경으로 한 이 오페라는 트로이 전쟁 직후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의 딸인 일리아 공주(소프라노)는 전쟁 포로로 잡혀 와 크레타 왕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일리아 공주는 크레타의 이도메네오 왕(테너)의 아들인 이다만테 왕자(테너 또는 메조소프라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다만테는 일리아에게 격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하지만, 조국과 명예, 그리고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일리아는 자신의 사랑을 억제합니다.
이도메네오 왕의 함대가 바다에서 거센 폭풍우에 휩쓸리고 왕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갈이 오자, 이다만테와의 결혼을 꿈꾸고 있는 아가멤논의 딸 엘레트라(소프라노. 그리스 신화의 엘렉트라)는 사랑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근심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도메네오는 천신만고 끝에 크레타 해안에 도착합니다. 바다의 신 님프에게 크레타에 도착해 처음 만나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인신 공양을 약속하고 살아 돌아온 것이었죠. 그런데 바닷가에서 처음 마주친 인물이 바로 자신의 아들 이다만테 왕자입니다. 이도메네오는 절망에 빠져 운명을 저주합니다. 크레타 인들은 폭풍우를 뚫고 살아 돌아온 크레타 병사들의 개선을 환영합니다.
2막: 크레타 왕궁과 시돈 항구
2막은 크레타 왕궁과 시돈 항구가 배경입니다. 이도메네오는 충신 아르바체(테너)에게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합니다. 아르바체는 이다만테 왕자를 엘레트라 공주와 함께 공주의 고향 아르고스로 보내 당분간 그곳에서 함께 살게 하고 넵튠과 다른 신들의 분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라고 조언합니다. 이도메네오는 그 충고를 따르기로 합니다. 이도메네오는 아버지와 조국을 잃은 일리아를 위로하지만, 일리아는 이도메네오를 아버지로 생각하고 크레타를 고향으로 여긴다고 말해 이도메네오를 더욱 마음 아프게 합니다.
이도메네오는 이다만테와 엘레트라를 불러 함께 아르고스로 떠나라고 하죠. 엘레트라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지만 이다만테는 깊이 절망합니다. 백성들의 환송과 함께 배가 출항하려는데, 바다의 신 넵튠(포세이돈)의 분노가 바다에 격랑을 일으킵니다.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할 이다만테를 빼돌리려는 것을 알고 바다의 신이 진노한 것이죠. 게다가 무시무시한 바다 괴물까지 보내 크레타의 시돈 항구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백성들은 신을 진노케 한 죄인이 누구냐고 묻지만, 이도메네오는 넵튠 신이 원하는 희생은 바칠 수 없다며 오로지 자신만이 죄인이라고 말하죠.
3막: 크레타 왕궁의 정원
3막은 크레타 왕궁의 정원입니다. 일리아는 이다만테를 향한 사랑을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어 고민합니다. 그때 이다만테가 나타나 ‘잔인한 바다 괴물을 죽이러 가서 싸우다 죽어버릴 생각이다’라고 절망적인 심경을 노래하자 일리아는 결국 그에게 강렬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마침내 일리아의 마음을 확인한 이다만테는 기쁨에 넘쳐 일리아를 포옹합니다. 그때 이도메네오와 엘레트라가 그 자리에 나타납니다. 아버지 이도메네오의 근심은 더욱 커지고 엘레트라는 분노와 질투를 억누르지 못하죠.
넵튠의 제사장이 나타나 이도메네오에게 바다 괴물이 벌써 크레타인 수천 명을 삼켜버렸다면서 이도메네오를 추궁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이도메네오는 넵튠이 원하는 제물은 바로 이다메네오라고 고백합니다. 그때 신하 아르바체가 나타나 이다멘테가 몸을 던져 그 괴물을 죽였노라고 알립니다. 크레타인들은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넵튠 신은 “이도메네오는 왕위에서 물러나고, 이다멘테가 일리아와 결혼해 나라를 다스리라”고 신탁을 내립니다. 엘레트라는 격렬한 분노를 토로하지만, 신탁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온 백성이 ‘사랑의 신이여, 내려오소서’를 노래하며 축하하는 가운데 이다만테와 일리아는 결혼으로 맺어집니다.
도식성 극복한 오페라 세리아
모차르트의 오페라 22편 중 예술성 면에서 특히 높이 평가되는 작품은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마술피리>를 포함하는 그의 생애 마지막 일곱 편이며, 25세에 발표한 <이도메네오>는 그 가운데 첫 작품입니다. 여러 습작과 시행착오를 거쳐 오페라 음악 면에서 충분히 성숙한 모차르트가 자신 있게 내놓은 첫 오페라라고 봐도 되겠지요. 같은 오페라 세리아라고 해도 <이도메네오>는 후기 바로크 오페라인 18세기 전반의 세리아에서 다시금 진일보한 작품입니다. 18세기 중반까지의 세리아에서는 중창과 합창이 가끔 사용되었지만 그 비중이 크지 않았는데요. <이도메네오>에는 유려한 멜로디의 인상적인 중창이 자주 등장하며 합창 또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독창 아리아로 일관하지 않고 중창에 비중을 두는 방식은 극의 긴장도를 높이고 등장인물의 심경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이다만테, 엘레트라, 이도메네오가 부르는 3중창 ‘떠나기 전에(Pria di partir)', 이다만테와 일리아의 2중창 ’당신의 고백에 제가 죽지 않으면(S'io non morro)', 그리고 이다만테, 일리아, 이도메네오, 엘레트라의 4중창 '먼 곳에서 나 홀로(Andro ramingo e solo)' 등은 그 좋은 예가 됩니다.
주제 면에서도 앞 시대의 세리아보다 확연하게 발전해 있습니다. 여전히 신화의 세계를 다루고는 있지만, 신성을 예찬하는 바로크 오페라와는 달리 인간적 갈등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신들에 대한 의무와 인간에 대한 신의(信義) 간의 갈등’이라는 주제가 상당히 현대성을 띠고 있죠. 2006년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의 <이도메네오>를 연출한 한스 노이엔펠스는 신들의 폭력적 억압에 저항하려는 주인공 이도메네오가 넵튠뿐만 아니라 예수, 석가모니, 모하메드까지 목을 베어 그 피에 젖은 머리통을 의자에 나란히 올려놓는 것을 결말 장면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모든 종교의 억압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도발적으로 보여준 연출의 예입니다.
모차르트가 주요 등장인물들 모두를 고음역(테너와 소프라노)으로 설정한 것을 보면, 아직 바로크 오페라 세리아의 영향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이도메네오)와 아들이(이다만테)이 같은 고음역을 노래하는 것은 베르디 오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죠. 이다만테 역은 초연 때 알토 카스트라토 배역이었다가 1786년 빈 공연 때 테너 역으로 바뀌었고, 오늘날에는 메조소프라노가 부르기도 합니다. 2010년 1월 국립오페라단이 국내 초연으로 <이도메네오>를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렸을 때도 메조소프라노가 이다만테 역을 노래했습니다. 이 경우 이다만테의 음색이 테너인 이도메네오와 뚜렷이 구분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무대 위의 사실적인 비주얼을 고려한다면 테너가 이 역을 맡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지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극 전체를 이끌어가며 해피엔딩 속에서도 비극적 존재로 그려지는 이도메네오입니다. 그의 아리아 ‘바다의 분노를 피했지만(Fuor del mar)'은 원래의 버전대로라면 대단한 고난도의 곡이죠. 그러나 일리아 역 소프라노의 서정성과 고난도의 기교(아버지를 여의었어도 Se il padre perdei), 그리고 엘레트라 역 소프라노의 불길처럼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가창(너무나 괴로운 이 마음 Tutte nel 책 vie sento, 오레스테스와 아이아스의 고통 D'Oreste d'Alace) 등이 팽팽한 대결을 펼치는 것도 이 오페라의 큰 매력 가운데 하나입니다.
초연 당시 모차르트는 출연진에 불만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도메네오 역의 테너 안톤 라프(Anton Raaff)는 나이가 이미 66세였고, 카스트라토였던 이다만테 역의 빈첸초 달 프라토(Vincenzo dal Prato)는 모차르트가 보기에 최악의 연기자였습니다. 이들의 역량에 맞추어 음악을 수정해야 했기 때문에 원래 작곡했던 훌륭한 곡들을 대폭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편지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이미 뛰어난 극장 감각을 익혔던 모차르트는 바레스코의 대본이 너무 길고 산만하다고 판단해 몇몇 아리아와 레치타티보 부분을 이미 삭제해 두었습니다. 극의 긴장과 밀도를 높이기 위해서였죠. 또 빈의 애호가용 공연을 위해 모차르트 자신이 새롭게 정리한 악보도 있었다는군요. 그래서 <이도메네오>에는 몇몇 버전이 존재하며, 여러 아리아와 중창이 복수의 판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넵튠 신탁 장면에는 네 가지 판본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연주 또는 공연마다 총 연주시간이 다른 것은 이런 때문입니다.
Anna Netrebko : “D'Oreste, d'Aiace”(오레스테스와 아이아스의 고통) - Salzburg Festival 2006
추천 음반 및 DVD
1. 앤소니 롤프 존슨/안네 소피 폰 오토/실비아 맥네어 등. 존 엘리엇 가디너 지휘,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 및 몬테베르디 합창단 연주, 1990년 녹음 (음반)
2. 리처드 크로프트/베르나르다 펑크/임선혜/알렉산드리나 펜다찬스카 등. 르네 야콥스 지휘,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와 RIAS 카마코어, 2008년 녹음 (음반)
3. 루치아노 파바로티/프레데리카 폰 슈타데/일레아나 코트루바스/힐데가르트 베렌스 등. 제임스 레바인 지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장 피에르 포넬 연출, 1982년 공연 실황 (DVD)
4. 리처드 루이스/레오 거크/보체나 비틀리/조세핀 바스토우 등. 존 프리처드 지휘,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및 글라인드본 합창단, 존 콕스 연출, 1974년 글라인드본 공연 실황(DVD 한글 자막)
글 이용숙(음악평론가) 이화여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 수학, 서울대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합뉴스 오페라 전문 객원기자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