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살롱

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 후기인상파와 개: 사람과 함께 살다

라라와복래 2018. 8. 16. 10:05

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후기인상파와 개

사람과 함께 살다

조르주 쇠라, <아니에르의 목욕하는 사람들>, 1884년, 캔버스에 유채, 201x300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회화의 권력은 오랫동안 살롱(아카데미)이 점령했다. 왕과 황제로 대표되는 궁정의 관점과 취향이 참된 회화를 규정했다. 살롱이 추구한 전통적인 소재와 법칙을 거부하고, 당대 파리지앵들의 삶을 화가의 개성으로 표현한 인상주의 작품들은 루브르 박물관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인상파 화가들은 낙담하지 않고 쿠르베의 선례를 좇아 독립적인 전시를 조직했다. 몰아치는 비웃음과 비난은 그들의 새로움을 확실히 증명했다. 새 시대의 새 회화의 길로 사람들이 점차 몰려들었고, 특히 파리의 신흥 부르주아와 신대륙 미국에서 인기가 높았다.

후기인상파가 보기에 초기인상파들은 지나치게 색에 의존했다. 후기인상파들은 회화에서 색보다 면과 형태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고갱과 고흐, 세잔과 쇠라는 저마다의 화법으로 인상주의를 새롭게 했다. 그림의 소재도 중산층 파리지앵들의 라이프스타일에서 훨씬 다양해졌다

19세기에 산업사회를 이룩한 유럽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 것은 아니었다.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일해서 먹고사는 평민의 살림살이와 처지는 오히려 나빠졌다.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던 도시인들에게 개는, 더 이상 사랑스런 장난감(애완) 혹은 살아 있는 값비싼 장식품이 아니었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동반자이자 속마음을 털어놓고 다독이는 감정의 위로자였다.

고갱의 개는 원시적인 자연을 표현한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며 근대회화를 수집하던 부유한 주식 중개인이었던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30대 후반에서야 화가로 정식 데뷔했다. 서구 문명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던 그는 에밀 베르나르(Émile Bernard, 1868-1941) 등과 함께 프랑스 북서부의 브르타뉴 지방에서 농부들과 함께 생활하며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모습을 그리며 클루아조니슴(Cloisonnism: 회화 표현에 있어서 모티브를 단순화해서 파악, 그 윤곽선을 강조해서 그리는 수법으로 주로 고갱을 중심으로 하는 종합주의 화가들에게 적용된다.)을 추구했다. 어떤 측면에서는 인상주의를 훌쩍 뛰어넘는 대담한 비약을 보여주었고, 일부에서는 그를 상징주의의 시작점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부인과 아이들과 떨어져 생활해야 했던 고갱은 인상파 작품을 주로 취급하던 유력 화상이자 반 고흐의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아를에서 고흐와 두 달 정도 함께 지낸다. 그리고 서양미술사 최대의 스캔들 중 하나인 고흐의 귓불 절단 사건이 일어난다. 고갱은 줄곧 그 일과 자신은 무관하며 고흐의 발작과 광기로 벌어진 해프닝이라고 주장했으나, 극도의 이기적인 성격 탓에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기엔 의심스럽다.


폴 고갱, <언제 결혼하니?>, 1892년, 캔버스에 유채, 101x77cm, 개인 소장

극심한 생활고와 서구 문명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고갱은 결국 남태평양 타히티섬으로 떠난다. 유럽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타들어가듯 작렬하는 빛을 그는 원시적인 문명을 소재 삼아 캔버스에 표현해냈다. 비로소 고갱은 고갱이 되었으나 세속의 성공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는 건 여전했고, 나중에 파리로 돌아왔을 땐 가족에게도 외면당했다. 원주민을 옹호하여 현지의 백인 관리들과 빈번하게 충돌했으며 병마에 시달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불행했던 삶과 달리, 최근 그의 작품 <언제 결혼하니?>는 미술품 거래 사상 최고가 약 3억 달러(한화 3천272억 원)에 팔렸다.


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897년, 캔버스에 유채, 29.2x60cm, 개인 소장. 고흐가 신경질적으로 타오르는 빛을 표현한다면, 고갱은 투박하고 거친 원시의 빛을 그렸다.

아주 철학적인 질문을 담고 있는 그의 대표작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타히티의 풍경을 배경으로 오른쪽부터 왼쪽 방향으로 아기부터 노인에 이르는 12명의 인물을 통해 태어나서 죽는 인간의 삶을 단계적으로 담고 있다. 가장 오른쪽에 누워 있는 아기는 과거로서, 인간의 삶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묻고 있다. 그 곁의 검은 개는 흰 발을 앞으로 내고 편히 앉아 있다. 인간은 가장 오래된 충직한 동반자인 동물과 더불어 삶을 살아간다. 대체로 검은(사냥) 개는 불길하거나 포악한 맹수의 분위기를 풍기는데 여기서는 그런 서구 문명에서 비롯된 이미지가 없다. 오히려 개의 검은색은 어쩌면 가장 토속적이고 원시적인, 그래서 가장 생명력이 강한 기운을 풍긴다. 갓 태어난 어린 아기는 연약하나 생의 기운이 가장 강한 것처럼 말이다.

삶은 출생이라는 우연에서 시작되나, 우연에 맡긴 채 살 수는 없다.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살아야 삶의 열매(청춘)에 다다른다. 그림 중앙에서 과일을 따는 젊은이는 인간의 현재로,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삶을 살아가는지를 묻는다. 그 곁에 고양이 두 마리가 놀고 있다. 고양이는 고대 이집트 이래로 다산과 모성애의 상징이다. 특히 흰 고양이는 지혜를 뜻하기도 했다. 어린이가 성장해 청년기에 이르러 아이를 낳고 돈을 벌며 왕성한 생산을 하는 시기임을 일러준다. 하지만 청춘은 곧 늙어가기 시작하는 때이니, 이때부터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림 왼쪽 끝의 노인처럼 귀를 막고 웅크린다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태어난 자는 죽는다는 엄정한 운명은 모두에게 공평하니, 그 두 시간 사이를 잘 채워야 한다. 과거가 쌓여 현재가 만들어지듯, 미래는 현재가 쌓인 결과이다.


폴 고갱, <판다누스 나무 아래>, 1891년. 캔버스에 유채, 67.31x90.81cm, 텍사스 댈러스 뮤지엄

열대의 빛은 매우 습했고 화살처럼 내리 꽂히며 작렬했다. 그 빛을 온몸으로 마주하자, 남성적인 고갱의 감각은 활짝 열리면서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원시성을 느꼈다. 천국 같은 이국적인 풍경을 고갱은 거대한 캔버스에 원초적이며 동물적인 색감으로 표현했다. 색은 강렬하나 풍경의 내용은 평온하다. 강렬함은 불안하기 마련인데 고갱은 그것을 그림의 야수적 생기로 잘 조련해냈다. 여기에서 고갱 그림의 아름다움이 태어났다.

고갱의 열대는 관능적인 현실이었다. 관능은 움 트는 생명의 역동이다. 문명이 오염시키지 않은 원시의 순수한 세계를 마침내 발견한 고갱은 꾸밈없이 건강한 사람들과 풍경을 강렬한 원색들의 거친 대비로 표현했다. 고갱의 열대는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짙은 흙냄새와 풀냄새, 소금기 가득 밴 바다 냄새가 훅 느껴진다. 그래서 붉은 혓바닥을 내밀고 여인들과 동행 중인 검은 개는 열대의 토속성과 이국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환기시킨다. 이 그림을 보니, 위대한 야만인이라는 별명이 고갱에게 꽤 잘 어울린다.


폴 고갱, <아이아 오히파>, 1896년. 캔버스에 유채, 75x65cm, 모스크바 푸시킨 뮤지엄

타히티 여자들 곁에서 몸을 둥글게 만 채 자고 있는 하얀 고양이의 모습이 평화롭다. 목에 줄이 묶여 있지 않으니, 저 고양이는 유럽의 고양이들과 달리 자유를 만끽하는 존재일 터이다. 열대의 빛은 살아 있는 육체를 쉬이 잠들게 한다. 고양이가 깊게 잠들 수 있는 풍경은 안온하다. 저 멀리 실루엣만 보이는 앉아 있는 개가 문을 든든하게 지켜주니, 이곳의 평온은 지속될 것이다.

반 고흐, 나는 개다


에밀 베르나르, <초원의 브르타뉴 여인들>, 1888년. 캔버스에 유채, 93x74cm, 요제포비츠 컬렉션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자유를 얻은 대가로 인상파 화가들은 경제적 곤궁함을 감수해야 했다. 자유와 돈벌이의 줄타기에 성공한 화가도 있었고, 타고난 부를 이용해 자유를 극한까지 추구한 화가도 있었다. 몇몇은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스타가 되기도 했으나, (후기) 인상파 대부분은 죽을 무렵, 혹은 죽은 후에야 뒤늦은 보상처럼 명성을 얻었다. 동시대 사람들에 비해 너무 앞서간 탓이려나. 고갱과 고흐, 세잔 등의 이름에는 그런 불행이 진하게 서려 있다.

에밀 베르나르는 인상파의 유산을 모두 부정하며 형태를 평면적이고 간략하게 처리했고, 대담한 색 조합으로 면을 구성했다. 캔버스에서 새로운 개념(클루아조니슴)이 성장했다. <초원의 브르타뉴 여인들>에서 색채는 평면으로 펼쳐지고 등장인물들은 분명 프랑스 북부 지역 퐁타벤의 전통적인 복장을 하고 있지만, 배경과 유리되어 비사실적으로 보인다. 인물의 사실성은 비단 생김새와 옷차림 등을 충실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다고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삶의 배경(풍경)을 모두 지우고 단색으로 처리하면, 인물과 배경이 충돌하며 캔버스는 비현실적 세계로 보이게 된다. 모네를 위시한 초기인상파 작품들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고갱에게 끼쳤을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베르나르가 두 마리의 개를 그린 이유를 내용적 측면에서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색과 면의 관계를 중요시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저 자리에 배경의 초록색과 대비되는 빨강과 하양이 필요했고, 그를 위해 개를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개의 사회적 위치에서 보자면, 19세기 말에 이르면 오랫동안 남자의 동물(사냥)로 인식되던 개는 다양한 애완 품종이 만들어지면서 여성의 동물(놀이 상대)로도 인식되었다. 남자는 개를 통제하고, 여자는 개와 더불어 자유롭다. 그런 이유로 저 개들은 목줄을 하지 않고 노닐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빈센트 반 고흐, <개>, 1862년, 종이에 연필, 크뢸러뮐러 미술관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에 대해 본능적으로(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나는 느끼고 있어. 나를 집에 들이는 것을 덩치 크고 털 많은 개를 집에 들이는 것처럼 꺼리시지. 젖은 발로 방에 드나들 게 분명한 그 개는 너무 더러워 모두에게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짖는 소리도 시끄럽지. 요컨대 더러운 짐승이야. (……) 나는 자신이 일종의 개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그들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1883년 12월 15일경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이 편지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서른 살 무렵에 쓴 것이다. 여러 직업에 도전했으나 실패했고, 모두를 경악시킬 결정을 내렸다.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 원조를 받으며 나름 열심히 그렸지만 누구에게도 팔 수 없는 수준이었다. 외골수의 성격은 더욱 심해졌고, 가시돋힌 말로 주위를 힘들게 만들었다. 사회적 체면을 중시하던 부모에게 실패자 큰아들과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 자신의 처지를 체념하고, 스스로를 저주하는 듯 굴었다. 젖은 발의 덩치 크고 털 많은 개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의 페르소나였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 이름과 1862년 12월 28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열 살 무렵의 고흐가 그린, 앞발을 잡아당기고 성질 사납게 짖어대는 깡마른 개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고흐와 닮았다. 그의 자화상으로 봐도 될 듯싶다.

쇠라의 개는 점으로 반짝인다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4~86년, 캔버스에 유채, 308.1x207.5cm, 시카고 아트 인스트튜트

19세기 중산층 파리지앵들이 즐겨 찾던 휴식처 센 강의 작은 섬 그랑드자트.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전까지, 대체로 여행과 산책은 귀족의 특권이었다. 19세기 후반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등장한 중산층은 여가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파리 근교는 주말과 휴식을 위한 장소가 되었으며 그랑드자트 섬 역시 그런 곳이었다.

모네와 르누아르처럼 조르주 쇠라(Georges Pierre Seurat, 1859-1891) 역시 파리지앵의 일상생활을 주로 담았는데, 쇠라의 특이점은 사진처럼 일순간의 빛을 표현해냈다는 점이다. 초기작과 달리 쇠라는 선을 사용하지 않고 붓으로 점을 찍어서 표현하는 점묘법으로 개성을 획득했다. 그의 대표작인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2년 정도가 걸렸다. 가로 2미터, 세로 3미터에 등장인물만 40명이 넘는데, 그는 오로지 점만 찍어 이들을 표현해냈다. 다양한 색채와 빛으로 가득하며, 점으로 구축한 인물과 풍경의 형태를 보는 재미가 크다. 특히 색채의 보색대비를 적극 사용하여 시각효과를 극대화시킨 점묘파의 출현을 알린 작품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크다.

개는 이 시기에 가장 대표적인 산책의 동반자였다. 목줄에 핑크 리본을 묶은 아주 작은 요크셔테리어 혹은 치와와부터 목줄을 하지 않고 자유로이 다니는 검둥이와 저 멀리 갈색 점박이 잭러셀테리어까지 다양하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동물은 줄에 묶인 원숭이다. 파리에서 원숭이라니?

선사학 전문가 브라이언 페니건이 쓴 『위대한 공존』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며 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의 탓이 크다. 서구 근대 철학의 핵심이라 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설파한 데카르트는 ‘동물은 기계’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동물은 인간에게 ‘쓸모 있는 것의 집합체’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동물은 곧 ‘먹을 수 있는 고기와 노동력(전투 동물)’의 결합이었다. 생명체라는 인식은 현저히 사라졌다. 이 그림 속 원숭이처럼 멀리서 온 이국적인 동물은 전시용 물건이 되었다. 개가 인간의 역사에 편입된 초기에 그러했듯이.

이동섭 (예술인문학자) 한양대학교 광고홍보학과 졸업. 파리 8대학 사진학과, 조형예술학부 석사(현대무용), 박사 준비과정(비디오아트), 박사(예술과 공연미학)를 마쳤다. 현재는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반 고흐 인생수업』, 『파리 로망스』, 『당신에게 러브레터』, 『뚱뚱해서 행복한 보테로』, 『뮤지컬 토크 2.0』, 『뮤지컬의 이해』, 『패션코리아, 세계를 움직이다』 등을 쓰고, 『파리 스케치북』,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번역하고, 『유럽 장인들의 아틀리에』의 사진을 찍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미술의 세계> 테마로 보는 미술> 동물로 본 서양미술사 2016.06.1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80609&cid=58862&categoryId=58868