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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 로코코와 사실주의 미술 속 개: 풍속화와 개

라라와복래 2018. 7. 29. 16:58

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로코코와 사실주의 미술 속 개

풍속화와 개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추억(Le Souvenir)>, 1766~78년, 패널에 유채, 25x19cm, 런던 월리스 컬렉션. 연애편지를 읽으며 떠난 연인의 이니셜을 나무에 새기며 변치 않는 사랑을 다짐하는 듯한 그림 속 여인은 장자크 루소가 쓴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 『줄리, 혹은 신 엘로이즈』에 기반해, 프랑스 로코코 회화의 스타 화가 프라고나르가 만들어냈다. 바람은 부드럽고 색감은 따뜻하고 원피스는 흩날린다. 달콤하며 우아한 정취가 가득하다. 주인을 지켜보고 있는 스패니얼은 충성과 정절의 상징으로 곁에 앉아 있다.


개, 소녀의 은밀한 순간을 공유하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죽음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대표되는 절대왕정의 추락을 상징한다. 권력은 공백을 허락하지 않는 법. 약해진 왕권을 강력해진 귀족들의 힘이 차지했다. 왕의 도시 베르사유를 떠나 파리로 온 귀족들은 저마다 ‘작은 국왕’인 양 평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다. 부와 권력을 쥐었으니 금기와 도덕은 우스웠다. 퇴폐와 향락은 특권처럼 경쟁이 붙었다. 화려한 색채와 세심한 장식물들로 꾸며진 회화와 조각, 가구, 식기, 장신구, 의상 등이 귀족 저택 곳곳을 가득 채웠다.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으로 대표되는 바로크가 끝나고 프랑스 로코코(Rococo: 조약돌, 조개 양식을 뜻하는 프랑스어) 양식을 대표하는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1703-1770)와 그의 화풍을 모방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장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가 이름을 떨쳤다.

회화는 시대의 산물이다. 사치와 쾌락의 시대 분위기를 타고, 이상적인 여성의 아름다움도 자극적이고 향락적으로 변화되면서 그림 속 여인들은 에로틱한 매력을 숨기지 않았다. 애완동물의 대표격인 개와 고양이는 각자 로코코 회화에서 왕성하게 주·조연으로 활동했는데 그에 담긴 뜻은 각기 달랐다. 고양이가 소녀에게 부족한 여성성을 보완하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주로 했다면, 대체로 개(와 강아지)는 성적 파트너와 같은 남성성과 야수성을 암시했다.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소녀와 강아지>, 1765~72년, 캔버스에 유채, 89x70cm,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소녀인 듯 처녀인 듯 프라고나르의 여자는 푸른 리본이 예쁘게 묶인 흰 강아지와 침대에서 놀고 있다. 평범해 보이는 장면이나, 그 안에 깃든 기운은 자못 뜨겁다. 어슴푸레한 침실에 커튼이 드리워져 주변은 어둡고, 시선은 흰 시트가 빛나는 침대로 향하게 만든다. 잠에서 깬 아침인지 잠자리에 드는 밤인지는 불확실하나, 화면의 색이 아침의 경쾌함보다는 밤의 묵직함에 가깝다. 침대에 누운 채로 초록색 리본으로 목을 묶은 강아지를 들어 올려 두 다리 사이에 올린 채 고개를 살짝 앞으로 들어보고 있다. 잠옷이 원피스라 위로 말려 올라갔는지 하의는 아예 입지 않은 것인지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허벅지와 종아리는 젖살이 붙어 있어 통통하니 아직 여성성이 단단하게 자리 잡지 못했고, 천진함이 앳된 얼굴 위로 흐른다. 하지만 침대라는 은밀한 공간, 개의 위치와 둘의 자세, 개의 꼬리털로 소녀의 성기를 절묘하게 가리는 등 이 장면을 순진하게만 볼 수는 없다. 회화가 쾌락과 유희에 이바지하던 시절이라,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얼굴이 붉어졌으리라.

개가 사람의 품 안에서 길러지면서, 사람들은 점차 개를 인간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개에게 옷을 입히거나 사람 이름을 붙여 불렀다. 인간은 어떤 일이 즐겁고 그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절제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과 개의 관계의 역사를 살펴봐도 인위적인 교배를 통해 개의 크기와 생김새를 조절했고, 개를 마치 살아 있는 인형처럼 꾸몄다. 개는 생명체이지만 장식용 생명체로 간주된다. 개가 인간에게 소중하기 때문에, 인간은 개를 사람 대하듯 세심한 부분까지 챙겨주려 하기 때문이다. 이때 개의 본질은 개라는 동물의 본성보다 인간사회에서 차지하는 상징에 방점을 찍는다. 개는 몸의 편안함을 얻는 대신 인간에게 적응해야만 했다.

개, 주인의 사생활을 지켜보고 보호하다


장앙투안 바토, <놀라움(La Surprise)>, 1718년경, 패널에 유채, 36.3x28.2cm, 개인 소장

피에로는 기타를 연주하고 청춘 남녀는 막 키스한 듯 얼굴을 서로에게 묻고 있다. 쓰러질 듯 누운 여자의 몸은 축 늘어진 팔처럼 쾌락에 내맡겨졌다. 사치와 향락이 권장되던 당시 분위기를 잘 담아낸 풍속화다. 피에로와 개의 시선이 모두 한창 열애 중인 커플에게 향한다. 그림 밖 관객의 시선은 커플→피에로→개로 향한다. 여기서 애완견의 역할은 두 가지다. 첫째는 구도의 측면에서 개의 위치에 그림의 주인공들의 행위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무게감을 주는 대상이다. 커플, 피에로, 개의 삼각형 구도가 완성된다. 이로써 인물의 행위는 급박하나, 구도는 안정감을 가진다.

그다음 역할은 연인들의 놀이의 증인이다. 증인은 잘 보이지 않아야 하는 법. 어두운 배경에 숨어 있는 듯 개는 회색이다. 반짝이는 목걸이가 여자의 개임을 뜻한다. 개는 제 주인을 바라보는데, 두 귀는 축 늘어졌으니 어딘가 걱정하는 분위기다. 제 주인을 휘감고 있는 저 남자를 개는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평소와 다른 제 주인의 행동의 변화를 개도 느꼈다면, ‘놀라움’이란 제목은 개의 마음이 아닐까.

이 그림이 정말 놀라운 것은 160여 년 동안 사라졌다가 2007년 영국의 어느 시골 화실에서 홀연히 재등장한 사연이다. 물론 소유자는 이 작품이 지닌 역사적, 경제적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2008년 경매에서 이 작품은 2500만 달러(약 280억 원)에 팔렸다. 그러니 이 작품의 제목만큼 소장자의 심정을 잘 표현하는 것이 또 있었을까.


장앙투안 바토, <사냥꾼(La Chasseur)>, 1710년경, 캔버스에 유채, 23.17x18.7cm, 스코틀랜드 내셔널갤러리

장앙투안 바토(Jean-Antoine Watteau, 1684-1721)는 루벤스풍의 스타일로 한껏 차려입은 연인들이 탁 트인 자연 풍경 속에서 한가로이 춤추고 노니는 장면을 주로 그린 페트 갈랑트1) 장르를 대표한다. <놀라움>에서 음악을 들으며 달콤한 순간을 나누는 연인과 <사냥꾼>에 그려진 청춘 남녀는 경치 좋은 자연 속에서 은밀한 순간을 즐기고 있다. <놀라움>에서 개가 증인으로서 연인을 지켜봤다면, <사냥꾼>에서는 제 주인이 한창 연인을 유혹하고 있는 순간을 지켜주는 경비이자 보초로 등장한다.

특히 개의 표정과 자세가 재미있다. 연인들이 나누는 농짙은 말들을 듣지도 보지 않으려는 듯 귀를 닫고 눈도 감았다. 엉덩이를 땅에 철퍼덕 붙이고 앉은 폼이 이곳에 온 지 꽤 시간이 된 모양이다. 하지만 등을 돌려 둘의 은밀한 시간을 보호하는 동시에 혹시 연인을 방해할까봐 몸은 그림 밖을 향하고 있다. 개가 인간과 더불어 살지 않았다면, 이 그림들은 절대 그려질 수 없었다. 동물을 가까이 두는 삶, 동물과 함께 사는 삶은 분명 인간에겐 축복이다.

산업사회에서는 개도 일한다


헨리 위그스테드, <일하는 턴스피트 개(Turnspit Dog Working)>, 1799년, 일러스트레이션집 『남북 웨일즈 지역 여행의 주목사항』

르네상스 시대부터 유럽에서 개는 이전과 달리 인간 삶의 모든 분야에서 활동했다. 몸통이 길고 다리가 짧은 것이 특징인 턴스피트 종처럼 일하거나, 짐차를 끌고, 소나 양을 치고, 집이나 건물을 지키고, 스포츠 경기에서 힘겨루기에 나섰다. 19세기에 발표된 헨리 위그스테드(Henry Wigstead, c.1745-1800)의 일러스트레이션집 『남북 웨일즈 지역 여행의 주목사항』에 아주 재미난 장면이 있다. 턴스피트 개가 주방에서 마치 다람쥐처럼 쳇바퀴를 열심히 돌고 있다. 개의 움직임으로 생겨난 운동 에너지가 줄을 통해 장작불 앞 바퀴에 전달되어 고기를 회전시키며 익힌다. 스푼을 든 하녀는 소스를 얹거나 하면서 고기가 제대로 익는지 확인하며 조리한다. 이런 이유로 턴스피트 개는 ‘주방 개’ 혹은 ‘요리하는 개’로도 불렸다.


칼 보머, <맨던 인디언의 개썰매(Dog Sledges of the Mandan Indians)>, Plate 28 from Volume 2 of 'Travels in the Interior of North America, 1840~43년, 종이에 석판화, 오마하 조슬린 박물관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인디언들은 개를 이용해 썰매를 끌었다. 칼 보머(Karl Bodmer, 1809-1893)의 위 석판화에서 두 마리의 개가 얼음에 발을 딛고 맨던 인디언 한 명과 재산을 힘겹게 끌고 있다. 벌린 입으로 숨을 몰아쉬며 발을 내딛는 개는 지쳐 있다. 신대륙을 침략한 유럽인들은 인디언들을 학살했고, 개 대신 말을 이용해 눈과 얼음길을 헤쳐 나갔다. 개로 썰매를 끄는 인디언의 전통은 지금은 알래스카 등에서 ‘개썰매 경주대회’같은 아주 인기 있는 겨울 스포츠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쿠르베의 개, 사실주의를 만나다

서양미술사에서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이름은 크게 두 가지로 기억된다. 빈센트 반 고흐가 좌절 속에서 치열한 자기 직시로 자화상 계보에 이름을 아로새겼다면, 쿠르베는 황홀한 나르시시즘으로 특출한 자화상을 완성했다. 초기의 대표작 <절망>에서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는 듯 뜯어낼 듯 겁먹은 표정이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똑바로 쳐다본다. 절망의 원인이 그림 밖 관객이든 그림을 사는 컬렉터든, 그 무엇이든 간에 절대로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청년 화가의 팔뚝 근육만큼 단단하다. 그림 포맷도 풍경화를 그릴 때 사용되는 가로 형을 쿠르베는 패기만만하게 초상화에 적용했다. 절망은 물러서지 않고 도전하는 이에겐 큰 기회를 열어 주기기도 한다.

이토록 강한 나르시시즘에 대한 화가의 근거는 확실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현실을 휩쓸고 있을 때, 쿠르베는 “사실과 진실만을 그리겠다.”고 선언한 사실주의자로서 “천사를 그리라고? 그렇다면 내 눈앞에 천사를 데려오시오”라고 말할 만큼 당당했다. 돌 깨는 노동자와 비너스를 버리고 실재하는 여자의 몸을 있는 그대로 누드로 그렸다. 시대의 변화상과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회화는 담아야 한다고 기세 좋게 외친 것이다. 그 외침은 고스란히 세상의 분노와 멸시로 돌아왔다. 이웃집 아낙네 같은 모델의 누드화(<샘에서 목욕하는 여인>)에 당시 프랑스 대통령 나폴레옹 3세는 채찍질을 휘갈겨버렸다고 전한다. 그 모욕이 쿠르베 개인에겐 아픔이었을 수도 있으나, 서양미술사의 화가로서는 영광이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당대의 주류 화풍은 낡은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자신감과 주류 화단에 대해 비타협적인 자세로 일관했던 탓에 그는 고립된 처지였다. 심지어 <만남(La rencontre)>에서는 자신을 보호하고 지원해준 컬렉터까지도 무시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다.


구스타브 쿠르베, <만남(La rencontre, ou "Bonjour Monsieur Courbet")>, 1854년, 캔버스에 유채, 132.4x151cm,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

화구를 등에 멘 쿠르베가 부유한 은행가 알프레드 브뤼야스를 만나고 있는데, 브뤼야스는 대가 쿠르베를 영접하는 듯 모자를 벗고 팔을 벌려 인사를 건넨다. 그의 수행인은 머리를 숙여 목례를 한다. 한 발을 앞으로 빼고 몸을 뒤로 젖힌 오만한 자세로 쿠르베는 그들을 맞고 있다. 여기서 혈통 좋아 보이는 하운드가 제 주인 곁에서 혀를 내밀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개의 등장은 우선 브뤼야스가 산책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그림을 그린 쿠르베의 입장에서 보자면, 컬렉터와 개가 나란한 위치에 배치함으로써 개의 충성심을 쿠르베 자신을 향한 귀족의 충성심과 일치시키고 있다. 이 만남은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화가의 희망 혹은 환상에 가까워 보인다.

사실주의자로서 국가 권력에 대해서는 큰 소리를 칠 수 있지만 자신의 그림을 구매하는 자본가에게는 그럴 수 없었음을, 하지만 상처받은 자존심을 이렇게 은밀하게나마 보상받으려던 것일까. 젊은 쿠르베의 마음은 화살처럼 뾰족한 턱수염처럼 불편하고 억울했던 모양이다.

주석

1) 페트 갈랑트(fête galante). 18세기 세기 프랑스에서 궁정의 귀부인들이 전원미 넘치는 야외에 모여서 개최했던 사교적인 모임 및 그것을 주제로 한 프랑스 로코코 회화의 주요 주제 중 하나로 ‘우아한 연회’ 로 주로 번역된다. 페트 샹페트르(féte champêtre, 전원의 연회)라고도 불린다. 고대의 전원 목가적인 취미를 당시의 풍조로 삼은 16세기 베네치아파(조르조네,티치아노)의 귀족 취미와 염려(艶麗)한 서정성에 의해서 윤색(潤色)시켰다. 흔히 연극적인 설정이 뒤따른다. 바와토, 랑크레 등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동섭 (예술인문학자) 한양대학교 광고홍보학과 졸업. 파리 8대학 사진학과, 조형예술학부 석사(현대무용), 박사 준비과정(비디오아트), 박사(예술과 공연미학)를 마쳤다. 현재는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반 고흐 인생수업』, 『파리 로망스』, 『당신에게 러브레터』, 『뚱뚱해서 행복한 보테로』, 『뮤지컬 토크 2.0』, 『뮤지컬의 이해』, 『패션코리아, 세계를 움직이다』 등을 쓰고, 『파리 스케치북』,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번역하고, 『유럽 장인들의 아틀리에』의 사진을 찍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미술의 세계> 테마로 보는 미술> 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201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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